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한심한 선거는 처음이다. 정치권에서 언론까지 결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 넘쳐나고 있다. ‘혼탁선거’라는 말은 돈이 오가거나 막말 비방,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선거를 표현하는 말로 쓰였다. 그런데 이제는 이 단어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해야 할 것 같다. 돈이나 막말, 흑색선전의 등장을 미뤄놓고 봐도 선거판 자체가 이미 혼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5일 지면에 안철수 공동대표와 국민의당 지지율이 창당 초기 수준까지 회복됐다고 전했다. 사설에서는 이게 다 새누리당의 공천막장극과 더불어민주당의 운동권 정당 회귀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조선일보의 주장에 근거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이게 반쪽짜리 진단이라는 걸 우리는 직관적으로 안다. 조선일보가 왜 이런 반쪽짜리 진단을 지면에 실었는지도 실상은 뻔한 얘기다.

공천막장으로 치면 국민의당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 신인 가산점 문제 때문에 당사 앞에 도끼가 등장했고 누구는 현역 의원의 머리를 서류 뭉치로 내리 쳤으며 또 누구는 아예 드러누웠다. 국민의당이 새로 만들어 확정한 로고는 해안에 방파제 역할을 하기 위해 쌓아 둔 테트라포트를 연상케 하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게 사실은 드러누운 사람의 형상이라는 우스개가 네티즌들 사이에 떠돌 정도다.

이런 판국에도 국민의당에 대한 지지율이 상승하였다면 그건 잠시 떠났던 지지층이 갈 데가 없어 돌아왔다는 해석만이 가능할 것이다. 국민의당과 안철수 공동대표가 더불어민주당과 야권연대를 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하면 되는데, 그걸 거부하고 버티고 있으니 뭐 하려는 게 있는가보다 하고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안철수 대표가 국민의당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고 대통령에 당선 되어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여간 뭔가 하고 싶은 게 많은가보다 하고 생각할 따름이다.

하루에 정치에 대해 10분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는 장삼이사들에게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다. 정치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따지는 건 시간도 많이 걸릴뿐더러 귀찮고 피곤한 일이다. 그냥 좋은 일 하겠다는 사람의 마음을 믿고 내가 가진 한 표를 주는 게 최선이다. 물론 이건 바람직한 형태의 정치가 아니다. 가장 바람직한 정치는 유권자 모두가 자기가 지향하는 노선을 스스로가 명확히 알고 여기에 맞는 정치세력에 가담하며 이에 맞는 공약과 정책 노선을 내세우는 후보를 선거에서 지지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다.

한국 정치가 그 정도 수준에 도달하려면 많은 것들이 변해야 한다. 유권자들이 정치의 개념과 용어, 논리에 익숙해져야 하고 정치 자체에 대한 정보 습득을 수월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토록 해야 할 주체는 다름 아닌 언론이다. 언론은 정치 전체의 발전에 대한 공적책무를 짊어지고 있다.

기계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언론은 논조를 통해 자신의 지향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편파성’에 도달하는 과정은 최대한 공정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언론의 논조에 따른 편파적 결론은 공적가치의 실현에 중심을 놓고 숙고를 거듭한 결과여야 한다. 언론의 논조나 지향이 특정인의 사적 이해관계나 언론사 자신의 생존에만 좌우되면 안 된다. 이건 두 번 얘기할 필요도 없는 상식에 속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언론의 태도는 우려스럽다. 있는 일 없는 일을 다 끌어 모아 어떻게 하면 여당에 유리한 얘기를 꺼낼까 고민을 거듭하는 보수언론은 그렇다 치자. 자타칭 진보언론까지 이런 식의 혼탁 유발에 나서는 것은 곤란하다. 최근 한겨레라는 신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야권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개선되지 않는 현실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하루는 사설로, 또 하루는 ‘선임기자’ 명의의 기사로, 또 하루는 누구의 칼럼으로, 다시 또 하루는 사설로 돌려막기 하듯 국민의당과 안철수 대표를 비난하는데 모든 힘을 다 쓰고 있다. 심지어 후보 단일화를 강요하기 위해 멱살을 잡아야 한다는 얘기까지 등장했다.

물론 언론이 야권 후보들 간의 단일화를 촉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런 걸 요구하는 것도 논조라면 논조다. 그러나 언론에게는 야권 후보 간의 단일화를 도대체 왜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게 더 중요한 임무다. 이에 대한 한겨레의 설명은 이번 선거는 박근혜 정권에 대한 심판이 되어야 하며, 이 목표가 희석돼 새누리당이 과다하게 의석을 확보해 국회선진화법을 개정하거나 개헌이라도 하는 경우 아주 큰일이 날 수 있다는 걸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새누리당을 반대하는 사람들끼리나 나눌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만일 유권자들에게 어떤 균형감각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싶다면 멱살을 잡는 게 아닌, 훨씬 세련되고 품위 있는 방식이 많이 있다. 미국에서 공화당을 지지하는 어떤 코미디언이 자신의 팬들에게 보냈다는 이메일의 내용을 예로 들 수 있다. 미국은 양당제적 원칙이 장기간 이어져 온 국가이고 이런 전통을 감안하면 민주당 정권이 8년이나 했으니 이제는 공화당 정권이 들어설 차례라는 게 이 사람의 논리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후보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논쟁하고 최선의 답을 도출해낼 정도로 똑똑해야 하므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 ‘균형감각’의 결론이다.

무작정 야권 후보들 간의 단일화를 강요하며 그 결과에 일희일비 하는 것은 그저 유권자들의 정치적 냉소에 편승하는 일일 뿐이다. 이 선거가 한심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가 정치적 냉소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냉소주의는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논리가 한 단계 더 확장될 때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지금의 ‘한심한 선거’는 정치적 냉소주의가 선거의 구도를 ‘그 놈이 그 놈이니 아무도 찍지 않겠다’는 논리와 ‘그 놈이 그 놈이니 아무나 찍겠다’는 두 개의 선택지로 협소화시켰고 여기에 편승한 정치세력과 언론이 제각기의 이해관계만을 따져 정치가 실종되고 만 결과다.

최근 언론이 가장 열띤 관심을 보인 주제는 후보자들의 ‘특이한 가족’에 관한 사항일 것이다. 여기서 특이한 가족이란 직업이 연예인인 아들이나 딸, 아나운서인 배우자, 외모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딸 등을 포함한다. 정치인이 가진 비전이나 도덕성과는 하등 관계도 없는 일들이 마치 선거의 중요한 포인트인 것처럼 둔갑해 등장하고, 유권자들은 또 거기에 환호한다. 이건 어떤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자포자기’적 정서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와 언론이 모두 이 모양인데, 도대체 이런 가십거리가 아닌 무엇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언론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대목은 야권분열에 의한 새누리당의 압승에 관한 게 아니다. 그건 산 속에서 야생동물들이 뛰쳐나오는 광경을 보며 이제 숲이 더 안전해질 거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다. 지진이나 화산 폭발과 같은 재해가 곧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모르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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