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신문시장 정상화 투쟁 때보다 더 본질적인 절박감을 느끼고 있다.”

지난 2003~2004년 전국언론노조 신문개혁특위 위원장으로 일했던 경향신문 이재국 기자가 최근 미국 연수에서 돌아와 취재지원시스템 논란과 언론인의 정치권 진출 등 언론계 현안에 대해 날세운 비판을 내놓고 있다. 그는 언론계 온정주의적 관행에 맞서 내부비판, 실명비판을 하겠다며 ‘스따’(스스로 따돌리는 사람)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 기자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기사송고실을 예전으로 돌려놓고 각종 법제도적 측면에서 언론개악을 해도 기자들은 박수칠 수 있겠느냐”며 현재의 ‘싸움’은 언론이 진정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필요로 할 때 더 큰 어려움에 부닥치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 정은경

지난 25일 저녁 경향신문 편집국에서 그를 만났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이다.

-글이 나간 뒤 R기자의 반응은 어땠나.

"한편으로는 섭섭하고 불쾌했다고 하더라. 내부적으로도 할 수 있었던 이야긴데 왜 그렇게 공개서한 형식으로 보냈는지, 또 경향신문에서 간사하는 기자가 많지 않은데 이름까지 R이라고 써서 섭섭한 측면도 있었다는 얘기를 간접적으로 들었다. 내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아직 그런 얘기를 못하고 있다. 며칠 동안 내가 밤잠 못 이루면서 느꼈던 고민 같은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줬으면 한다."

“밤새워 고민한 내용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 격려와 비난 중 어느 쪽인가.

"일부 특파원들이 전화나 메일을 통해 공감의 뜻을 전해왔다. 일부 논설위원 분들도 쉽지 않은 얘긴데 잘했다 하는 사람도 있다. 나한테 직설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불편함 같은 것도 느낀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용을 가지고 ‘그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글이 기사화되는 과정에서 기자들이 잠시 분노를 가라앉히고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현 시점에서는 내용이나 각론에 대한 토론은 없는 것인가.

"그 이후 나타난 양상들을 보면 기자들의 인식이나 행동에는 변화가 없는 것 같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선후배 따지지 않고 모여서 진짜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무대가 마련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기자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말이다. 언론은 독자와 국민의 것 아닌가. 일정한 수의 기자나 편집국장, 보도국장이 생각하는 것이 마치 해당 언론의 의견인 양 보도하는 것은 기자나 언론의 본분을 모르는 것이다."

-공개편지라는 형식을 택한 배경은 무엇인가.

"이 문제가 굉장히 소모적이면서 비생산적인 방향으로 오랜 시간 흘러오면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따져보는 게 힘들어졌다고 느낄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막혀있더라. ‘투쟁’이나 ‘결사저지’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합리적 방안을 도출하는 것이 기자 아닌가. 그래서 그동안 내가 느낀 안타까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게 좋겠다 싶어 고심고심하다가 공개편지를 보냈다. 이름을 쓸까 말까 하다가 현재의 신문사 풍토에서 같은 회사 선배가 후배에게 말하는 식이 되면 내용을 떠나서 방식을 가지고 곡해할 수 있겠다 싶어 이니셜로 했다. 그리고 사실 특정 기자를 향한 얘기라기보다는 기사송고실과 관련해 모든 기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더 솔직하게 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기사송고실 논란, 첫단추부터 문제…기협특위도 더 멀리 봤어야”

-기사송고실 논란이 꼬이게 된 시점은 언제라고 보나.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진 측면이 있다.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다양하게 해왔던 언론정책과 대언론관계를 반성적으로 들여다보는 차원에서 접근했더라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1월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기자들이 죽치고 담합하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에 이 땅의 기자들은 모두 청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어떤 집단이든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것인데 국정 최고 책임자가 기자들을 도매금으로 싸잡아서 얘기하는 순간에 기자들의 자존심이 짓밟혔다. 힙겹게 외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기자들을 분노하게 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불신이 깔려 있었고 그 불신은 기자들의 반발과 감정적 보도로 이어졌다. 그 보도는 또 정부를 자극하면서 서로가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 지난 16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2층 로비에서 한국기자협회 회장단과 외교부 출입기자들이 합동브리핑센터 이전 등을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기자협회보

기자협회 취재환경개선특위가 이 문제를 슬기롭게 풀 수 있었다고 본다. 어떤 배경이었는지는 모르나 합리적인 대안 모색보다는 결과적으로 갈등을 더 조장해가는 그런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달라진 미디어 환경, 그리고 정치 환경 속에서 진정한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 좀 더 멀리, 좀 더 높이서 보는 시각이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지금도 신문발전위원회와 신문유통원을 폐지하는 법안을 내놓고 있고 이명박 후보의 집권 또한 유력시되는 상황이 아닌가. 신문과 방송의 경계선이 허물어지고 자본의 논리가 언론시장에 투입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된다면 그야말로 국민의 알권리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지 않겠나.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다. 만약 이명박 후보가 기사송고실을 예전으로 돌려놓고 법제도적으로 '언론개악' 조치를 한다면 기자들은 박수칠 수 있나. 기자들이 기사송고실 문제에 ‘언론자유 탄압’이라는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국민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되고 나중에 진짜 국민의 힘이 필요할 때 지지를 얻기가 힘들지 않을까. 그 부분이 제일 안타깝다.

