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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로우뉴스’ 같은 시도를 못한다[신문법 시행령 개정이 없애는 것들] 슬로우뉴스 편집장 민노씨 “독자가 비평의 권력을 획득해야만 저널리즘은 바뀐다”
박장준 기자 | 승인 2016.03.29 15:44

(이 인터뷰 전문은 인터뷰 대상의 특성에 맞춰 특별하게도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문학적 형식을 빌려 작성하였다)

만나기 전부터 민노씨를 아주 조금 부러워 해왔다. “~할 것으로 전망된다” “분석이 제기된다” “비판을 면키 어려워 보인다” 같이 주어 없고, 품격 있는 척하는 글을 쓰는 나와 달리 민노씨는 솔직하게 쓴다는 생각을 해서다. 지난해 10월 한겨레가 교육부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의견광고를 수주해 1면에 실었을 때, 나는 <한겨레, 3천만원에 ‘국정교과서’ 1면 광고 실었다>와 같은 스트레이트 기사를 썼다. 한겨레를 마음껏 비난하고 싶었지만 <‘교육부 광고 논란’에 대한 한겨레21의 정신승리> 같은 비평 글을 하나 썼을 뿐이다.

민노씨는 비슷한 시기 <한겨레 키드의 독백>이라는 글을 썼다. 이렇게 썼다. “한마디로 쪽팔린 일이다. 한겨레 내부 성원들이 그 누구보다 치욕스럽게 느낄 것으로 생각한다. 저널리즘 컨텐츠와 광고 컨텐츠를 분리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둥, 법 뭐시기 조항을 보면 문제 될 게 없다는 둥의 헛소리에 대해선 일고의 가치가 없다. 이론이나 법으로 피난간다고 구원받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냥 쪽팔린 일이다. 부끄러운 일이고, 치욕스러운 일이다.”

(나는 허핑턴포스트코리아피키캐스트를 비평하고 저널리즘을 감히(!) 논할 때도 굉장히 점잖았다. 그런데 민노씨는 같은 글에서 이렇게 썼다. “결정적으로 스마트폰과 페이스북과 카톡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저널리즘 산업은 질적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고,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개와 고양이, 셀럽과 웃동, 그리고 그나마 봐줄 만한 모호한 휴머니즘이 협의로서의 저널리즘을 완전히 대체하는 순간까지는 이제 겨우 3초 정도 남은 것 같다.”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런 거였다.)

나는 왜 민노씨처럼 쓰지 않았을까. 기자랍시고 품격을 찾다 보니 그랬다. 그리고 나는 이런 식의 글쓰기에 완전히 길들여졌다. (미디어스로 직장을 옮겼지만, 여전히 ‘기사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가 겪은 첫 편집국장은 “친구에게 말하듯 기사를 쓰라”고 했다. 그러나 기자의 99.9% 아니 100%가 그렇게 쓰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기자라면 더 절절하게 느끼고 있겠지만 이제 ‘기사’는 잘 안 읽히는 장르다.

자해는 여기까지만. “민노씨가 아주 조금 부러웠다”고 쓴 이유는 부럽긴 하지만 ‘아주 조금’ 부럽기 때문이다. 나는 기자들을 존경한다. 권력기관을 출입하는 기자들에게 희망을 건다. 여차하면 도매급으로 찌라시와 기레기 대접을 받고, 자신을 ‘업계 관계자’로 사칭하고, 권력 앞에서는 질문도 제대로 된 질문을 못하고, 쏟아지는 보도자료 챙기기에도 바쁘고, 간혹 민감한 이슈를 발제하지만 데스크에서 ‘킬’을 당하고, 고양이 사진과 경쟁하는 시대에 태어난 불행한 기자들이지만 그렇다.

