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선거’, 이 표현이 매번 등장하니 다시 거론하기도 민망하다. 그래도 현대적 정치 환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던 노선과 정책과 공약을 둘러싼 생산적 경쟁은 실종됐다. 7일 신문지면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지역감정 조장 발언과 새누리당 대구 후보들의 큰절,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의 삼성미래차 광주 유치설 등에 대한 비판으로 도배가 됐다.

김종인 대표의 삼성미래차 광주 유치론에 대해선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가 “5공인 줄 아느냐”라고 한 말이 반쯤 맞는 얘기로 들린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는 정권이 압력을 가해 기업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김종인 대표는 그 시절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이다.

예를 들면 그가 진두지휘했다는 5·8 부동산 매각 조치가 그렇다. 그 시기는 정부가 경기부양과 사회간접자본 등 개발을 위해 푼 돈이 기업의 투기에 대거 활용되면서 부동산 경기가 과열된 때였다. 김종인 대표는 노태우 정권의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으면서 재벌들에게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하도록 했다. 쉽게 말하자면 ‘알아서들 성의를 표하라’는 거였다. 형식으로서의 독재가 종식된 이후 정부에 본격적으로 도전하던 재계는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걸 감지하고 자발적인 부동산 매각 계획을 제출했다. 김종인 수석의 대답은 여의치 않으면 강제매각까지 고려하겠다는 거였다. 이 사건이 1992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대통령 선거 출마 계기가 됐다는 해석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가 6일 오전 국회 당 대표실에서 특별 기자회견을 열고 "광주를 미래형 자동차 생산의 산실로 만들겠다"며 삼성의 미래차 산업을 광주에 유치해 5년 간 2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김종인 수석 이전에도 부동산 관련 조치가 검토됐다는 것이다. 이승윤-김종인 팀의 전임인 조순 경제부총리-문희갑 경제수석 체제가 고려한 것은 토지공개념 도입이었다. 김종인 대표는 지금도 토지공개념 도입에 대해 물으면 위헌적 발상이라며 말도 안 된다는 주장을 피력한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에 대한 평가를 하자면 김종인 대표가 구조에 손을 대는 것보다는 강력한 압박에 의한 일회적 조치를 취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사람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런데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이제 청와대의 으름장만으로는 재벌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게 어려워졌다. 특히 공장의 특정지역 유치 등을 위해서는 세제 혜택 등의 ‘당근’이 따라줄 필요가 있다. 이건 기업에게 근로기준법이나 파견 관련 법률을 준수하라고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이건 선과 악의 문제라기보다는 통치의 기예에 해당하는 문제겠으나, 적어도 김종인 대표가 주장해왔던 ‘경제민주화’라는 구호의 차원에서 볼 때는 우려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 안철수 공동대표의 ‘5공이냐’는 발언이 그래도 절반은 맞는 얘기가 되는 거다.

물론 여기에 대해 김종인 대표가 반론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김종인 대표의 반응은 늘 그렇듯 안철수 공동대표를 인간적으로 폄훼하는 걸로 귀결됐다. 7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인터뷰에서 안철수 공동대표를 두고 “그 사람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고 한 거다. 정책적 논쟁을 벌이면 생산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듣는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그냥 흙탕물 싸움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는 거다.

김종인 대표의 이런 처신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게 선거에서의 진지한 논의를 가로막다면 심각한 문제다. 김종인 대표가 같은 자리에서 새누리당 강봉균 공동선대위원장에 면박을 준 것도 하나의 예다. 이날 발언에서 ‘반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양적완화 백날 해봐야 실업해소 안 된다”는 것밖에 없다. 이외에는 ‘관료사회에 젖은 사람’, ‘굳어버린 머리’ 등의 모욕적 표현이나 “관료할 적에는 총명하다고 생각해서 내가 많이 봐줬는데 지금 와서 보니 머리가 몽롱해졌다”는 식의 폄하가 전부다.

따지자면 못 따질 일이 아니다. 강봉균 선대위원장이 내놓은 ‘한국형 양적완화’에 대해서는 보수언론, 그 중에서도 중앙일보가 나름 정확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중앙일보는 6일 지면에서 강봉균 선대위원장의 주장이 사전적 의미의 양적완화라기 보다는 기업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한 자금 지원책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했고 7일 지면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발언을 소개했다. 구조조정은 한국경제 절체절명의 과제이고 선거 때 이를 얘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다가 ‘한국은행 특별융자’로 발표하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테니 ‘양적완화’라는 말을 썼다는 거다. 조원동 전 수석은 현재 새누리당 선대위의 경제대책본부장을 맡고 있다.

중앙일보 7일자 지면에 실린 칼럼

만일 이렇다면 이제 유의미한 논점을 잡을 수 있게 됐다. 새누리당이 말하는 구조조정, 보수언론이 말하는 구조개혁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효과를 발휘하느냐는 거다. 결국 박근혜 정권이 지금까지 추진해온 경제활성화(대표적으로 원샷법)나 노동개혁 등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한국형 양적완화란 그냥 하고 싶었던 일을 더 강하게 추진하겠다는 거다. 상황을 이렇게 규정하면 김종인 대표가 내세우는 경제민주화의 구체적 성격을 재구성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 된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이런 방식이 아닌 쉬운 길을 자꾸 선택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복잡한 얘기 해봐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한국형 양적완화’를 단지 재벌에 돈을 주겠다는 얘기 아니냐며 몰아붙이고 1997년 외환위기까지 연결하는 게 쉬운 길이다. 이것보다 더 편한 길은 아예 생산적인 얘기는 뒤로 다 미뤄놓고 상대를 그냥 한심한 사람으로 깎아내리는 거다. 김종인 대표는 그 모범(?)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다.

선거라는 게 원래 이기면 장땡인 것도 맞다. 그러나 최소한 선거가 좀 더 선진적으로 치러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닐 거다. 한 사람을 장기간 속일 수 있고 많은 사람을 단기간 속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을 장기간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요즘의 선거는 잠깐의 여론몰이로 단기적 이익을 얻는 게임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결국 선거가 끝나면 사람들은 ‘속았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짧은 기간의 정치적 소득의 후과는 냉소주의라는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냉소는 언제나 기득권의 편이다. 선거에서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한국 정치를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모양새로 만들 수 있을 것인지를 제시하고 그 짐을 누가 짊어질 것이냐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정치세력의 중요한 임무다.

물론 야당들만 잘해서 될 일은 아니다. 대구에서 이른바 진박 후보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오만했다며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은 실소를 금할 수 없게 한다. 이 상황은 오로지 박근혜 대통령의 이상한 고집 때문에 만들어 졌다. 보수언론도 그런 모양인지 이날 지면에 절망을 표현한 논설들을 배치했다.

조선일보는 아예 대구에서 진박들이 낙선하고 광주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박살나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내놨다. 국민의당을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함으로써 야권 분열의 즐거움을 보다 길게 누리겠다는 의도가 없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대구 유권자들이 대통령에게 경고를 해야 한다고 선동한 것은 신선하다고 할 수 있다. 여당과 청와대조차 정치적 냉소의 제물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21세기의 선거라는 게 이렇게 굴러가서야 되겠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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