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온라인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영화는 무엇일까. 쟁쟁한 영화들이 많이 있지만, 조정래 감독의 <귀향>(제작 제이오엔터테인먼트, 배급 와우픽쳐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이 영화의 파급력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미 2014년 <귀향>처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영화인 추상록 연출의 <소리굽쇠>가 46개 스크린에서 개봉해 단 3,060명의 관객을 모은 흥행 실패 사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감독이 추상미의 친오빠이며, <귀향>과 똑같이 온라인 펀딩으로 제작비를 모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화제가 되지 못했다.

어찌 보면 <귀향>이 화제에 오른 것에는 역설적으로 박근혜 정부의 공이 매우 컸다. 2015년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밀어붙이며 친일, 독재 미화 논란을 야기한 것은 물론 결정적으로 그해 말 12월 28일 위안부 문제를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타결시키면서 한동안 수면 아래 가라 앉아있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기에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로 인한 논쟁도 위안부 문제가 관심사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터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고 그러한 차원에서 <귀향>이 제작된 의도는 분명 좋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작 의도에 시민들도 힘을 보탰다. <귀향>을 제작한 제이오엔터테인먼트는 다음 스토리 펀딩과 다음 희망해, 유캔펀딩, 그리고 ARS와 계좌 후원을 통해 총 75,270명에게 12억을 모금 받았다. <한겨레21>과 같은 언론 역시 힘을 더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강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26년>이 7억 5천만, 진구-이현우-김무열 등 유명 배우가 등장했고 제2연평해전을 소재로 한 <연평해전>이 20억을 모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렇다 할 유명세가 없던 작품에게 사람들이 일종의 기적을 선사한 셈이다. 그렇게 순제작비의 절반 이상을 모금 받은 <귀향>은 감독이 처음 작품을 구상한 지 12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과연 <귀향>은 좋은 제작의도와 오랜 제작기간만큼 잘 숙성된 영화가 되었을까.

<귀향>의 좋은 의도, 작품으로 이어지지 못하다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지난 2월 4일 필자는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귀향>의 언론시사회에서 좋은 작품을 만났다는 기쁨 대신 깊은 아쉬움을 느껴야만 했다. 마치 2014년 10월, 한창 논란이 되었던 <다이빙벨>을 어렵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상하고 들었던 느낌과 비슷한 기운이었다. (▷ 관련 칼럼 보기) 영화는 분명 어떻게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도저히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영화를 아쉽게 만들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영화의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두 가지 시간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주인공이 강제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겪으며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1940년대 후반의 상황이며, 다른 하나는 오랜 세월이 흐르고 처음으로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었던 1991년의 한국이다. 영화는 이 두 시간축을 계속 교차하며 과거 위안부로 끌려간 이들의 고통을 묘사하고, 동시에 극중의 무속 의식을 통해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을 나름대로 달래려 한다.

제목의 ‘귀향’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歸鄕’(돌아갈 귀, 마을 향)이 아니라 ‘鬼鄕’(귀신 귀, 마을 향)을 의도하고 작명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영화의 영문 제목 역시 ‘鬼鄕’을 직역한 <Spirits’ Homecoming>이다.) 영화가 나름대로 한국의 전통 문화인 무속 의식을 통하여 위안부로 생을 마친 사람들의 혼백을 위로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 작품으로 처음 영화계에 데뷔한 강하나, 최리 등 신인 배우들의 연기는 결코 쉽지 않은 시퀀스를 나름대로 잘 소화하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문제는 그들의 고통을 드러내는 장면이 자극적인 연출에서 머무르고 만다는 점이다. 단순히 공장으로 가는 줄 알았던 이들이 자신들의 처지가 공장 노동자가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 이후, 영화는 끊임없는 폭력의 연속만을 보여준다. 강제로 소녀가 강간을 당하는 장면을 클로즈업해 자세히 보여주며, 이 외에도 온갖 성적인 폭력이 벌어지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심지어는 신기를 얻어 과거를 보게 된 소녀 ‘은경’(최리 역)의 설정도 강도에 의해 아버지가 죽고 자기 역시 성적 폭력을 당했음을 암시하는 과거를 지니고 있다. 이런 모습들이 영화 내내 직접적으로 계속 묘사되고, 결국 이러한 장면들은 영화의 의도를 떠오르게 만들기 이전에 불편함만 낳는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러한 연출이 도리어 필요함을 강조할지도 모른다. 일본군이 정말로 잔악한 행동을 했으니 그 포악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실제로 조정래 감독은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시사회에서 “어떤 배우는 왜 더 직접적으로 성폭력 장면을 묘사하지 않느냐며 의문을 제기했다”는 말을 하는 등 자신이 최대한 수위를 조절하려 했다고 발언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발언자가 위안부 문제를 어떤 문제로 사고하고 있는지를 반추하게 만드는 질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위안부 문제를 분명 잘못된 과거라 생각하지만,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순간 문제의 결은 많이 달라진다. 마치 몇몇 이들이 아동 성폭행 문제를 다룰 때 ‘순결한 소녀가 무참히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듯, 어떤 이들은 그런 ‘잔악한 일본군’이 저지른 ‘순결의 파괴’라는 초점으로 문제를 파악한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일본군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 역시 단순히 소녀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의 피해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사안은 ‘(제국주의적) 전쟁이 낳는 인간성 자체에 대한 폭력’으로도 바라보고 고민해야 하는 문제기도 하다.

허나 작품은 관객들의 분노를 사게 할 장면을 끊임없이 반복할 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위안부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린 소녀들로 등장하며, 작품에 출연하는 일본군들 역시 매우 단순한 악역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일본군이 인간성을 잃게 된 원인을 일말이라도 다루지 않은 채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군은 천성부터 나쁜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그려질 뿐이다. 작중의 위안부들 역시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며,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시대 고증에 맞지 않게 뜬금없이 ‘항일독립군’이 나오며 마무리된다. 그렇게 분노를 키우는 동안 영화는 그저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피상적인 시선에서만 바라보고 만다.