MBC에 다니는 기자(인 친구)는 “결국 특종은 출입처에서 나온다”고 했다. 정부 3.0이라고 하지만 진짜 권력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정보와 증언은 늘 숨어 있다. 출입처에서 이런 걸 캐내는 게 기자의 역할이다. 하루에도 수십 건씩 쉼 없이 쏟아지는 ‘단독기사’는 그런 노력의 산물이다. 분석, 해설, 비평의 대상이 되는 원재료를 갖다 나르는 것도 여전히 기자의 역할이다. 끈질기게 ‘현장’을 찾아다니고 ‘권리’를 지켜내는 데 기여하는 기자들이 많다.

저널리즘에 대한 민노씨의 생각은 분명했다. 17일 부천 집에서 만난 민노씨는 민노씨의 부천 집에서 3시간에 걸쳐 진행한 인터뷰의 대부분은 기자와 저널리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알고 있는 기자들의 행태를 말했고, 민노씨는 질문 하나에 A4 한쪽 분량의 답변을 내놨다. 왜 슬로우뉴스의 실험을 주목해야 하는지 충분한 답을 들었다. 아마도 저널리즘은 이렇게 발전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 누구나 언론을 할 수 있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금보다 투명하게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저널리즘 말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역주행하고 있다. 청와대와 대통령, 그들이 찾는 품격은 웹과 SNS 시대의 저널리즘을 후퇴시킨다. 애초 민노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목적도 ‘신문법 시행령 개정’에 반대 입장을 듣기 위해서였다. 신문법 시행령 개정으로 인터넷신문 등록요건이 3인에서 ‘5인 이상’으로 강화되면서 슬로우뉴스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언론’을 만들어내는 것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동전문기자 넷이 모여 노동전문매체를 만들더라도 ‘언론사’가 아니기 때문에 고용노동부 같은 정부부처에는 드나들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이제 슬로우뉴스와 같은 시도들을 잃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래는 민노씨와의 대화이다.

   
▲슬로우뉴스 편집장 민노씨의 작업실(이자 거주지) 모습. 부천시 오정구 소재. 이곳에는 재떨이만 두 개 이상인 것으로 확인됐다. 모니터와 키보드를 한 컷에 담기 위해 모니터를 눕히고 키보드를 앞으로 당겼으나 정작 초점이 나가고 말았다. 안타까울 뿐이다. (사진=미디어스)

-신문법 시행령 개정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러 왔지만, 이 질문은 나중에 하려고 한다.

무엇이든 물어보라.

-일단 슬로우뉴스를 시작한 이유를 알고 싶다.

사람은 경로의존적이라는 이야기들을 한다. 물놀이를 좋아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사람이 탐험가가 못 되더라도 여행사에 취직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그 정도의 경로의존성이 있었던 것 같다. 슬로우뉴스는 블로그를 하면서 만난 친구들이 함께 만들었다. 오래된 분들은 안지 10년이 넘었고, 짧게 만난 분들도 5~6년이다. 내 정체성에는 ‘블로거’가 있다. 웹에 기록을 남긴다, 디지털 기기를 활용해 디지털 문명에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 ‘광의의 블로깅’이다. 과거 교류하고 대화를 나눈 블로거 ‘아거’라는 분이 있다. 나아(我) 자에 갈거(去 ) 자를 쓴다. 나는 이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영감을 받았다. 이분은 ‘협의의 저널리즘과 블로기즘의 차별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게이트키핑이 없는 인간의 목소리’라고 간명하게 정의했다. 누구의 생각을 구할 필요가 없고 정말 자유롭게 쓴다. 이것이 블로그의 힘과 속성이다. 단점도 있지만 블로기즘의 매력적이다.

슬로우뉴스에 글을 쓰는 행위는 나에게 일종의 심리치유 과정이다. 글쓰기는 자기를 스스로 객관화해 그 고통, 슬픔, 분노를 친구들과 나누는 심리치유 과정이다. 공적으로 이야기해보면, 역사적, 사회적, 관념적으로 높은 문턱이 낮아졌다. 누구의 개입도 받지 않고 누군가에게 발언한다는 자격 말이다. 그리고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글을 쓰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경제적인 수단’이 되는 시대에 도착했다.

