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는 유럽,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전 세계 뉴스의 1면을 장식했다.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데 이토록 관심을 기울일 나라가 미국 말고 또 있을까.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당연한 이치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소비시장의 절반을 책임지고 있고, 문화적으로도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기반으로 대중음악, 텔레비전 등을 장악하는 미국의 문화제국주의는 이미 오래된 현실이다. 따라서 미국의 지도자를 뽑는 대통령 선거는 어느 당의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서 각 나라의 이해관계가 결정되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번에 미국 제4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버락 오바마에 대한 세계인의 기대는 남달랐다. 과거 조지 부시 행정부가 추진한 ‘테러와 전쟁’이 세계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정당성도 잃어버린 일방적 외교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있는 상황에서 버락 오바마는 새로운 기대를 주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우선 흑인차별이 여전히 존재하는 미국사회에서 백인의 지지까지 얻으며 사회적 통합자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오바마는 경제위기, 전쟁, 자연재해로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여 새로운 변화의 길을 여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다. 미국 국민은 조지 부시 행정부와 크게 다를 게 없이 감세를 통한 경기활성화를 주장하던 존 매케인 대신 변화의 화신으로 거듭난 오바마를 선택했다.

▲ ⓒwww.barackobama.com
부담스러울 정도로 오바마에게 세계인이 거는 기대는 대단하다. 보수적 일방주의 외교로 일관한 부시와 달리 오바마는 진보적 대화주의자다. 오바마는 부시가 불량국가로 낙인찍은 북한, 이란과 아무 조건 없이 토론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런 오바마를 두고 공화당은 경험 미숙의 이상주의자에 불과하다고 폄하했지만, 진보층은 소통의 달인이며 개방적 인물로 평가내렸다. 부시의 미국은 전쟁으로 뭉쳐진 동맹국 위주의 외교를 펼쳤지만, 오바마의 미국은 전쟁보다 대화를 강조하는 논리로 국제사회에서 이미 통하기 시작했다. 오바마의 미국이 부시보다 개방적일 것은 확실하지만, 세계인이 기대하는 수준을 맞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바마의 개인적 인격이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막중하다. 미국 역사상 대공황 이후로 이처럼 큰 위기는 없었다. 불경기의 침체 속에 빠진 미국경제를 살리는 일만으로도 벅찬데 세계문제와 외교는 다음 수순이 될 수밖에 없다. 재선을 위해서라면 그가 말했던 변화도 잠시 미뤄둬야 할지 모른다. 불안한 미국경제를 정상으로 되돌려놓고 사회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오바마 행정부에서 획기적으로 바뀔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이라크전쟁에 관해 견해를 달리해서 멀어졌던 유럽과 관계를 개선하는 정도에서 그칠 수 있다. 전통적인 경쟁국인 러시아, 중국이 오바마의 미국을 다르게 대해줄 이유도 없고, 미국도 내부적 문제로 말미암아 급진적인 대외정책 변화를 꾀하기 어렵다.

정치적, 외교적 운신의 폭이 좁은 반면 경제적, 문화적 정책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대수술이 필요한 경제는 실험적인 정책이나 변화를 환영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더이상 부시 행정부의 약발이 먹히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 충격적인 변화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경제위기가 미국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므로 국제적 협력도 필요하다. 국제관계 속에서 미국의 이익을 얻어내면서 국제경제가 공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오바마 행정부가 나아갈 것이다. 따라서 오바마 행정부는 고립적인 경제전략을 구사하지 않고 협력적 관계 속에서 변화를 추구할 것이다.

오바마는 역대 미 대통령들보다 문화정책에 더 많은 관심을 표현했고 구체적인 문화정책을 내놓고 있다. 오바마는 세계경제에서 미국이 경쟁력 있는 분야는 기술과 문화이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공언했다. 예술교육에 투자하는 정책을 짜서 향후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취지다. 예술교육에 투자하는 목표로 더 많은 예술가를 길러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사회 속에서 미국민을 온전한 인간으로 교육하여 창의력있고 성공적인 인간으로 길러내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위해서 우선 연방예술기금 예산을 늘리기로 했다. 1992년 이후로 계속 삭감된 예산을 되돌려놓고 예술가들 지원에 나설 것이다. 저소득층 학교와 공동체에 젊은 예술가들이 교육봉사를 할 수 있는 단체도 구상하고 있다. 이외에도 예술가들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정책 등 다양한 방법으로 예술을 지원할 예정이다.

