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선진화법에 의한 무제한 토론, 이른바 필리버스터가 드디어 발동됐다. 일부 서구의 의회에서나 볼 수 있던 이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전술이 우리나라 국회에 다시 등장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당시 새누리당 지도부의 역사적 결단 때문이다. 보수언론은 일제히 야당의 필리버스터 전술을 비난하고 있으나 이게 아니었다면 몸싸움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과거 국회 부의장으로 이명박 정권이 원하는 법을 직권상정해 처리하는데 앞장섰던 정의화 국회의장은 이 사실을 특히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야당에서 이 전술을 논의할 때 격론이 벌어졌다는 후문이다. 선거 직전에 괜한 역풍을 불러일으키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있었을 거고 모처럼 칼을 빼 휘두르더라도 결국 멋쩍게 칼집에 다시 꽃아 넣어야 할 민망함을 당해야 한다는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제1야당이 나름의 결기를 보여주려 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일이다.

의회 전술로써 필리버스터가 합리적인 종류의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숙의와 토론이 아니라 의원 개인들의 체력과 담력에 의지해 법안 통과를 물리적으로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거수로 결론을 내는 다수결이 숙의를 방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필리버스터와 같은 수단을 소수파에게 쥐어주는 것도 민주주의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23일 오후 국회에서 테러방지관련 법안 처리를 위해 개회한 제340회 임시국회 제7차 본회의에서 무제한 토론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찌됐건 중요한 건 필리버스터가 겉보기에는 의회를 마비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쓰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로 드라마 <웨스트윙>의 한 장면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당이 합의해 추진한 가족복지법안의 통과를 78세 고령인 스택하우스 의원이 가로막는다. 그는 은퇴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한 어떤 정치적 이득도 얻을 수 없다. 백악관 주요 인사들은 처음에 ‘노인네의 오기’이겠거니 하지만 의사진행방해가 열 시간 이상 이어지자 스택하우스 의원에게 자폐증에 걸린 손자가 있고, 이와 관련한 예산의 삭감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죽을 각오를 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택하우스 의원이 자신의 개인적 원을 위해 의회를 악용했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겠으나 이 행위로 백악관이 양당과 다시 협의에 나서 공익을 강화할 수 있게 됐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이 사례는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어떤 ‘환상’에 불과한 것이겠으나, 현실에서 상상하기 불가능한 종류의 것도 아니다.

제1야당이 필리버스터로 국회를 마비시키고 있다면, 그걸 일제히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청와대와 여당이 다시 협의에 나서야 한다. 테러방지법이 국가정보원에 과도한 권한을 집중하는 것이라는 야권의 지적에 대한 정부 여당의 답변은 인권보호를 위한 충분한 제동장치가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의 제동장치가 그저 허울뿐인 핑계에 그치는 상황을 우리는 수차례나 경험하였다. 심지어 아예 인권을 전담하는 기구조차 무력화시키는 게 현실이다. 특히 국정원과 관련한 이슈에 대해 박근혜 정권은 그동안 계속 뭉개기로 일관해왔다.

2012년 대선 개입 논란에서 실제로 국정원 직원들이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여론몰이를 했다는 건 이미 사실로 밝혀진 바다. 이것에 대한 법원의 판결과는 관계없이 국정원 개혁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됐다. 국정원 개혁 논의가 정치권에서 뜨거운 감자로 다뤄졌으나 실제로 무엇이 얼마나 개혁됐는지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박근혜 정권은 정보기관이 국내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걸로 알려진 이병호 국정원장을 새로 임명하면서 국정원 개혁의 적임자라고 추켜세웠으나, 이후에 국정원 개혁이 얼마나 진행됐는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이병호 국정원장 조차 국정원을 완벽히 장악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청와대는 설 연휴를 앞둔 지난 5일 국정원 1, 2차장 인사를 발표했다. 3차장 인사는 9일에야 발표됐다. 북한이 연이은 도발을 강행하는 상황에서 정보기관의 수뇌를 갈아치우는 행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어떤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특히 최윤수 신임 2차장이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과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은 더 많은 정치적 해석을 낳았다. 청와대가 국내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폭을 넓히기 위해 정실인사를 강행한 것 아니냐는 거다. 주간동아의 2016년 2월호 기사는 이러한 정황을 인사개입을 거부하는 이병호 국정원장과 청와대 간의 ‘타협’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이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7일 오후 국회에서 긴급 소집된 정보위원회 현안보고를 위해 회의실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상황이 이렇게 뻔한데 제1야당이 테러방지법에 담긴 어떤 진심(?)을 알아줄리 만무하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서 후폭풍을 걱정하는 발언이 속출하자 이종걸 원내대표는 “이건 국정원의 청부입법”이라며 강하게 발언했다고 한다. 테러방지법이 실제로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게 아니라 대선 개입 논란부터 해킹 프로그램 구입까지 만신창이가 된 국정원의 지위와 권한을 다시 되찾기 위한 것에 가깝다는 인식이다. 지금까지의 맥락을 보면 그렇게 반응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대하는 박근혜 정권의 바람직한 태도는 그래서 야당의 이런 걱정을 불식시킬만한 획기적인 안을 내놓는 것이어야 한다. 인권침해를 최대한 방지하겠다는 립서비스가 아니라 국정원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생산적 교감이 오갈 수 있어야 한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테러방지법 처리를 막는 야당이나 강행하는 여당이나 똑같다는 말도 나오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의 정치적 상황을 잘못 짚은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필리버스터 전술은 명분을 갖고 있다. 현재의 법령으로도 테러 방지를 하지 못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있는 조직마저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판국이다. 앞에서 다룬 국정원 관련 문제에서 볼 수 있듯 의도가 뻔해 보이는 점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이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체력을 축내며 몸을 던지는 것은 대중에 만연한 정치적 냉소주의를 돌파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물론 현실을 돌아볼 때 어떤 식으로든 테러방지법은 박근혜 정권의 입맛대로 통과 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러나 명분 있는 정치적 행위는 끝내 야당의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정치세력이 꾸준히 그런 자산을 쌓아가야 제대로 된 노선을 만들 수 있고, 국민들에게도 노선을 중심으로 한 심판을 요구할 수 있다. 정치 일반에 대한 무차별적 냉소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필리버스터 정국은 제1야당이 무엇을 하겠다는 당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정치세력으로 거듭나는데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해야 한다. 제1야당의 리더십이 과연 이를 현실로 만들 수 있는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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