블로그의 매력에 대해서는 종종 이런 비유를 쓴다. 8090에 백만장짜리 앨범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슈퍼스타들이 등장했지만, 들국화 시인과촌장 신촌블루스 같이 각자 개성으로 활동한 뮤지션들이 음이라는 풍경을 풍성하게 했다. 엄혹한 시절 사람들에게 위로를 줬다. 사회운동, 정치운동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했다. 나는 저널리즘과 블로기점이라는 것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싶었다. 이것이 경로의존적이고 나의 사회적 정체성과 닿아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블로깅을 열심히 해보자고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우리는 ‘파워블로거지’라는 상업적 세력이 나오고, 돈이 게이트키핑을 하는 것을 목도했다. 슬로우뉴스 창간멤버 15명은 ‘새로운 것을 해보자, 미디어의 흐름을 조망해보자’고 했다. 처음에는 블로거로 만났으니 블로거 입장에서 인터넷의 문제가 무엇인지 컨퍼런스를 했다. ‘인터넷 주인찾기(인주찾기)’를 해마다 2회씩 했다.

존경하는 바리(진보네트워크 장여경 활동가)님이 ‘인주찾기가 있어 고맙다’고 했지만 갈증이 있었다. 강정수 박사가 브레인 역할을 했고, 내가 마당쇠를 맡아 슬로우뉴스를 준비하게 됐다. 블로거가 상업주의 세력에 잠식당하고, 상대적 자율성이 있었던 블로그가 매체의 메커니즘에 갇히고, 분산화된 네트워크 블로거의 파워가 아니라 극소수의 파워블로거지가 나오고, 한두 곳의 글로벌 기업이 전 세계의 목소리를 관장할 수 있는 자발적 빅브라더 시대를 목도하면서 ‘작은 목소리라도 협의의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무엇이라도 해보자’고 했다. 2011년 말부터 준비를 해서 2012년 3월 슬로우뉴스를 창간했다.

블로기즘의 강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당사자주의고, 다른 하나는 자유롭게 쓴다는 것이다. 당사자주의라는 것은 자신이 체험한 것을 쓴다는 것이다. 나는 ‘나는’으로 시작하는 글의 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는 부당노동행위를 당했다’는 표현에는 지식이 충분히 담겨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저널리즘의 맹아’라고 생각한다. 공정함, 불편부당함 같은 껍데기, 당파성을 부정하는 가식적인 저널리즘의 방법론을 버리고 솔직한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반면 블로그가 갖고 있는 취약점은 ‘취재원에 대한 고려’다. 슬로우뉴스는 그런 점을 보완하고자 했다.

-블로기즘으로 협의의 저널리즘을 구현한다는 것의 장점을 좀 더 말한다면.

블로기즘과 기존의 저널리즘이 다른 것은 두 가지다. 먼저 관계자 저널리즘. 그런데 우리나라 저널리즘에는 ‘실명이 보장돼야 하는 취재원’과 그렇지 않은 취재원에 대한 구별이 없다. 블로그는 그렇지 않다. 또 하나는 객관성이다. 미국은 이미 ‘공정성의 원칙’을 과거에 포기했다. 한국의 저널리즘에 ‘나’라는 주어가 없는 것이 그렇다. 기사를 유령이 쓴 게 아닌데도 그렇다. 박장준이라는 30대 남성 기자가 쓴 것이다. 기사가 그 조건에 갇힐 수 있다. ‘나’라는 주어를 빠트리면 표피적으로 대단히 공정하지만, 맥락적으로는 굉장히 편향된 기사가 될 수 있다.

-관계자 저널리즘에 대해서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경제부 기자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그 기자는 경제기사에 등장하는 ‘업계 관계자’에 대해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면 기자 본인인 경우도 상당히 많다”고 했다. 충격이었다. 아무튼 슬로우뉴스는 기존 언론의 문법과 다르다.

