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개성공단은 사실상 없어졌다. 모든 것은 원점으로 회귀했다. 비록 보수정부지만 이명박 정권의 과오를 넘어 박근혜 정권이 남북관계를 개선할 거라는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비판을 안 할 수 없다. 일부 보수세력은 쾌재를 부른다. 눈엣가시 같던 개성공단을 드디어 없애버렸다. 국제관계에서의 다양한 힘겨루기 양태를 고려해야겠지만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주체적인 선택이 불러온 상황이다. 거칠고 서툰 외교 솜씨를 보여준 거라는 비판이 쏟아진다.

개성공단 폐쇄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원리를 중시하는 관점으로 보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내정치적 측면에서 상당한 역풍이 돌아올 수 있다. 재차 말하지만 이 사태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가 가장 크게 작용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해명(?)이나 해설이 필요한 상황이다. 12일자 중앙일보가 중요해 보이는 건 그래서다.

▲ 중앙일보 12일자 1면 기사

이날 중앙일보 1면에는 묘한 기사가 실렸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고위 당국자와 ‘외교 소식통’들이 등장해서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가 모두 개성공단 폐쇄를 요구하거나 언급했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용된 ‘외교 소식통’은 “외교적으로 다른 나라와 주고받은 얘기를 구체적으로 공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모든 이야기를 미주알 고주알 줄줄 늘어놓고 있다. 이 기사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의 ‘선택’은 미국의 압력을 포함한 상당한 국제정치적 고려에 의해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사에 등장한 이야기들을 잘 뜯어보면 사실상 의미가 없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개성공단을 폐쇄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대북제재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뻔한 이야기다. 그들은 대북제재를 통해 손해를 보는 입장이므로 일종의 핑계를 제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은 자체적인 대북제재를 추진하고 있으므로 개성공단 효과로 자신들의 자체 대북제재 효력이 감소할 가능성을 실제로 우려한 걸로 볼 수 있다.

문제는 미국인데, 이 기사만 보아서는 미국의 ‘개성공단 폐쇄 요구’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오바마 행정부가 ‘전략적 인내’ 방침을 고수하기 위해 핑계를 댄 것에 불과한지, 중국을 압박할 핑계를 달라는 맥락이었던 것인지, 개성공단을 폐쇄하면 ‘세컨더리 보이콧’ 등 실질적인 제재가 가능하도록 정치적 부담을 떠맡기로 약속을 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기사에는 미국 측이 “개성공단을 닫는 대신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했다는 대목도 나오는데, 이런 상식 없는 주장을 한 ‘미국 측’이 누구인지도 의문이다.

어쨌든 미국이 개성공단 폐쇄를 강하게 주장하면서 북한에 대한 적극적 제재에 나서지 않고 있는 중국 압박을 예고했다는 듯한 뉘앙스는 이날 중앙일보 지면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중앙일보는 4면에 미국 상원이 현지시간 10일 통과시킨 대북제재법안이 역대 최강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특히 제재 범위를 북한과 직접 불법 거래를 하거나 이를 도운 개인이나 단체로 넓힐 수 있도록 했다고 보도했다. 이른바 ‘세컨더리 보이콧’을 중국 기업에 적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중앙일보는 5면에 박근혜 대통령이 개성공단 가동 전면 중단을 고민하면서 ‘이란 모델’을 참고했다고도 보도했다. 이란의 핵 포기가 미국과 EU의 양자 제재를 통해 이뤄졌다는 점에 착안해 주변국 제재로 북핵문제를 풀 수 있다는 구상이라는 거다. 이게 작동하려면 중국이 제재에 참여해야 하고, 그렇게 되려면 미국이 중국을 압박할 수 있어야 한다.

▲ 중앙일보 12일자 5면 기사 (붉은색은 주요 부분 강조)

물론 이란과 북한의 사례는 다르다. 중앙일보가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대중의존도가 절대적인 북한에 이란 모델을 적용하기는 어려울뿐더러 북한 당국이 개성공단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던 노동자들을 해외로 돌리면 개성공단 가동 중단 자체가 무력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미국 대북제재안의 핵심인 세컨더리 보이콧이 중국을 겨냥해 작동할 것으로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도 문제다. 세컨더리 보이콧 발동 여부는 행정부에 위임이 돼있는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중국과 직접 대립해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떠맡을 것인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미국 상원의원들의 입장을 보면 여당인 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대북제재안의 의미를 북한 정권에 대한 대응에 한정하고 있는데 반해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중국까지 겨냥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중앙일보는 이날 지면에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의 칼럼도 실었는데 개성공단과 6자회담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북핵 문제 논의 틀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핵심이다. 이는 중국으로부터 일축당한 박근혜 대통령의 ‘5자회담 제안’을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그런데 마이클 그린 선임부소장은 상대적으로 미국 공화당에 가까운 입장을 갖고 있으며 부시 정권의 주요 외교 참모로 활약한 바 있다. 중앙일보가 이 칼럼을 지면에 실은 것은 미국 전문가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구상과 정책을 지지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동시에 그 아이디어의 기원이 미국 내에서도 야당에 집중돼있는 중국 적대론자들의 그것에 가깝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 중앙일보 12일자 지면 칼럼

분위기를 맞추기 위한 중앙일보의 마지막 화룡점정은 전영기 논설위원의 ‘박비어천가’다. <김정은 급소 찌른 박근혜>란 제목의 이 글에는 “박 대통령의 개성공단 폐쇄는 (김정은에게) 벌침처럼 따끔하다. 여러 번 맞으면 (김정은의) 정신이 산란하다. 염증이 (김정은의) 혈관이라도 타고 올라가면 쓰러질 수 있다”는 노골적인 찬양이 등장하는가 하면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들을 불러 국내정치를 단결시켜야 한다는 의도가 뻔해 보이는 주문도 나온다.

물론 이날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을 치장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신문은 중앙일보 뿐만이 아니다. 동아일보는 이날 지면에 박제균 논설위원의 <박근혜, 루비콘 강을 건너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역시 고수다. 정부가 개성공단 가동 중단 카드를 내민 10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든 생각이다. 공단 가동 중단이라는 초강수는 ‘박근혜 정부의 유일한 남자’로 불리는 그밖에 던질 수 없다.” 아부에 여성 비하까지, 어디를 먼저 지적해야 할지 모를 이 글은 거의 전체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그럼에도 특별히 중앙일보를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신문이 그간 북한에 대한 유연한 입장을 내세워왔기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과거 다른 신문들이 ‘북한붕괴론’에 기댄 통일 특집을 준비할 때 5·24 조치의 해제를 선도적으로 제기한 바 있다. 최근에는 북한의 핵 동결과 평화협정을 맞바꾸자는, 보수언론으로서는 과도한 주장까지 지면에 배치했다. 개성공단 관련 이슈에서도 자본주의 시장원리를 신봉하는 신문답게 보수언론 중 가장 유화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정작 결정적 순간이 오자 중앙일보는 평소의 논조를 포기하고 권력을 향한 분칠작전에 돌입했다. 언론의 본령이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에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보이지 말아야 할 모습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차라리 조선일보는 박근혜 정부의 지난 3년 외교안보정책이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하라거나 이제라도 핵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비판’으로써 제기하고 있다. 어쩌면 이게 ‘1등 신문’과 ‘2등 신문’을 가르는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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