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방송과 언론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 온 KBS기자협회(협회장 이병도, 이하 기자협회)에 대한 사측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KBS 사측은 방송법에 따라 만들어진 방송편성규약에 의해 ‘실무자 대표’의 권한을 갖는 기자협회장의 보도 제안을 ‘편집권 침해’로 몰고, 공정방송 감시활동을 주 업무로 하는 노조와 기자협회 소속 기자에 징계를 내려 압박한 데 이어, 아예 현재의 기자협회를 ‘비정상’이라고 낙인찍으며 ‘정상화’를 촉구했다.

‘KBS기자협회의 정상화를 촉구하는 모임’(이하 정상화 모임)은 11일 밤 11시 30분께 사내 게시판에 글을 올려 기자협회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들은 기자협회가 △협회원들의 총의를 담으려 노력하지 않고, 집행부 등 소수가 프레임을 만들어 독점하고 △언론자유를 외치지만 ‘민주노총 산하 특정 노조의 2중대’라는 비판이 나올 만큼 사실상 특정 정치세력의 대변자 역할을 해 왔으며 △모니터 보고서를 통해 KBS뉴스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해사행위를 주도하고 △정치 조직화되어 사내외에서 ‘성명서 정치’를 한다고 비난했다.

정상화 모임은 특히 자사 보도 모니터링에 대해 ‘해사행위’라는 수위 높은 표현을 써 가며 혹평했다. 정상화 모임이 ‘KBS뉴스의 신뢰도를 추락시키는 해사행위도 서슴지 않는다’며 예시로 든 보도는 지난 9일 <뉴스9>에서 방송된 <검찰, JTBC 손석희 사장 소환…‘출구 조사 도용’ 혐의>였다. 클로징 멘트에 나온 ‘불법적인 행태’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에 정상화 모임은 “출구조사 도용 건은 KBS의 권익 보호와도 직결된 사안이다. KBS기자협회는 KBS의 기자협회인가, JTBC의 기자협회인가”라고 반문했다.

KBS는 최근 드라마 PD 3명이 동시에 JTBC로 자리를 옮기자, 중앙일보-JTBC-홍석현 회장을 겨냥한 보도국 TF를 급조한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된 바 있다. 내부 기자들이 보도국 TF의 존재와 목적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타사에 비해 JTBC의 잘못을 더 강조하는 리포트를 내보냈을 때 ‘의도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또,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 대해서 보다 신중한 표현을 권장하는 것 역시 가능한 조언이다. 물론 정상화 모임의 성명에는 이런 배경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상화 모임은 매일 이루어지고 있는 보도 모니터에도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왜 작성자를 밝히지 않는지, 어떤 절차를 거쳐 보고서를 올리는지를 따져 물으며 “익명성에 숨어 특정 보도를 겨냥해 편향적인 비판을 가하고 이슈화시킴으로써 열심히 일하는 동료들의 등에 비수를 꽂는 행태도 자행해 왔다”고 질타했다. 이어, “기협이 주장하는 공정성과 중립성은 민주노총 산하 언론노조와 특정 정치세력 그리고 특정 매체를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정치인이 아니다”라며 모니터 내용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정상화 모임은 “정치판보다 더한 독단적인 의사결정 구조와 편향적 시각을 갖는” 것이 기자협회의 “가장 큰 문제”라며, “협회원들의 의견수렴 없이 밀실에서 작성된 성명서나 내부 정보는 어김없이 특정 몇몇 매체로 흘러가 포털을 장식한다. 이는 명확한 해사 행위”라고 강조했다.