저널리즘은 다중의 독자와 대화하는 과정이다. 그 문법이 변한 적은 없다. 그게 독자들에게 익숙한 방식이다. 그런데 독자들은 새로운 욕구, 표현물의 자극을 받는 존재다. 기성 일간지의 두괄식 기사, 처음에 결론을 넣고 마지막에 전문가의 논평이 들어가는 방식에 식상함을 느낀다. 그래서 카드뉴스 같이 새롭게, 짧게 이야기하는 형식도 나왔다. 어느새 존대말 기사도 익숙해졌다. 언론사가 자발적으로 시도하기도 하지만 ‘더 이상 지금과 같은 텍스트 위주의 기사는 읽지 않는다. 어떻게 독자와의 접촉면을 늘려갈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카드뉴스, MCN, 1분짜리 동영상뉴스가 그렇다. 뉴욕타임스도 버즈피드를 벤치마킹한다고 하지 않나. 기성의 저널리즘에 있는 사람들은 의식은 훌륭하지만 여전히 디지털, 모바일 같은 것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지 못하다.

물론 시대의 흐름과 속도가 가혹할 만큼 빠르다는 생각도 한다. 일정하게 그 시대의 흐름과 속도가 지나치게 가혹할 만큼 빠르다는 생각도 든다. 21세기 초에 기자생활을 하는 분들에게는 가혹한 일이다. 문법이 바뀌고, 대중의 욕구과 감각과 인식틀이 너무 빠르게 바뀐다. 그렇지만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기성 언론사에 종사하는 저널리스트들은 온라인을 ‘서자’나 ‘육두품’으로 취급한다. 온라인을 실시간급상승검색어를 대응하는 팀 정도로 만든다. 아니면 ‘우리가 직접 발로 뛰어 얻은 정보를 복붙(copy&paste)해서 전달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기성언론이 ‘출입처 저널리즘’에 갇혀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저는 출입처야말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권력기관에 드나들고 정보를 캐내고 하는 게 기자의 역할이다. 이것을 잘 하는 게 언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을 흔들 수 있는 팩트 하나, 증언 하나를 캐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론의 강점은 ‘현장’이다. 안수찬 기자(한겨레21 편집장)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안 편집장은 자신에게 ‘현장 페시티’가 있다고 얘기한다. 그만큼 현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고통의 현장, 기쁨의 현장,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은 어떤 보고서나 보도자료를 보도 기사를 쓰는 것과 본질에서 다르다. 현장이 갖고 있는 중대성과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언론의 역할은 반드시 존재하고 그 영역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바일이 인간의 신체 일부로 확장된 시기에 현장은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맞다. 다시 출입처 저널리즘 이야기를 하면, 저는 어쨌든 사람들이 평가하고 해석할 팩트 하나를 건져 올리는 작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전달하는 여러 가지 기술이 나오지만, 그것은 따로 생각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목소리는 대단히 중요한 콘텐츠다. 그게 아까 말한 원(原) 소스다. 디지털 시대의 현장은 정보가 모이는 장소다. 인간이 즉각적으로 뱉어내는 감정, 그 실시간성을 획득한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이 축적된 콘텐츠를 어떤 방법으로 어떤 관점으로 분류하고 해석하고 잘 정리해서 독자에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예시를 하나 들자면, 우리나라 정치기사는 대부분 계파 위주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요정과 밀실에 있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특종이 된다. 물론 그것이 특종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저열한 방식으로 학습시킨 효과가 있다. 정치는 패싸움이 됐다. 우리가 초등학교 중학교 때 ‘일진이랑 누가 친하냐’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게 정치는 아니지 않나. 정치는 사회의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미래공동체의 상을 만드는 과정이다. 이걸 위해서는 축적된 데이터를 해석해야 하는데 한국의 저널리즘은 이런 부분이 대단히 취약하다.