이는 어떤 의미에선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변영주 감독의 3부작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1995, 1996, 1999)의 시선보다도 후퇴한 것이다. <낮은 목소리> 시리즈는 위안부였던 여성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충격적인 과거를 되짚는 동시에 해방 이후 여성들의 삶을 통하여 여성주의적인 시선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았다. 위안부로 끌려갔던 여성은 먼 타지에서도 폭력을 당하는 것은 물론 고향으로 간신히 돌아오고 나서도 ‘순결을 더렵혔다’는 친지와 이웃들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영화는 이런 이후의 모습들을 살펴가며 단순히 위안부 문제를 ‘여성이 강간당했다’나 ‘일본군의 잔악한 만행’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당시 고통을 겪은 여성의 문제로써 바라볼 것을 시사했었다. 그러나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제작된 <귀향>에는 이러한 문제의식은 탈색되어 있다. 오로지 남은 것은 폭력을 매우 자극적이고 끔찍하게 묘사하는 ‘익스플로이테이션’(exploitation)적 감각과 이를 통해 다시 관객들을 증오를 자극시키는 방아쇠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스스로 자극제의 길을 택했다. 포스터에도 나와 있는 ‘무엇이 소녀들을 지옥으로 보냈나’에 대한 대답은 영화에선 절대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애초에 그런 게 중요한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회고발 영화는 정말 사회고발을 하고 있는가

이미 <귀향>은 여러 차례 후원자 대상 시사회를 실시했고, 그 덕분에 조금만 수고를 들이면 이 영화에 진중히 문제를 제기하는 리뷰도 여럿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들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벌써부터 하나의 붐처럼 퍼지고 있다. 2월 23일 영화진흥위원회의 집계 기준으로 <귀향>은 <주토피아>나 <데드풀>의 예매율을 뛰어 넘었다. <귀향>을 다루는 대부분의 언론 역시 작품이 실제 어떠한가를 주목하는 대신 작품의 ‘의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상황들로 봤을 때 영화는 제작비를 회수하거나 그 이상의 흥행을 거둘 가능성이 높다.

<다이빙벨>, <연평해전>, <내부자들>은 사회고발적 성격을 강조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영화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지를 살피지 않았다. 이 영화들로 분출된 분노와 시선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졌는가.

생각해보면 이러한 경향은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다이빙벨>이나 <내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 문제를 고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 태반이 같은 행보를 걸었다. <다이빙벨>이 이렇다 할 인과 관계를 갖추고 있지 않음에도 세월호 사건에 대한 분노와 부산국제영화제와 얽힌 문제들로 인해 5만여 명의 시민들이 관람했고, <내부자들>은 원작의 차분함 대신 오히려 원작에는 자세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성적, 폭력적인 요소 등을 강조하면서 관객들의 마음을 자극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써는 당분간 깨기 힘들 900만 명의 관객이 관람하는 기록적인 흥행을 거뒀다. (<내부자들 : 디 오리지널>까지 합산한 기록) 이외에도 <26년>이나 <연평해전> 같은 영화들도 무수한 관객들이 관람하면서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사회를 고발하는 목적만 있다면, 영화가 어떤 문제가 있든 큰 상관은 없는 것이다.

분명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환기는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사회고발적인 성격을 지닌 작품이 나오는 것 자체는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작품을 바라보는 자세다. <26년>이나 <다이빙벨> 때 그랬던 것처럼 작품 자체에 대한 지적에 대다수의 관객과 평론가들은 ‘작품에 담긴 의도를 무시하는 것’이라면서 날선 반응을 보였다. 이들에게 사회고발을 다루는 작품은 무척이나 성스럽고 소중한 작품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사회고발 영화 대부분은 결국 하나의 ‘상품’으로써 제작되는 영화이다.

아무리 ‘상품’에 좋은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어도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무렇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치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에 대한 지적에 날서게 반응하고, 현 정부에서 박정희나 박근혜에 대한 지적을 불경스럽게 바라보는 이들처럼 몇몇 관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작품에 대해서 무척이나 열광적으로 반응한다. 그러한 태도는 과연 그들이 바라는 대로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이러한 태도들은 제작사들로 하여금 영화의 질에 상관없이 그저 ‘사회 비판’이라는 목적만 내세우는 작품을 더욱 양산하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 그리고 관객들이 더 크게 분노할 수 있도록 최대한 자극적인 장면을 만드는 데 집중하게 될 것이다. 여전히 많은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크게 분노하며 이러한 영화들에 지지를 보내고 잠시 시선을 기울이겠지만, 과연 이렇게 만들어진 시선들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물론 그 자극적인 장면들에 대한 문제는 ‘의도’를 좋다는 이유로 그냥 넘어갈 것이다.) 그렇게 탄생될 흐름이 지속적인 운동이나 활동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여기에 최근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이나 이재명 성남시장은 SNS로 영화에 대한 지지를 보내며 지자체 산하의 강당 등 자신들이 제공할 수 있는 상영시설을 지원해주겠다고 한 상황이다. 분명 공공시설을 통한 독립/예술영화 상영은 필요하지만, 이를 위한 충분한 준비 단계 없이 그저 몇몇 팬들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화답하는 이러한 모습은 ‘관제 흥행’이라는 우려만을 더욱 늘릴 따름이다. 그렇게 <귀향> 같은 사회고발물은 계속 세를 키우고 있다. 정작 그 영화가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실종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좋은 의도’만 바라볼 테니 아무래도 한동안 그 성장세는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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