-차기 기자협회장 선거에서도 이 문제가 쟁점이 될 텐데 해결방안은 무엇이라고 보나.

"이번 사안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가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인식이다. 대통령이 사과하고 기자들도 송고실 투쟁을 멈추고 지금이라도 남아있는 정기국회 기간 동안 정보공개법 개정을 해내야 한다. 지금 물러나면 마치 언론자유를 포기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절대 안된다. 통합브리핑룸 체제에 문제가 있다면 해보고 제도적으로 보완할 문제인지, 송고실 체제로 되돌려야 할지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당당한 태도다.

부처에 기자실이 있어야 한다는 발상도 더 이상 유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출입처의 신화는 빨리 떨쳐내버려야 한다. 이명박 후보가 됐든, 정동영 후보가 됐든 집권 후 기사송고실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우리가 왜 기자실로 가냐. 우리가 갈 곳은 현장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기자협회장 선거와 관련해서는 굉장히 우려스러운 일을 발견했다. KBS 기자협회장이 특위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기자협회장 출마를 선언했다. 이것은 차기 출마를 희망하는 사람이 현재 회장과 갈등 구도를 만들어서 유리한 선거구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 ‘맞다’고 얘기해준 꼴밖에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미 많은 선거운동을 한 셈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차후에 엄정한 평가를 해야 한다고 본다."

“진짜 권력,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할 때”

-최근 행보가 심상치 않은데 왜 이러는 건가.

"지난 2004년 언론노조에 파견 나가서 신문시장 정상화 투쟁을 할 때보다 지금 더한 절박감을 느끼고 있다. 2008년이면 독립언론 10년, 한겨레 20년이 되는데 우리 신문 기자들이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하고 사회적인 인식도 예전만 못하다. 나 스스로도 많이 약해졌다. 이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데 이 위기를 당연시하면서 더욱 파편화되고 내부 토론도 사라지고 있다. 그런 현상이 경향신문 편집국에서 노조위원장 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 조선일보 10월12일자 4면.

이제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언론인의 문제, 발상의 문제, 행태의 문제, 보도의 문제가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언론개혁이라는 생각을 뼈저리게 하고 있다. 언론노조 신문개혁특위 위원장으로서 신문시장 정상화 투쟁을 할 때는 ‘조중동이라는 거대 족벌언론 때문에 경향신문 같은 작지만 소중한 언론도 다 죽겠구나’라는 생각이었다면 지금은 특정 매체의 문제가 아니라 언론의 위기가 총합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나 싶다.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고도 언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본질적인 고민이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물신자본주의가 횡행하는 이 시대에 민주방송 쟁취를 위해 투쟁했던 KBS 기자들이, 언론노조의 중심이 되어야 할 KBS본부가 어떻게 돈(기자협회 회비와 언론노조 조합비)으로 조직을 좌지우지하려고 할 수 있나. 40대 중반의 기자가 뭘 어떻게 하겠나. 중층적이고 복합적이고 광범위한 위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내부비판이나 실명비판을 할 생각이다.

혹자들이 세속적인 잣대로 보자면 내 글이 노무현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청와대에서 뭔가 알아보려고 전화만 해도 압력이 되고 기사가 되는 시대다. 하지만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선 어떤가. 진정한 기자라면 우리의 밥줄을 쥐고 있는 권력에 대해 아니오라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저 부끄럽지 않은 기자이고 싶어서 이런다”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는데.

"‘너는 깨끗이 살았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솔직히 기자실의 특권을 향유했던 사람 중 하나다. 그러나 이제 버려야 할 기득권은 버리고 반성할 건 반성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무엇을 위해 이러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기자이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다. 기자의 미래가 점점 불투명해지는 현실 속에서 그저 부끄럽지 않은 기자이고 싶어서 그런다. 그런 생각에서 기자협회 지회장을 맡았고 내부에서 쓴소리도 하려는 것이다. 누구는 나더러 철이 없다고 하는데 부장이 되고 더 많은 후배들을 거느리는 위치에 가더라도 그때에도 철이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것도 좋겠다, 이렇게 계속 철없는 인간으로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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