-그럼 뭘 써야 하나.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지금의 정치기사는 계파의 일차원적인 권력욕에 대한 스케치다. 그 인간이 왜 움직이고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가, 국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기사는 별로 없다. 스토리가 없는, 아주 선정적인 포르노그래피 같다. 김종인과 김무성이 왜 중요한 인물인지,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할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이 빠져 있다. 친박이니 비박이니, 친노패권주의가 있느니 없느니 같은 것에 정치의 디테일을 몰아넣고 사람들을 멀어지게 한다. 국회는 법을 만드는 곳이다. 정책이다. 어떤 계파가 어떤 정책을 어떤 관점에서 밀어붙이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국회의 의안정보시스템은 정보의 보고다. 저널리스트들이 이 정보를 어떻게 분류하고 해석하고, 그 중요성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뉴욕타임즈나 가디언 같은 곳에서도 ‘법안에 대해 잘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다.

-기자들이 중요한 의안정보를 놓쳐서 한 달이 지난 다음에 발견하고 그걸 단독기사로 쓴 경우도 봤다. 다시 슬로우뉴스 이야기를 해보자. 슬로우뉴스는 솔직히 ‘먹물’을 타겟으로 하는 것 같다. 필진 구성도 그렇고. 슬로우뉴스에 대한 내부 평가는 어떤가.

회의 때 그런 얘기가 자주 나온다. 우리는 특정 계층을 타게팅할 생각은 없다. 일단 편집위원회 시스템을 설명하자면, 슬로우뉴스는 수평적 시스템이다. 누군가 강한 권한을 갖지 않는다. 자신의 취향과 철학의 관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할 수는 없고, 대부분이 대화를 통해 걸러진다. 다만 어떤 사람의 의견을 쉽게 가로막지 않는다. 다 듣고 나서 이야기한다. 슬로우뉴스에는 인간의 솔직하고 뜨거운 목소리, 또 다른 한편에서 매우 정제되고 차가운 목소리가 있는데 이것이 편집위원회를 거쳐 미지근하게 나오는 것도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뜨거운 인간의 목소리에서는 취재원에 대한 고려, 팩트 체크, 자문, 외부 조언을 통해 편집을 가하는 편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흔히 ‘먹물’이 좋아하고 읽을 만한 글들이 많이 생산돼 왔던 것 같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다. 자기가 체험한 것을 쓸 수 있고 체험하지 않더라도 솔직한 감정을 반응할 수 있다. 이것이 저널리즘의 맹아이자 중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가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슬로우뉴스에서도 내보낼 수 없는 것이 있다. 보통의 위대함을 무한하게 존중하지만 모든 것을 기사로 낼 수는 없다. 평론가 김현은 누구나 시인이고, 누구나 시를 쓰지만, 누구나 시집을 내는 건 아니라고 했다. 내부 비판에서 그런 말을 했다. 제가 편집장이긴 하지만 기성 언론조직의 편집장처럼 데스킹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파트너인 써머즈(슬로우뉴스 편집위원 및 발행인)님과 자주 이야기를 한다. 제가 쓴 글도 킬 당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두 개의 절충점을 계속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터뷰 전에) 지금까지 필자가 350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 발행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편집팀 내부에서 쓴 글과 외부 기고가 있다. 기고의 비중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우선 온라인 그룹에 글을 올려 의견을 받는다. 집단데스킹이다. 강한 반대의견이 있으면 발행을 못한다. 침묵을 지키면 발행할 수 있다. 다만 중론을 얻지 못하면 발행을 못한다. 그래서 글 하나 발행하는 것 때문에 3박4일 싸운 적도 있다. 그것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비효율성이 있다. 학술회의 같은 이런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서 나간 창간멤버가 ㅍㅍㅅㅅ 리승환씨다.

