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의원의 정치적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이미 ‘식구’들은 다 잘려나갔고 자신의 운명도 금명 간에 결정 날 가능성이 크다. 새누리당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16일 유승민 의원 공천 문제에 대해 “굉장히 정무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라면서 결정이 더 늦어질 가능성을 암시했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 대표의 ‘정무적 판단’과 사실상 같은 의미의 표현이 등장한 것이다. 김종인 대표는 이해찬 전 총리를 낙천시키는 과정에서 공천 결과 발표를 미뤄 ‘자진사퇴’를 유도했다. 이한구 위원장이 굳이 같은 표현을 쓴 것은 역시 같은 효과를 노린 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칼을 거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보수언론과 비박계 인사들의 주장까지 종합해보면 이번 새누리당 공천 내홍의 대략적 윤곽이 드러난다. 큰 맥락을 짚어보자면 이렇다. 새누리당의 이번 공천에서 유승민계가 ‘멸문’을 당했지만 김무성계는 대략 목숨을 건졌다. 유승민 의원을 잘라내는 걸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이유는 그의 탈락이 가져 올 수도권에서의 역풍 때문이다. 윤상현 의원의 탈락도 마찬가지로 상층 이슈에 크게 좌우되는 수도권에서의 여론 악화를 우려한 때문이다. 동시에 윤상현 의원을 잘라내는 걸 대통령에게 ‘찍힌’ 인사들을 치는데 근거로 썼다.

새누리당 이한구 공직선거후보자추천관리위원장이 15일 오후 새누리당 여의도 당사 회견장에서 20대 총선 제7차 공천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제 이 맥락을 과거의 상황에까지 적용시켜보자. 우선은 ‘살생부’ 논란이다. 살생부 논란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도대체 왜 정두언 의원과 같은 사람들을 불러서 “당신이 살생부에 올라와 있지만 내가 막고 있다”는 얘기를 했느냐는 거다. 오늘의 결과를 보면 결국 유승민 의원에 대한 청와대와 친박계의 요구를 막을 수 없다는 점을 말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정두언 의원은 과거 친이계의 주요 축의 하나였으나 지금은 이른바 ‘소장파’로 지칭되는 그룹의 일원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들은 ‘소장파’로 불리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면 상층 정치이슈의 흐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수도권 비박’ 정도로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이들에게 유승민 의원이 탈락하느냐 마느냐는 박빙 승부에 영향을 미치고도 남을 사안이다. 누군가 “유승민을 자르자”고 하면 이들은 반발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정두언 의원은 그간 유승민 의원을 지속적으로 비호해왔다. 또 이들은 지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같은 ‘비박’이라도 김무성 대표의 이해관계는 이들과 결이 다르다. 김무성 대표는 대권을 노리고 있다. 대구경북과 박근혜 대통령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김무성 대표가 대권으로 갈 수 있는 가장 쉬운 경로는 박근혜 대통령과 완전히 척을 지지 않은 상태로 끝까지 버티는 것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입맛에 맞는 대권 주자를 세우려는 모든 시도가 결국 좌초될 경우 정권재창출을 위해 여권에서 그나마 유력한 후보인 김무성 대표를 선택하지 않겠느냐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버티려면 청와대와 친박이 김무성 대표의 목줄을 잡고 유승민 의원을 잘라낼 테니 뒷다리 잡지 말라고 할 때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는 뻔한 얘기다.

그런데 김무성 대표로서는 수도권 비박의 여론도 무시할 처지가 못 된다. 수도권의 지지가 없으면 대권으로 못 가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니 정치인 김무성이 이번 국면에서 얼마나 고민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추측하기로 ‘살생부 논란’은 이 대목에서 나온 것 아닌가 한다. 김무성 대표가 정두언 의원에게 친박과 청와대의 압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지만 수도권 비박은 자기가 지켜낼 수 있노라고 얘기한 게 문제의 시작이었을 수 있다는 거다.

