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패배, 이 한 줄의 표현 말고 이번 선거 결과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야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집권 여당에 충격적인 패배를 안긴 20대 총선의 결과는 오직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민심의 단죄, 이것 하나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른바 ‘살생부’ 정국에서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 등이 주장한 그대로이다. 이른바 수도권 비박들은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내쫓으면 수도권 선거는 망한다’고들 했다. 정두언 의원은 의도치 않았겠으나 자기 몸을 낙선이라는 심연에 던져 왜 그런 주장을 했는지를 스스로 증명했다. 호남 지역의 의석에 정당지지율 일부까지 잠식한 국민의당이 나름의 힘을 과시했음에도 더불어민주당이 수도권에서 선전한 것은 그야말로 우려를 결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수도권에서의 민심 이반은 총선 이후의 정국 운영을 넘어 대선 전망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새누리당의 ‘차기 대권주자’로 간주되던 인사들은 마치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져나갔다. 친박들이 대권을 위해 ‘양자’로 들였다는 비유까지 나오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더불어민주당 정세균 의원에게 패해 모처럼의 기지개를 펴자마자 ‘정치생명의 끝’이라는 묘비명이 적힌 무덤 속으로 다시 돌아갔다. ‘총리’를 시켜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플랜B의 고려 대상이 됐던 안대희 전 대법관도 돌아올 방법도 필요도 없는 길에 접어들었다. 대구 한복판에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에게 진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여소야대’ 정국이 조성됐다는 점에서 이 선거의 모든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위상에도 치명적인 금이 갔다. 전문가들은 그간 새누리당이 흔들리지 않는 비결로 공천 시스템이 안정적인 지위를 확립하고 있다는 점을 꼽아왔다.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언제나 기본적인 틀이 예측 가능한 형태로 제시돼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안정성은 김무성 대표가 “나는 공천을 하지 않겠다”며 100% 상향식 공천을 공언하면서부터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략공천이냐 오픈프라이머리냐의 명분 없는 논쟁은 당내 합의의 붕괴로 이어져 청와대가 직접 자기 사람을 꽂자는 구상을 실현시키는 빌미가 됐다. 그러니 김무성 대표는 이 상황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자신이 책임지고 휘어잡아야 했을 부산경남 지역에서 ‘이빨’이 빠져 버린 것도 치명적인 대목이다. 김무성 대표는 원래 박근혜 대통령과 한 번 등을 돌린 사이라 대구경북의 전폭적 지지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부산경남에 수도권 등 기타 지역의 지지를 더해 대권후보 자리를 넘겨받는 형태의 구상을 버릴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번에 부산경남이 이런 식으로 흔들리면서 대권주자로서의 김무성 대표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배신자’를 향한 집요한 추적에 앞장섰던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나 마구 칼을 휘두르다 ‘토사구팽’의 위기에 몰린 이한구 의원, 김무성 대표의 ‘옥새도주’를 수습하려 애를 썼던 원유철 원내대표 역시 치명적 상처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친박 중진이라는 서청원 의원이 전열을 수습하기 위해 나설 수도 있겠지만 국회의장에 도전하는 입장이 되면 엉덩이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우여곡절 끝에 그래도 원내에 입성한 ‘진박’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당의 주요 포스트를 모두 날려버린 상태에서는 영향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 강봉균 공동선거대책위원장과 원유철 원내대표를 비롯한 지도부들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4.13 총선 투표가 종료된 뒤 각 방송사에서 발표하는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즉, 박근혜 대통령에게 있어서 이번 총선의 결과는 전투에서도 지고 전쟁에서도 진 최악의 사태인 것이다.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이 박근혜 대통령 그 자신이라는 걸 과연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많은 국민들은 이미 정치적 냉소주의가 만연한 상황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때문에 일정 정도의 정치적 술수나 어떤 공작(?)과 같은 것들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라면 놀랍게도 보통은 이해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그런 국민의 인내심마저 시험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해할 수 없는 정국 운용 방식은 과연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많은 유권자들이 그런 상식적인 감상을 가졌을 것이다. 이 감상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이런 비극적(?) 사태의 결정적 원인이 되어 버렸다.

언론은 이번 선거 결과로 위기에 빠진 또 다른 정치인으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를 꼽고 있다. 문재인 전 대표는 호남이 지지하지 않을 경우 정치를 그만두고 대권에도 도전하지 않겠다고 공언하였는데, 호남에서 ‘녹색 돌풍’이 불어 닥치면서 이 말에 책임을 지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됐다. 그의 측근들은 벌써부터 ‘언론플레이’를 모색하는 모양이다. 이 정도 성적이면 민심이 꼭 문재인 대표를 버렸다고 할 수 없고 국민의 선택에 맡기자는 애매한 언급이다.

그러나 제한된 여건 안에서 필요한 때에 결단을 내리는 짐을 짊어지는 것은 정치인의 숙명이다. 정계은퇴라고 하니 좀 거창한 얘기 같지만, 손학규 전 대표가 한 걸 문재인 전 대표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선거 이후 당권에 관여할 것도 아니고 따로 역할을 맡을 일도 없다. 정계은퇴와 불출마 선언 약속을 지키더라도 필요한 시기가 오면 다시 등판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전 대표가 자기 자리를 비운 사이, 더불어민주당은 새로운 대권주자들에 대한 여러 모색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대구를 뚫고 올라온 김부겸 의원이나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와 같은 사람들이 ‘차기’로서 일정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국면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총선에서야 금쪽같은 호남을 국민의당에 떼어주는 입장에 내몰렸으나 대선이 다가오면 국민의당과의 사이에 연대 연합이나 정계개편을 전제한 어떤 정지작업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는 건 상식이다. 대통령이라는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자리에 도전하고 싶은 건 더불어민주당에 몸을 담은 인사들 뿐 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언제나 우리와 같은 먹물들이 무시하는 것보다는 현명했고, 추앙하는 것보다는 냉혹 잔인하였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다음 국면에서는 나름 힘의 균형을 맞추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번 총선에서 상당한 타격을 입은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정권을 재창출할 기회가 아주 없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균형의 회복’ 국면이 오더라도 집권 여당이 그 성과를 점유할 수 있는 기반을 이번에 완전히 날려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반면 국민의당을 포함한 야당들은 어떤 작은 기회라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스스로에게 호들갑떨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감히 그 단어를 입에 올릴 수밖에 없게 됐다. ‘정권교체’라는 아주 불경한 짧은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확신할 필요도 없고 여기에 매몰될 이유도 없지만 적어도 이 가능성이 이후 정국의 또 다른 변수가 되리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10년 보수정권의 마지막을 장식할 노을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