-이제 본론이다. 신문법 시행령 개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미디어스가 처음은 비마이너를 만났다. 그런 대안언론이 없어지게 생겼다. 슬로우뉴스를 만나는 이유도 비슷하다. 슬로우뉴스 같이 여러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언론을 만드는 시도가 봉쇄된다.

너무 황당하다. 너무 위헌적이다. 인간의 감정으로 얘기하면 황당한 것이고 논평한다고 하면 위헌적인 것이다. 두어 가지로 논점을 나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저널리즘 차원이다. 저널리즘이라는 행위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이고 관습적이다. 본질적으로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저널리즘적이다. 그것이 갖고 있는 상들이 있다.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어가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발언하거나 자신의 슬픔과 고통, 억울함을 호소한다. 말로 하기도 했고 텍스트를 통해서 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림과 사진, 동영성으로 한다. 이게 ‘협의의 산업화된 저널리즘’이다. 인간이 스스로와 공동체에 대해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행위를 저널리즘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국가가 함부로 개입해서 멸절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두 번째 논점으로 이어가면, 정책적이고 사회적인 필요가 있다면 규제할 수 있다. 그것은 공동체의 갈등을 줄이고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신문법 시행령 개정이 타당한 언론 정책인가. 영화 <베테랑>에 나온 대사처럼 맷돌의 손잡이가 없는 상황이다. 어이가 없다. 왜냐. 이들(정부와 보수언론)이 이야기하는 것은 ‘사이비언론 퇴출’이다. 그런데 이 정책을 통해 사이비언론을 퇴출하거나 축소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극히 일부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극히 일부의 효과를 위해 결코 파괴해서는 안 되는 것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선량한 피해자를 양산할 것이다. 너무나 자명하다. 정책입안자들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규제는 최후에 동원할 방법이다. 그네들 논리를 ‘산수적으로’ 따라가면 5인이 안 되는 언론은 사이비언론이다. 정책이 바로 모순이다. 대통령이 1인미디어를 언급하는 시대다. 1인미디어의 시대에 5인 미만 언론은 언론이 아니라는 것은 바보 선언이다. 정책의 한계가 자명하기 때문에 유지되기 곤란한 정책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정책이 탄생했는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반헌법적이고, 과잉규제에, 사회적으로 정책 실효성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상식의 선에서 추론할 수 있다. 소위 조중동과 연합뉴스, 일간지, 경제신문은 사이비언론 퇴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언론들이야말로 ‘충격고로케’로 상징되는 뉴스 어뷰징, 유사언론행위를 해온 존재들이다. 자회사의 형태가 됐든 아니든 말이다. 자기 스스로 퇴출 못한 행위를 이제는 찬동한다. 그리고 국가정책에 찬성한다. 자기 모순적 행위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이 정책이 실질에서 언론행위를 규제한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다. 1인미디어의 시대이고 모바일이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된 시대에 국가가 저널리즘, 그리고 언론의 등록요건을 강화한다 하더라도 수용자 입장에서 영향이 크지는 않을 것이다. 4인 언론사가 한 명을 더 채우지 않는다고 해서 그 언론사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상업적 관점에서 일부 제한을 받을 수는 있다(네이버와 다음이 정부 정책에 적극협력해 5인 미만 인터넷신문이 포털 검색결과에서 사라질 가능성). 그러나 언론 종사자나 언론학자라면 언론사에 대한 법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구분해야 한다. 사회적인 의미로서 언론사를 규제할 수는 없다. 블로터 이성규 기자가 페이스북 박상현 홍보총괄을 인터뷰했는데, 슬로우뉴스를 예시해서 질문했다. 대답은 이랬다. “국내법상 인터넷신문 등록 요건을 경직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사용자가 미디어라고 납득할 만한 매체라면 제휴를 추진할 것이다.” 독자가 언론이라고 생각한다면, 본질로서 언론이라는 이야기다. 페이스북의 답변은 정책입안자들이 숙고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국가가 나서서 ‘언론 아님’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을 흔히 봐왔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호나 때 그랬다. 지금 상황은 한마디로 슬픈 코미디다. 웃픈 상황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슬로우뉴스는 앞으로 어떤 주제를 다룰 것인가.

