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악의 크리스마스 선물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차가운 겨울 한복판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훈훈함. 크리스마스, 그것도 본판보다 흥미로운 크리스마스 이브에 국방부로부터 선물 하나를 받았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믿지는 않지만, 그 분 하신 말씀들이 구구절절 옳다고 느끼고 있어서 그 분 말씀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바, 예수님 생신에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려면 그 뜻에 맞는 선물을 주고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라고 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시던 예수님 말씀과는 정반대의 선물이 국방부로부터 도착했다. “대체복무제도 전면백지화.” 뭐 사방군데서 막나가는 시대인지라 이 정도 가지고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 해피한 크리스마스에 이렇게 해피하지 않은 선물을 받는 일은 너무나 불쾌할 따름이다.

일제고사니, 현대사교과서 수정이니 워낙 뒤로 가는 정부에서도 원래부터 가장 뒤쪽에 있던 곳이 국방부인지라 이런 상황이 새삼 새로울 것도 없다. 불온도서 목록 선정에서부터 자신들의 사고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발짝 물러나 있던 국방부가 이렇게 자신있게 자신이 한 약속조차 어기려는 속셈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은 아마도 ‘68%가 대체복무에 반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국민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대체복무제도의 시행여부를 판단하겠다”는 핑계로 대체복무 도입을 차일피일 미뤄왔던 국방부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 12월 24일자 헤럴드경제 10면.
여론조사의 허구성

이번 여론조사는 병무청이 대전대학교 ‘진석용정책연구소’에 의뢰한 연구용역 사업의 일환이었다. ‘국민여론조사’, ‘공청회’, ‘사회복지시설 실태조사’, ‘제도일반’의 분야로 나누어 이루어진 연구 중에서 현재 국민여론조사의 결과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여론조사는 ‘리서치앤리서치’라는 여론조사 전문기관에서 지난 11월 17일에서 21일 사이 전국의 성인남녀 2000명에게 전화조사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대체복무 반대가 68.1%로, 찬성 28.9%를 거뜬히 앞질렀지만, 이와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주는 설문조사의 결과도 많이 있다. 예컨대 마찬가지로 병무청 용역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지난 10월 국회공청회에서 발표된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국회의원, 종교인, 법률가, 교수 등 전문가 의식조사에서 80%가 넘는 사람들이 대체복무를 찬성하였다. 물론 이는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가 아니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결과는 어떠한가. 2008년 9월에 실시된 리얼미터와 961sample의 여론조사에서는 대체복무 찬성이 반대를 앞서기도 했었다(리얼미터:찬성 44.3%/반대38.7%, 961sample:찬성 55.9%/반대38.9%, 출처 문희상 의원실 보도자료).

같은 사안을 가지고 이렇게 커다란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여론조사가 가지는 한계에 기인한다. 여론조사는 아무리 표본을 넓게 잡아서 진행을 하더라도 사람들의 인식의 한 단면만을 측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예를 들면 연예인들의 병역비리로 나라가 떠들썩할 때 설문조사를 하면 대체복무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많이 나오고 반대로 국방부가 한참 삽질하면서 욕먹고 있을 때는 대체복무에 대한 찬성 의견이 많이 나오기 마련이다. 또 하나의 함정은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질문이 군대가는 것과 대체복무를 선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져 있다면 사람들은 군대보다 쉬울 거라고 생각되는 대체복무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반면 병역거부자들이 감옥가는 것을 부각시켜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지 감옥에 보내야 하는지를 물으면 감옥보다는 대체복무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이번 병무청 용역으로 진행된 여론조사와 2005년 임종인 의원(당시 열린우리당)실에서 진행된 설문조사 결과의 비교이다. 지금보다 병역거부에 대한 전반적인 여론이 안 좋았던 3년 전 임에 불구하고 58.9% 대 25.9%로 찬성의 비율이 높았다.

이번 병무청 용역으로 이루어진 설문조사는 이미 질문에 대체복무에 대한 부정적인 답변이 담겨 있는 것이다. 병역거부 문제처럼 이렇게 결과가 뒤바뀌는 사례에서는 설문조사를 통한 여론이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받기 힘들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사안이 사회적으로 첨예한 대립 상태에 놓여 있구나 하는 정도일 뿐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직까지 사회에 일반적인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대체복무에 대한 찬성이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는 경향성 정도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문제가 처음으로 이슈가 되었던 2000년대 초반에는 질문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대체복무 반대의 의견이 높았지만 해를 거듭해 갈수록 찬성의 퍼센트가 높아져 이제는 질문에 따라서는 반대를 압도하는 경우도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수자 인권를 여론조사로?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중요한 여러 가지 사안들을 결정하는 데 여론조사의 힘에 크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서로에 대한 신뢰에 기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거부할 수 없는 객관화된 숫자로서 여론조사의 방식을 선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살폈듯이 이것은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특히 소수자의 인권문제에 있어서 여론조사에 의존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소수자는 사회의 보편적인 잣대와는 다른 생각이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을 반대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해도 게이나 레즈비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대체복무제도에 반대해도 병역거부자는 계속 나타날 것이다. 소수자 문제의 해결은 보편성을 획득한 다수의 의견에 소수를 끼워맞추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것이다. 보편성의 잣대로만 소수자들에 대해 판단하고 보편적인 기준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며 소수자들에게 거대한 폭력일 뿐이다.

국방부, 치졸한 변명은 그만두고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라

국방부의 국민여론 핑계와 여론조사 결과 뒤에서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을 백지화하려는 시도는 참으로 치졸하고 비겁한 행동이다. 물론 국방부는 아직까지는 공식입장을 자제하고 있고 병무청 연구용역 결과만을 발표했을 뿐이지만, 이미 하기로 약속한 제도를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게다가 그 핑계로 댄 것이 국민적인 합의인데, 그렇다면 2007년에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발표할 당시에는 국민적인 합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발표했단 말인가? 국방부의 이 모순적인 변명은 스스로를 궁색하게 만들 뿐이다.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국방부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고만 있는 국방부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 있다. “왜 그래. 아마추어 같이.”

병역거부가 사회 이슈가 된 2001년 이후에만도 4800여명의 젊은이들이 전과자가 되었다. 현재는 450여명이 수감되어 있고(물론 이 숫자만으로도 세계 최고다) 만약 국방부가 대체복무제도를 전면 백지화해 지금까지 국방부의 약속을 믿고 입영을 연기하거나 재판이 연기된 사람들이 한꺼번에 감옥에 들어간다면 병역거부 수감자는 1000명을 훌쩍 넘기게 된다. 국가인권위, 유엔, 하다못해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까지도 한국의 병역거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는 마당에 국제적인 망신살만 늘어나는 것이다. 국방부는 더 이상 비겁하게 국민여론을 핑계삼지 말고, 2007년에 스스로 국민과 약속한 대체복무 제도의 시행에 힘써야 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국방부가 될 것인지, 국민과의 약속조차 헌신짝처럼 버리면서 치졸한 핑계만 일삼는 국방부가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국방부의 판단에 달려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