요즘 보수언론의 지면을 보면서 참 재미있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한다. 보수언론이 박근혜 정권에 갖는 어떤 태도 때문이다. 정권이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선 웬만하면 옹호하고 거들어주지만 대통령에 대해서 만큼은 완전히 마음이 떠났다는 게 눈에 보인다.

이런 흐름은 박근혜 대통령이 언론사 데스크들과 함께 오찬 회동을 한 이후에 오히려 더 강해졌다. 그 자리에서 나름 ‘화끈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어야 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총선 결과에 대해 마치 정치평론가 같은 한 마디를 남겼고 거의 모든 현안에 대해 지금까지 자기가 주장한 바 그대로를 다시 한 번 녹음기처럼 반복했다. 산전 수전을 다 겪은 언론인들이 일부러 대통령에게 기회(?)를 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누구의 말을 빌자면 그야말로 ‘현문우답’이다.

이유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성난 민심에 사과를 하고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실질적인 의회 권력은 이제 야권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다. 선거 직후 긴 침묵이 이어졌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박근혜 대통령의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태도는 일종의 오기나 오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자신감 결여에 가까워 보인다.

이란을 국빈 방문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1일 오후(현지시간) 테헤란 메흐라바드 공항에 도착, 스카프의 일종인 '히잡(hijab)'을 착용하고 관계자와 대화를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히잡 착용은 양국 관계 발전을 도모하고 이슬람 방문국의 문화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대통령이 직접 ‘양적완화’를 언급한 이후 보수언론들이 일제히 한국은행을 비판하고 나선 것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보수언론은 한국은행이 중앙은행 독립성을 말하며 자존심을 세울 것이 아니라 시급한 현안인 해운 조선업 구조조정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수출입은행 지분을 늘리는 방식으로 자금을 지원하거나 산업은행이 발행하는 코코본드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수혈’을 하라는 거다.

한국은행은 최대한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모양새지만 속으로는 펄쩍 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중앙은행 독립성이라는 원칙으로 봐도 문제지만 일반적 통화신용정책을 관할하는 한국은행이 특정 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서만 정책결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는 쉽다. 이른바 공급과잉 업종의 구조조정이 앞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은행에 대한 이러한 압력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날지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한국은행이 나서면 이게 ‘전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한국은행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기획재정부 남대문 출장소론’이 현실이 되고 말 것이다.

한국은행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잠시 미뤄도 좋다. 지금 가장 큰 의문은 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은행의 발권력까지 빌려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짚을 수 있는 건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채 발행 및 추경 편성이 정권이 원하는 방식으로 통과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굳이 다시 한 번 ‘선별적인 양적완화’를 말한 것을 보면 국회에서 구조조정에 재정을 투입하는 방안이 제대로 논의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여소야대의 상황을 이 모든 일의 배경으로 지목할 수는 없다. 정부가 그간 내수활성화를 모색한다는 명분으로 확대해온 재정지출을 구조조정에까지 쏟아 부을 수는 없다는 판단 역시 작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총대를 매야 한다는 주장이 선거 이후가 아니라 선거 과정에서 나왔다는 점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문제 해결 방법은 정공법에 가까울수록 좋다. 이 문제에 있어서 정공법은 한국은행을 닦달하는 게 아니라 야권과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재정지출의 방향과 폭에 대한 합의를 이루는 것이다. 물론 이 합의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그래도 주요 두 정당이 합의를 보면 되는 문제였지만 이제는 3당이 모여 협의를 해야 한다. 거기에 지금부터의 행보를 사실상 대권까지 이어가야 하는 각 당 주요 인사들의 사정이라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떻게든 국회를 거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만 고집하는 건 대통령이 ‘정치’를 포기하는 것이나 똑같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언론사 데스크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며 나름의 비애를 표현했다고 한다. 아마 이 비애감의 표현은 다소 계산된 발언이었겠지만 대통령의 진심이 분명히 포함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과연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돌파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스스로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민주사회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만족스러운 수준까지 모두 할 수 있는 권력자는 없다. 민의가 대통령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을 모두 실현하라는 뜻이 아니라 다양한 세력의 이해를 조정하고 의견을 수렴해 공동체의 최대 이익을 도모하라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이걸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소통을 한다며 야당 대표를 불러 대화하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되풀이 했고, ‘불어터진 국수’를 말하며 국회가 경제활성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반복해서 주장하기도 했다. 책상을 쾅쾅 치기도 했고 ‘배신의 정치’를 말하며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마지막에 국민에게까지 호소했는데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면, 이제는 대통령이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을 때가 됐다. 4·13 총선 결과의 민심은 바로 이 점을 촉구하고 있다.

아무리 부정해도 레임덕은 이제 코앞이다. 벌써 여당 원내대표 경선 과정에서 이런 흐름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김무성 대표 체제가 비박 당대표-친박 원내대표 구도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친박계 입장에서는 민심을 수습하는 척 하면서 당권을 장악하기 위해 최소한 원내대표를 ‘비박’으로 분류되는 인사에게 맡겨야 한다. 아마 논의 초창기 원내대표 합의 추대설이 나왔던 건 이런 구상이 반영된 바였을 거다.

그러나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유기준 의원이 원내대표 출마를 고집하면서 모든 구도가 꼬이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대통령을 팔고 다니지 말라’는 공개적인 경고까지 했음에도 먹히지 않는다. 이제 친박계 입장에선 유기준 의원을 낙선시켜 힘으로 제압하든지, 당 대표와 원내대표를 모두 장악하기 위한 계파 대결을 선택하든지, 당에 대한 통제를 사실상 포기하든지의 선택지만 남았다.

권력의 황혼은 언제나 내부에서 무너지면서부터 시작된다. 여당 내의 이런 혼란은 박근혜 대통령의 자신감을 더 심하게 무너뜨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를 너무나도 불신해서 이제 국회가 관여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지 않으려 들 것이다. 일부 보수언론이 ‘호남 총리’까지 언급하며 개각을 주장하고 있는데도 꿈쩍도 안 하는 건 그런 신호일 수 있다. 도대체 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하라리는 보장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그러나 상황이 이럴수록 도박을 거는 승부사적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적극적으로 야권과 협상에 임해서 상황을 ‘정치’로 돌파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 안 되면 다 놓아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국정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향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관철시키는 것에서 다양한 세력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걸로 바꿔야 한다는 거다. 임기 말을 ‘퇴임 후 안전판’을 만드는 것으로나 허비할 때가 아니다. 이제는 정말로 대통령 스스로가 정치의 힘을 믿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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