정상화 모임은 현재의 ‘비정상적’ 기자협회 운영에 대한 조언도 얹었다. 정상화 모임은 “대다수 협회원들은 협회비를 내고 받은 혜택이 거의 없다”며 △기자들이 5~6년 된 컴퓨터를 들고 다니며 일하는 현실을 고민해 본 적 있는지 △낮은 지방 출장비에 문제의식을 가진 적이 있는지 △시간외 수당이 왜 이렇게 적은지 진짜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특정 목적을 위해 KBS 기자사회를 황폐화시키고 ‘언론자유’나 ‘공정보도’ 등의 명분으로 포장해 온 세력들은 KBS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대다수 조직원들과 시청자들의 가장 큰 적”이라고 주장했다.

정상화 모임의 주장은 기자협회 설립 목적의 두 축 가운데 하나는 버리고 하나만 취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KBS의 기자들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방송의 자유와 독립을 구현하고 프로그램의 공익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취재 및 제작의 자율성을 수호”하는 부분은 버리고, “회원의 자질향상, 친목 도모와 권익 옹호, KBS 내·외부 협회와의 유대 강화”에 힘쓰라는 의미다.

이에 KBS기자협회 이병도 기자협회장은 △방송의 자유와 독립, 취재 및 제작의 자율성 수호가 기자협회의 제1목적이고 △뉴스 모니터는 소속 노조도 부서도 다양한 구성원 30여명이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위해 ‘익명’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협회는 늘 열려 있으니 언제든 의견을 달라는 입장을 밝혔다. (▷ 관련기사 : 그들은 왜 KBS기자협회를 저격했나)

111명 중 평기자는 20여명 남짓… “내용도 절차도 문제”

정상화 모임에 참여한 기자는 총 111명이다. 정지환 보도국장, 최재현 정치외교부장, 김형덕 탐사제작부장, 이강덕 디지털뉴스국장, 강석훈 국제주간, 장한식 편집주간, 박영환 취재주간, 박승규 스포츠국장, 정은창 방송문화연구소장 등 주요 간부들과 각각 평일, 주말 <뉴스9> 진행을 맡은 황상무, 최문종 기자 등이 이름을 올렸다. 부장급, 팀장급 협회원이 다수를 차지하고, 현재 협회원이 아닌 인원을 제하면 평기자는 20여명 남짓한 수준이어서, 내부에서는 ‘정상화 모임’이 과연 ‘자발적’으로 성명을 낸 것인지에 의구심을 갖는 반응도 나왔다.

KBS 고대영 사장과 정지환 보도국장 (사진=KBS)

실제로 KBS 보도국 간부들은 이전부터 줄곧 ‘기자협회’에 불편한 심기를 비쳐왔다. 고대영 사장-정지환 보도국장 체제 이후, 그 움직임은 더 자주, 더 선명하게 노출돼 왔다. 지난해 12월 세월호 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특별조사위원회의 청문회 보도가 부실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관련 보도를 강화하자고 제안한 KBS 기자협회장에게 “편집권 침해”라며 집단 성명을 내어 대응한 것이 대표적이다.

KBS기자협회장은 2001년 노사 합의로 제정한 KBS 방송편성규약이 정한 본부별 편성위원회 ‘보도위원회’의 실무자 측 대표자다. 이를 통해 편집회의 등 뉴스 전반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제도로 보장받는 ‘말할 권리’를 침해한 쪽은 보도국 간부들이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기자협회장이 ‘부당한 압박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이하 새 노조) 전 공정방송추진위원회 간사, 기자협회 공정방송국장이 ‘자사 방송 감시’라는 자신의 업무를 했다는 이유로 각각 감봉 6개월, 견책의 징계를 내린 것도 한 사례다. 이때에도 사내 게시판에는 기자협회를 비판하는 익명글이 올라왔다. 사측의 인사에 성명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를 “어설픈 정치조직의 수장이 되려는 ‘꾼’들의 짓”이라고 깎아내리면서 “기자협회는 당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내용으로, 정상화 모임의 성명과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111명이나 되는 ‘기자들’이 ‘실명’을 걸고 나섰다는 점이 이전과 다르다. 지난해 기자협회장의 보도 제안을 “편집권 침해”라고 몰아세웠던 보도국 국·부장단 17명(평기자 전보 1명 제외)이 이번 ‘정상화 모임’에도 들어가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병도 기자협회장은 일부 부장들이 직접 평기자들에게 가입 여부를 물었고 지금도 묻고 있는 것은 ‘인사권 등 위계에 의한 강요로 볼 소지가 매우 다분하다’며 중단해 달라고 촉구했다.