열거하자면 2박3일 걸린다.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람들은 돈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 관심을 줄인다. 즉각적으로 자신의 출세와 생존에 보탬이 되지 않는 정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저널리즘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고양이 사진도 저널리즘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에서는) 헐벗은 여성도 저널리즘의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 어떤 것을 좀더 칭찬하고, 어떤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지 말이다. 사람의 슬픔, 분노, 분노를 어떻게 잡아낼 것인지, 이게 저널리즘이 역사적으로 해온 고민이다. 기쁨과 자극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저널리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저널리즘에 부족한 것이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자기 잘못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한 저널리즘’이다.

슬로우뉴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궁극에서는 글을 쓰고, 또 읽는 사람의 포지션이다. 필자와 독자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돼서는 안 된다. 권위의식에 쩌들어서는 안 된다. 훈계해서도 안 된다. 서로 설득하면서 상생해야 하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언론사 나름대로 좋은 저널리즘, 지혜의 저널리즘, 혁신 저널리즘을 외친다. 똑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저널리즘을 칭찬하고 그것이 돈을 벌 수 있는 지속가능성을 만드는 ‘비평의 권력’을 독자들이 획득해야 한다. 그런데 이 권력이 소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은 지금 크게 두 가지 억압에 노출돼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박근혜 정부로 상징되는 권위주의 정부다. 빅브라더 같은 소설 속 존재가 실존한다. 먼저 해외에서 봐도, 전문가들이 봐도 그렇다. 한국은 언론탄압국에 가깝게 분류되고 있다. 빅브라더의 위험이 하나라면, 나머지 하나는 자발적이고 순종적인 사이버 쾌락주의다. 쾌락이 우리를 학습시킨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예언한대로 우리가 사랑한 테크놀로지가 우리를 망친다. 우리의 24시간은 정해져 있다. 진지하고, 고통스럽고, 분노해야 하는 것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사회적 참여의 시간, 그 책무가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점점 더 다른 미디어의 소비에 의해 줄어든다. 

슬로우뉴스를 하면서 돈도 못 벌고 힘이 들었다. 힘이 들 때마다 파트너인 써머즈님과 회의하면서 서로를 위로했다. 또 마음 속으로 슬로우뉴스 창간 때 들풀님이 김광규 시인의 시구를 인용하며 써준 글을 떠올린다. “이 분들이 온라인 매체로 또 일을 벌여 새로 시작합니다. 이 작은 시작이,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도 보고, 길가의 과일 장수나 생선 장수도 보고, 아픈 애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도 보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자그나마 이바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슬로우뉴스가 대단한 매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의 기준이 트래픽이 되는 저열한 저널리즘 판에서 가치를 평가하고 밀도 있는 평가를 하는 매체가 필요하다. 이런 매체가 독자의 수준에서 실현돼야 한국의 저널리즘이 슬픔을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매체 소비 방식과 기기, 습관이 바뀌면 특정 매체, 기기에 대한 의존성이 줄 수밖에 없다. 고고하게 저널리즘을 외치고, 온라인은 카드뉴스로 대응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독자와의 접점을 넓힐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비판하는 인사이트, 피키캐스트,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위키트리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슬로우뉴스는 청춘씨:발아, 범근뉴스 같이 그 친구들이 할 수 있는 콘텐츠를 싣고 있다. 이 친구들은 감각적으로 디지털 네이티브다. 오히려 저는 이른바 ‘꼰대세대’에 돌입했다. 감각적으로 따라갈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그런 감각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슬로우뉴스가 그런 움직임과 협업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슬로우뉴스는 디지털 네이티브들이 어떻게 사유하고 느끼는지 관심이 있다. 그런 것을 잘 하고 싶다.

박장준 기자  weshe@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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