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방송국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는 중년의 여성과 마주쳤다. 어딜 찾아오셨는지 물어보니 방송국에 볼 일이 있단다. 사무실로 들어가시자고 했더니 먼저 올라가 있으라고 한다.

잠시 후 왜소한 몸집의 그녀가 거봉 한 박스, 귤 한 박스를 가지고 계단을 걸어 3층까지 힘겹게 올라왔다. 거봉은 끝물이고 귤은 이제 막 출하하기 시작한 시점이라 둘 다 비싼 과일이다. 정성이 고맙기도 하고 사연이 궁금하기도 하여 여쭤보니 ‘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새벽에 명상 프로그램을 즐겨듣는 애청자인데 익산에 온 김에 방송국 직원들 드시라고 과일이나 사들고 왔다’는 것이다. 미술을 전공한 그녀는 우연히 새벽에 명상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고 창작하는데도 영감을 받아 법어나 기도문을 소재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 ⓒ 김사은 PD
방송을 통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던 사람이 한 줄기 선율의 음악과 한 마디의 멘트로 마음을 되돌려 새로운 생명을 이어나가는 사람도 간혹 있고 실의에 빠진 사람이 우연히 방송 채널을 돌렸다가 기적처럼 용기를 얻었다는 청취자의 사연도 종종 접하게 된다.

중소도시에 있는 우리 방송사에는 순박하고 애틋한 정성을 쏟는 애청자가 많다. 집에서 단감을 수확했다며 검은 비닐봉투에 한 아름 담아 경비실에 놓고 가는 사람, 도시 근교에 있는 미륵사 다녀오는 길에 그곳의 특산물이라는 두부와 갓 버무린 김치, 게다가 막걸리까지 사들고 오는 애청자도 있다. 순박한 눈을 껌벅이며 ‘여여 드시라’고 손짓하는 그분들을 외면할 수 없어 한 두 모금 마시다보면 영낙없이 ‘음주방송’인 셈인데 그래도 그 분이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어주는 김치 맛은 어디에 비할 수 없는 꿀맛이다.

가끔 식혜를 해서 나르는 분, 비오는 날 출출한 시간 즈음 어김없이 김치전, 파전을 해서 나타나는 분, 개편 준비하느라고 애썼다며 뜨끈뜨끈한 찰밥을 솥단지 채 들고 오는 애청자도 있다.

아침을 거른 김에 허겁지겁 먹다가 문득 한 생각이 머리에 솟구쳤다. 이 분들은 왜 이렇게 방송국 직원들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퍼붓는단 말인가? 나는 이 분들로부터 이처럼 거창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나? 이 분들의 과분한 사랑을 감내할 자신이 있단 말인가? 주는 대로 덥석덥석 받아먹고 그 업을 어찌 다 감당할 것인가? 언젠가 책 속에서 보성 대원사 공양간에 적혀있다는 글을 보고 어찌나 가슴이 뜨끔하던지 수첩에 적어 두었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먹어라

봄에서 한 여름 가을까지

그 여러 날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 아닌가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움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거여

사람이 고마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미술학도 출신의 애청자가 놓고 간 귤 한 조각 벗겨먹다가 목이 메인다. 귤 한 조각, 밥 한 톨도 다 이유있게, 가치있게 먹어야 할 것이다. 귤 한조각 거봉 한 알의 무게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진다. 방송을 어떻게 만드는지 그분들이 지켜보고 있다. 밥값! 정말 잘해야 한다.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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