오바마 정부는 그동안 부시 정부가 테러와 전쟁에 몰입하느라 소홀했던 문화외교도 다시 활성화할 계획이다. 미국의 가치와 이상을 알릴 예술가, 사상가, 엔터테이너를 다른 나라에 보내서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문화외교를 다시 살리려고 할 것이다. 비자정책의 강화로 미국 입국에 제한을 걸었던 장벽을 서서히 걷어내서 다른 나라 문화외교사절단, 예술가, 학생들을 받아들일 계획이라고 한다. 뛰어난 인재를 더 많이 유치해서 미국을 문화적 중심지로 변화시킬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오바마가 문화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쟁을 통한 헤게모니를 얻으려 했던 부시의 전략이 실패한 것을 보고 얻은 교훈 때문이다. 경제도 바닥이 난 상태에서 전쟁에 더이상 쏟아부을 자금도 없고, 전쟁보다 문화를 통한 지배가 훨씬 비용이 적게 들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을 움직이는 두 가지 엔진인 전쟁과 시장 가운데 오바마의 선택은 시장이다. 미국의 공화당 정부가 주로 쓰던 전략은 전쟁을 벌여 친미정부를 건설하고 시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시작한 이라크전쟁, 아프카니스탄 전쟁은 테러와 전쟁이라는 명분도 살리지 못하고 실리도 없는 늪으로 빠지는 상황이었다. 오바마는 전쟁을 될 수 있는 한 빨리 마무리하고 시장을 살리고 키우는 전략을 짜기로 결정했다. 부시 정부의 감세정책이라는 임시방편으로 지금 시장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오바마는 교육, 문화, 기술에 투자하는 중장기적 과제에 운명을 걸고 있다. 사회의 기반이 되는 교육, 문화, 기술은 단기적으로 효과를 보기 어렵다. 그래서 오바마는 짧은 시기 안에 경제위기가 극복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당선수락연설을 통해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 시대의 한국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으로 미국의 절대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미국 대통령 선거를 유심히 지켜봤다. 국민은 오바마의 당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다수였다. 백인 기득권 출신의 매케인보다 흑인 소수자 출신의 오바마가 한국 같은 유사 식민지 제국의 국민을 더욱 잘 대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다. 이와 달리 보수적 부시 정부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오바마 정부가 반가울 리 없다. 정치적 코드도 달라서 이견이 있을 수 있고 원하지 않는 외교적 변화도 취해야 할지 몰라 두려울 것이다. 한국은 오바마 정부의 변화된 외교정책에 맞추기 위해서 바빠질 운명이다.

경제의 원동력으로 문화와 예술을 강조하는 오바마 정부는 단기적 효과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국정 철학을 가지고 있다. 평등과 기회균등이라는 가치에 중점을 두면서 미국사회의 지역공동체가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키우려는 오바마의 문화정책은 비록 빠른 성과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사회통합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는 문화예술보다 대운하, 4대강 정비 같은 토건사업을 중시하는 국정 철학으로 오바마 정부와 선명한 대비를 드러낸다. 기존 부시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삭감한 문화예술 예산을 올려주면서 저소득층 문화예술을 고려하는 오바마의 정책은 상당히 급진적인 변화다. 문화예술에 대한 오바마의 관심이 어느 정도 정책으로 추진될지 앞으로 더 지켜봐야하겠지만 지금까지 밝힌 정책만으로도 문화예술계의 전망은 그다지 어둡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옛날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은 가난한 예술가와 교육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줘 미국 문화예술이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이 시기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경제만 신경 쓰고 문화예술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잭슨 폴락 같은 세계적 화가나 수많은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들은 굶어 죽고 말았을 것이다. 오바마가 추진하려는 문화정책을 뉴딜문화정책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문화예술이 경제를 살리는 동력이 될 수 있으며 창조적 비즈니스를 키우는 텃밭이 될 수 있다는 철학은 공유한다.

오바마가 문화예술에 보이는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따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명박 정부는 ‘경제살리기’에 빠져 문화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비록 문화예술이 직접적으로 경제와 멀어보일 수 있지만 세계경제에서 문화예술산업은 이미 대부분 선진국의 주력분야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 문화예술산업에서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고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것만 보더라도 그 경제적 가치를 알 수 있다. 스크린쿼터를 낮춘 후에 한국 내 할리우드 영화 점유율은 놀랄 정도로 급격히 높아졌고, 미드 열풍으로 점점 더 많은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가 수입되고 있다. 대자본의 미국 문화산업이 대대적으로 한국시장을 점령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최근에 한류붐으로 한국문화산업이 약간 성장하긴 했지만 미국 대자본 기업에 비교하면 동네 자영업 수준이다.

‘비’, ‘세븐’, ‘보아’ 같은 일부 한국가수들이 미국시장에 진출하려고 애를 쓰는 것도 미국 문화시장이 세계의 중심부이기 때문이다. 오바마 정부는 미국의 몇 안되는 강점인 문화산업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문화산업의 세계적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오바마 정부는 외교적 수단을 모두 동원해서 지원해줄 것이다. 한국 문화산업도 오바마의 문화정책에 따라서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 그나마 유지하던 한류 아시아시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한국 내수시장이 무너지면 더이상 한류의 동력도 사라지고 만다. 오바마가 아무리 소수권리를 중시한다고 해도 결국 미국의 대통령이지 세계의 대통령이 아니다. 국가적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미국편을 들 수밖에 없다. 벌써 한미자유무역협정도 미국에 불리하게 맺어졌다고 하면서 재협상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취임 전부터 할리우드 스타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오바마는 미국 문화계의 대통령이 되었다. 오프라 윈프리, 브루스 스프링스턴, 쉐릴 크로, 본 죠비 등 대중 스타들이 오바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을 뿐 아니라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군수산업에 지원을 받으며 백악관에 등극했던 부시와 달리 오바마는 문화산업의 수호자로 적극적 나설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미국 경제살리기의 중요한 한 축으로 문화산업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 문화산업은 대외적으로 미국의 도전을 이겨내야 하며, 내부적으로 경제위기까지 이겨내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문화산업에 대한 투자나 정부지원이 줄어들면서 생존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다. 오바마는 한국 문화산업까지 고려할 박애주의자도 아니다. 미국의 시각에서 한국 문화산업은 미국 경제살리기를 위해 희생되어야 할 경쟁상대이다. 게다가 미국의 아시아시장 개척을 위해서 제거되어야 할 걸림돌이 한국 문화산업이다. 단기간에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것에 급급하기보다 사회의 문화적 기초를 다져서 장기적으로 비옥한 문화적 토양을 가꾸려는 오바마의 문화정책은 배울 점이 있다. 문화적 주도권 싸움에서 약자인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 더 깊은 곡괭이질과 튼튼한 종자를 배양할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