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간신히 1승을 따냈다. 소셜미디어는 축제 분위기다. 어찌됐든 인간이 기계에게 무조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게 드러난 덕이다. 이 ‘세기의 대국’ 덕분에 우리는 인공지능에 대한 수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유익하고도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 와중에도 복잡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건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의 숙명이다.

이렇게 됐으니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3번이나 이겼을 때 사람들은 슬퍼했다. 이 슬픔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기계가 인간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게 완전히 증명됐으니 이제 무엇을 팔아 먹고 사느냐는, 한탄에 가까운 것이다. 만일 이러한 염려가 근거가 있는 것이라면 21세기 판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테다.

물론 지금도 수많은 기계들이 인간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특별히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금까지 절대로 기계가 대신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겨졌던 영역을 알파고가 정복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슬픔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획득하게 된 기계가 자신이 목표로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한 가장 큰 방해는 인간이라는 걸 깨닫고 폭주한다는 식의 SF적 상상력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알파고의 승리를 이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세돌 9단이 13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제4국에서 180수 만에 알파고에 불계승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활짝 웃고 있다. (연합뉴스)

여기서 대학 시절 배운 ‘심리철학’의 수업 내용을 떠올렸다. 심리철학은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는 분야의 학문이다. 이원론, 최소물리주의, 중국어방 논변, 다수실현논변 등의 개념이 주요 소재다. 당시의 교재는 폴 처칠랜드가 쓴 <물질과 의식>이라는 제목의 개설서였다. 폴 처칠랜드는 이른바 제거적 유물론자로 분류된다. 제거론자의 책을 읽었다고 해서 반드시 제거론자가 되라는 법은 없겠으나, 그 주장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게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심리철학에서 인공지능의 문제는 먼저 지능이란 무엇인지를 판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 지능과 기계 지능의 구조가 본질적으로 다를 수 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약한-인공지능’의 일반적 모델로 제시되는 튜링머신의 경우 내적 구조에 차이가 있더라도 겉보기에 인간으로 충분히 여길만하다면 지능을 갖춘 존재로 판단해야 한다는 걸 전제한다. 튜링테스트는 튜링머신이 재현하는 지능이 인간의 그것과 차이가 없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알파고는 일단 바둑프로그램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런 기준으로 분류하자면 튜링머신을 목표로 하는 인공지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서 튜링테스트는 영원히 완결되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의 튜링머신은 매순간 지능을 발휘할 때마다 또 다른 튜링테스트를 거치는 입장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반복되는 테스트 속에서 어느 한 순간이라도 인간인지 여부를 의심받게 된다면 튜링머신으로서는 실격이다. 알파고의 경우 우리는 그것의 인간다움에 감탄하고 있지만, 그것이 기계이기 때문에 하는 특징적 행동을 여전히 판별할 수 있다. 이세돌 9단과의 4국에서 이런 점은 특히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최종심급의 고독한 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으로 우리가 새삼 깨닫게 된 인공지능의 또 다른 난점은 그의 판단에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일본 NHK 기자가 던진 날카로운 질문을 뒤집어 보면 명료하게 드러난다. 알파고의 개발자들은 인공지능을 헬스케어 등에 활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세돌 9단의 활약으로 알파고의 인공지능이 완전하지 않다는 점이 드러났다. 바둑은 승부를 겨루는 게임이기 때문에 알파고가 패배를 하는 걸로 상황을 종결지을 수 있지만, 생명을 다루는 문제였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실패한 것이 인간이라면 우리는 그에게 여러 방식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공지능의 문제라면 우리는 결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여러 의문과 싸워야만 한다.

그야말로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인간으로서의 인공지능은 ‘강한-인공지능’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성립하기 위한 여러 조건이 있겠으나 결정적인 것은 ‘감각질(qualia)’에 대한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하느냐의 문제이다. 감각질이란 쉽게 말해 보고 듣고 느끼는 어떤 주관적으로 구성된 특징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빨간색을 보고 RGB 중 R이 255의 수치에 해당하는 색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아닌, 그저 ‘빨강’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느낌이다. 이는 결국 인간의 의식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낸 것인지를 판단할 근거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철학적인 여러 논변이 오간 바 있는데, 어쨌든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는 이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에 전문가들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학자들의 의견은 갈린다. 어찌됐건 감각질을 둘러싼 경험의 재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가장 극단적 입장을 취하는 제거론적 유물론자들의 경우는 “감각질이란 없다”고 까지 주장한다. 모든 주관이란 결국 그저 뇌의 현재 상태에 의한 어떤 표출에 불과하다는 거다. 이런 극단적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감각질에 대한 경험의 재현, 즉 인간 의식의 창조는 ‘뇌’라는 물리적 존재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에 달린 걸로 볼 수 있다. 여기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로 인간 의식을 창조하고자 하는 사람은 뇌의 물리적 구조와 기계적 원리를 모두 완벽하게 파악해야만 한다. 둘째, 이렇게 파악된 구조와 원리는 현실의 과학기술 수준에서 재현 가능해야 한다.

굳이 선택하라고 한다면, 언젠가는 인간이 인간을 만드는 날이 결국은 오고야 말리라고 믿는 쪽이다. 그러나 그건 아주 먼 미래일 것이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 인간임을 의심받는 인공지능은 그저 인류의 도구에 불과할 것이다. 이 불완전한 인류의 도구를 검증하고 대체하기 위해 자본은 인공지능으로 메꾼 것만큼 아니겠지만, 어쨌든 또 다른 형태의 노동력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 풀 문제는 수수께끼처럼 계속 유형을 달리해나가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맞서야 할 또 다른 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기념비적 대국을 둘러싼 논란에서 우리는 오히려 희망을 볼 수 있다. 고작(?) 바둑 게임에서 인공지능의 승리를 놓고 우리는 벌써 파국을 경계하고 윤리와 통제를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인류는 인공지능에게 결코 핵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를 권한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적어도 지금 이세돌 9단은 파국으로부터 인류를 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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