정두언 의원의 당시 발언은 이런 추측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정두언 의원은 자신이나 유승민 의원 같은 사람들 쳐내면 선거는 어려워질 거라고 주장했다. 또, 김무성 대표가 ‘지라시’에 나온 얘기를 종합했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반박하면서 ‘30시간 법칙’까지 얘기했다. 김무성 대표가 일을 내면 30시간을 못 버티고 청와대와 친박의 압력에 굴복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건 ‘유승민’과 ‘굴복’이라는 키워드다. 물론 이런 일련의 행보는 ‘살생부’의 존재를 정치적 부담으로 만들어 정두언 의원 자신의 이득을 지키려는 의도가 더해진 걸로 볼 수도 있다.

김무성 대표를 중심으로 보면 청와대와 친박계가 윤상현 의원을 내친 것도 일종의 ‘묵인’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윤상현 의원은 누가 뭐래도 친박 핵심이고 대통령의 사랑(?)을 받는 존재 중 하나다. 그런 사람이 ‘죽여버리고 싶어 하는’ 존재가 차기 대권주자라고 한다면 이건 영 권위가 서지 않는다. 청와대와 친박은 윤상현 의원을 버림으로써 수도권 여론의 붕괴를 막는 동시에 김무성 대표의 체면을 살려주는 효과를 고려했을 가능성도 있다.

새누리당 주호영 의원이 1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리는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는 김무성 대표에게 공천 배제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친박과 김무성 대표가 ‘오월동주’했다는 해석이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인 거다. 잘려나간 사람 중의 하나인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직접적으로 이렇게 발언하고 있다. “공천이 시작되기 전에 가장 우려했던 사태가 바로 김무성 대표와 ‘진박’의 결합인데 그렇게 될 경우에 가장 최악의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예측이 사전에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김무성 대표가 안심할 수 있게 된 상황은 전혀 아니다. 친박들이 차기 대권주자의 하나로 꼽는다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종로에서 생환해오면 큰 부담이 된다. 비록 국무총리 후보로서 불명예스럽게 낙마한 문제 때문에 빛이 바래긴 했으나 마포갑 공천을 받는데 결국 성공한 안대희 전 대법관도 있다. 김무성 대표의 남은 과제는 이들을 비롯한 친박계 대권주자들의 도전을 계속 이겨내는 것이다. 이 점을 뒤집어 보면 김무성 대표가 유승민 의원에게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해석이 된다. 청와대와 친박이 ‘협박’을 한 결과로 볼 수도 있지만 차기 대권 구도를 놓고 유리한 쪽을 택한 적극적 선택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이번에 유승민 의원이 ‘장외’로 밀려나게 되면 당내 비박들의 대안은 결국 김무성 대표만 남을 수밖에 없다. 친박을 등에 업은 후보를 지지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지금까지의 해석이 실체적 진실과 어느 정도 가까운 것이라고 하면 결국 오늘의 이 사태에는 김무성 대표의 책임도 작용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오늘의 이 사태’의 핵심은 청와대와 친박에 대한 여당 대표의 굴복이겠으나 좀 더 큰 틀에서 한국 정치의 퇴행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보수언론이 새누리당 공천의 문제 중 하나로 꼽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진박 마케팅’을 결국 현실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선거에 출마하는 정치인이 자신의 지향과 공약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라 ‘진박 인증샷’으로 승부를 보겠다고 하는 후진적 정치다.

김무성 대표는 이제 이런 퇴행의 꼼짝없는 공범이 되었다. 이런 사람에게 과연 대권을 맡겨도 되는 것인지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판단을 내려야 한다. ‘진실한 사람’식 정치인식과 여기에 제대로 맞서지도 못하는 허약한 정치력의 대권주자라는 양자택일은 그야말로 비극이다. 김무성 대표는 스스로 대권을 향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미 정치를 제대로 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다. 여당이 정권을 재창출하느냐, 정권이 교체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가 발전하느냐, 퇴행하느냐의 문제다. 끝없이 퇴행만을 반복하는 새누리당의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결국엔 ‘콘크리트 지지’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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