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있을 때마다 투표를 하자는 내용의 글을 쓴다. 고백하자면, 허무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투표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없어서가 아니다. 정치가 발전하기는커녕 퇴화를 거듭하는 이 세상에서는 ‘투표를 하자’는 단순한 말에 대해서조차도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나의 ‘투표를 하자’는 말과 다른 사람의 ‘투표를 하자’는 말은 과연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정치를 사고하는 방법을 모른다. 우리는 비판하는 방법을 잊었다. 그렇기 때문에 ‘투표를 하자’는 것은 말하는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됐다. 어떤 사람들에게 투표를 하자는 것은 단순히 헌법상의 권한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투표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헬조선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어느 노인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 발언의 전제는 젊은이들은 반드시 야당을 지지하며, 야당이 선전하면 세상이 나아진다는 것이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이런 식의 ‘투표하라’는 주문은 결국 ‘우리 편 찍으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이른바 진보언론들은 야당이 불리한 구도가 눈앞에 닥치자 마지막 자존심까지 벗어던진 모습을 보여줬다. 심판 완장을 벗어 던지고 그라운드로 뛰어들어 너나 할 것 없이 공을 찼다. 단지 새누리당의 선전을 막기 위한 후보단일화를 매일 같이 촉구했고, 1차원적 논리를 동원해 더불어민주당을 뽑아야 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런 주장을 한 사람들이 특정 세력에 소속된 후보이거나 그를 돕는 선거운동원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언론 스스로가 자신들의 빈곤한 정치철학을 이런 식으로 만천하에 드러낸 것은 우리 언론사의 비극이다.

미디어스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누군가 그런 지적을 해온다면 겸허히 반성할 준비가 돼있다. 당혹스러운 건 그런 지적보다는 오히려 왜 뒷짐 지고 서서 훈장질이나 하느냐는, 도와주지 않을 거면 가만히 라도 있으라는 식의 핀잔이 더 많았다는 거다. 가치와 노선을 말하지 않고 공학만 말하는 선거가 됐다는 아주 상식적인 지적에 대해서도 그런 반응들이 돌아온 것은 가슴이 아픈 일이다.

4·13 총선을 하루 앞둔 1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본동 주민센터에서 선관위 관계자가 기표용구를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는 언제부턴가 선거를 상품을 소비하는 방식으로만 이해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사표심리’다. 내가 지지한 노선과 가치가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절망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될 사람을 찍자’는 논리는 이런 절망을 피하고자 하는 자기위로를 넘어선다. 여기에는 결국 남들과 같은 사람을 지지하는 것으로 안도감을 느끼고자 하는, 인기 상품 구매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소비주의는 마치 상품을 최종 구매하는 걸로 소비의 절차가 일단락되는 것처럼, 투표용지에 기표를 하는 바로 그 행위로 정치에 마침표가 찍힌다는 느낌을 주게 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상품을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이며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정치의 원론은 어떤 정치인이 누구를 어떻게 대변하느냐의 문제를 따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치를 따질 때 이런 틀을 쓰지 않는다. 정치세력이 공약을 내놓을 때 그걸 잘 따져보고 지지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사람은 드물다. 그건 비효율적인 일이다. 어떤 공약이 나에게 득이 될 것인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고, 정치인이 그 공약을 반드시 지킬 거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그것보다는 그저 사람들이 생각하는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어떤 ‘상(象)’을 믿기로 하고 지지활동을 하는 게 속 편하다.

누구를 어떻게 대변하는 것인지 따져보는 일을 생략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잘 대변하는 정치인이 아니다. 그저 ‘이기는 정치인’이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내가 구매한 상품이 높은 가치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정치에 대한 논쟁은 이기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논하는 것에만 국한된다. 중도를 잡아야 하고, 이를 위한 어느 지역의 방문과 사과를 더해야 하고, 유력한 누구를 만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하고, 또 어떤 인터넷을 활용한 퍼포먼스를 해야 한다는 식의 조언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공약이나 정책을 진지하게 따져볼라치면 둘 중 하나의 반응이 돌아온다. ‘당신은 정치를 잘 모른다’는 게 첫 번째다. 이건 정치는 그런 걸 따지는 게 아니라 남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온갖 것을 다 해도 된다는 1차원적 논리에 ‘실용주의’의 외피를 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그래서 당신은 어느 정당을 지지한다는 거냐’는 어떤 ‘진정성’을 묻는 물음이다. 새누리당 지지자가 더불어민주당을 깎아내리기 위해 ‘경제민주화’ 흠집내기를 시도한다면 어떻게 이를 건전한 비판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라는 거다.

이 두 논리를 종합하면 비판은 불가능해진다. 선거 기간에 어떤 정책에 대해 비판을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같은 편을 지지하는 사람에 한하며, 그마저도 대다수는 정치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제 선거는 남을 향한 비난과 우리 편을 향한 응원만이 난무하는 운동회 같은 것으로 전락한다. 세상은 아군이거나 적군이며, 아군 중에서도 배신자가 있으니 늘 조심해야 한다.

선거공학을 말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선거공학은 선거의 일부이며, 선거는 정치의 일부이다. 선거는 이기기 위해 하는 게임이다. 이기고 지는 걸로 선거는 끝난다. 그러나 선거가 끝났다고 해서 정치가 끝나는 건 아니다. 투표는 단지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투표 자체의 향방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투표가 가져올 정치적 효과가 무엇인지, 이로 인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일이다.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이걸 따질 시간이 없다. 이유 중 하나는 장시간 노동에 과하게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론이 먼저 이 상황을 깨뜨리는 데 앞장서야 한다. 정파적 이익에 관계없이 정치권에 일상적인 논쟁을 주문하고,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와 소비주의를 부추기는 행태를 비판하며, 전문가들을 동원해 정치인이 말하는 정책을 검증하도록 해야 한다. 이 결과를 독자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게 선거 국면에서 언론의 몫이다.

비록 우리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유권자는 현명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을 심판하고 야당의 승리를 이뤄야하기 때문이 아니다. 유권자가 정치적 권리를 행사해야 공동체를 건강하게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동시에 그만큼의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우리는 정당이라는 어떤 사업체가 애써 만들어낸 상품을 구매하는 정치-소비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권력을 책임지는 주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책 선거가 실종됐더라도, 또 누구의 승리나 패배가 예정돼있다 하더라도 정치적 권리를 성의있게 행사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권력을 참칭하는 자들이 우리의 신성한 권리 행사 앞에서 벌벌 떨도록 해야 한다. 이게 우리가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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