일선 기자들은 ‘정상화 모임’은 노조와 기자협회 등 회사에 ‘쓴소리’를 하는 집단을 위축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바라봤다. 한 기자는 “(기자들의) 공정방송 감시활동을 징계한 것은 ‘보도에 참견하면 징계하겠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그런데 이제 기자협회를 ‘정상화’하라는 건, 협회는 친목도모나 해라 이런 의미”라고 꼬집었다. 그는 “실무자 대표로서의 기자협회장 권한을 무시해 비판의 지점도 틀렸고, 국장, 부장, 팀장 등 공식적인 직함이 있는 이들이 그 ‘체계’를 이용해 서명 참여를 강제했다는 정황이 있기 때문에 절차적으로도 문제”라며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활성화 입법 촉구 서명에 동참하니까 그걸 보고 각 부처와 대기업에서 서명에 동참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라고 반문했다.

다른 기자는 “(정상화 모임 성명을 보고) 저게 뭐지? 하면서도 뜻밖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공정방송을 강조하는 기자협회를 맘에 안 들어 하는 쪽은 늘 있었지만, 이렇게 실명으로 ‘조직적’으로 행동할지는 몰랐다는 것”이라며 “실명으로 성명을 낸 것은 고대영 사장 임기가 많이 남았고 (임기 내에) 노조와 기자협회 활동, 영향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결국 ‘사장 옹위’ 조직이 알아서 커밍아웃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 편에 서면 확실한 보상을 하고 그게 아닐 경우 철저히 배제하겠다는 흐름은 최근 평기자 인사에서도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MBC라는 ‘모범 사례를 KBS 간부들도 보고 따르려 하는 것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기자는 “총선 앞두고 보도에 대한 비판과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부 구성원으로부터의) 어떤 통제와 감시도 받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인다”며 “기자협회를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시도”라고 바라봤다.

기자들도 체감하듯, 최근 KBS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움직임은 MBC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모니터 보고서 내용을 인정하지 않고, 내부 구성원들의 기탄없는 비평이 가능하도록 ‘익명’의 자유를 주는 것에 대해 누구인지를 ‘색출’하려는 모습은 MBC와 꼭 닮았다. 지난해 사측은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이하 MBC본부) 민주방송실천위원회 보고서를 ‘왜곡조작위원회’가 ‘밀실’에서 만든 결과물이라고 폄하했다. 언론노조 산하 소속 노조를 “민주노총 2중대”, “정치적으로 편향된 조직”이라고 힐난하고 ‘외부 특정 매체와 결탁했다’고 호도하는 것 역시 MBC가 먼저 했던 일이다.

민주적 공론장을 형성하고 공정한 보도를 하는 데 힘써야 할 KBS 보도국 간부들은, ‘기자협회 정상화’라는 허울 아래 자사 보도를 비판하는 이들을 옥죄고 있다. 정작 ‘정상화’가 가장 시급한 것은 KBS뉴스라는 반론이 제기된다. 보도국 간부들은 십중팔구 정부(청와대)와 여당과 ‘일치’하는 보도가 나가는 것에는 공개 비판은커녕 어떤 문제의식 없이 방관하고, “정치적이고 편향적이다”라는 프레임을 씌워 기자협회를 공격하기에만 바쁘다는 것이다.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묶어버리려는 보도국 간부들이 정치적인지, 최소한 지금 보도에서 더 망가지지 않기 위해 감시 활동을 자처하는 기자들이 정치적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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