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버니 샌더스와 자신의 유사성을 연상할 수 있도록 발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웃었다. 그냥 웃었다는 것은 조소했다는 게 아니다. 정치인이 그런 농담도 하면서 뭉갤 수 있는 거니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안철수 대표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상황을 보면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버니 샌더스는 배울 게 많은 정치인이다. 그건 이미 전의 글에서 논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인들이 버니 샌더스를 언급하고 이를 둘러싼 논쟁을 벌이는 상황을 짚어보기 위해서는 '버니 샌더스 현상'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진보정치의 가장 큰 적은 정치적 냉소주의다. 한국 사회는 정치적 냉소주의의 극단을 달리고 있다. 세계 체제를 이끌어가는 미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에 만연한 정치적 냉소주의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의 존재다. 트럼프의 최대 무기는 '솔직함'이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가 위선을 떨지 않고 속물적인 욕망을 대놓고 말하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입장에서 정치란 이념도 아니고 타협도 아니며 합의도 아니다. 이념이니 타협이니 숙의니 하는 단어들이 정치의 진수를 말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런 결론도 내릴 수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사실 말하고 싶은 것은 '정치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거 없다'는 건 냉소주의의 전형적 논법이다. 정치적 냉소주의는 정치인이 명분이나 이상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는 그럴듯한 핑계에 불과하고 뒤로는 사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게 정치적 냉소주의가 내세우는 정치인의 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냉소주의자들은 명분과 이상을 말하는 정치인을 증오한다. 그들이 자신들을 '속인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은 그저 정치인들에게 속아왔다! 이들 입장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정치를 부정할지언정 국민을 속이지는 않는다.

정치적 냉소주의로 인한 정치의 균열은 샌더스와 힐러리 클린턴보다 샌더스와 트럼프 사이에서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 시대에 샌더스가 주목받는 것은 그가 사회주의자여서가 아니다. 사실 그가 지금까지 내놓은 정책적 대안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주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본인도 이 점을 의식한 것인지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톤 다운'된 어휘로 자신의 지향을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 글의 목적은 샌더스가 진정한 사회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게 아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샌더스의 방식이 트럼프식 해법의 정반대편에 서있다는 것이다.

▲ 버니 샌더스 미국 민주당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 (연합뉴스)

버니 샌더스는 현재 미국 대선 레이스에서 정치적 냉소주의를 돌파한 거의 유일한 후보이다. 그가 냉소주의를 돌파할 수 있었던 힘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종류의 보수주의에서 나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의 정치적 기반인 버몬트주는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자유를 찾아 떠나왔던 프로테스탄트들이 초기에 정착했던 6개 주의 하나다. 뉴잉글랜드로 불리는 이들 주의 정치적 전통은 미국의 근본 정신을 이끌어 온데 대해 엘리트적 자부심을 갖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이들의 보수주의는 트럼프로 대표되는 천박한 파괴적 열정과는 다르다.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전통은 자유를 찾아 떠나는 메이플라워이며 링컨의 노예 해방이다. 엄격함이며 검소함이고 품위있음이다. 아직 민주당과 공화당 소속 정치인들을 지금과 같은 형태로 이념에 따라 일렬로 늘어세울 수 없었던 시기 '무소속 버니 샌더스'가 버몬트주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전통에 그의 캐릭터가 잘 들어맞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 이후 우경화된 미국 정치에서 전통적인 뉴잉글랜드 스타일의 정치가는 구닥다리에 불과했다. 합리와 이성에 따른 숙의보다는 상대와의 협상 자체를 죄악으로 여기는 극단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부시 정권의 탄생 이후 이런 현상은 극에 달했는데, 공화당 성향 극단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확대된 결과가 지금의 '티파티'다. 이 과정에서 중도개혁을 내세울 수 있는 공화당 온건파는 사실상 붕괴했다. 오바마 시대에 정권을 방어해야 했던 민주당 내에서도 중도의 숫자가 줄어드는 유사한 현상이 일어났다. 극단주의의 시대는 정치적 냉소주의의 확대와 이에 대한 피로를 동시에 불러왔다.

트럼프와 샌더스는 바로 이 상황의 산물이다. '정치는 없다'고 말하는 트럼프에 맞서는 샌더스 지지자들의 논리는 '진정한 정치는 있다'이다. 이들이 기대하는 '진정한 정치'의 정체는 샌더스가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나 지금껏 민주당 주류 정치가 소화하지 못했던 좌경화된 메시지일 수도 있으나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어떤 종류의 보수주의일 수도 있다. 짚어볼 만한 대목은 또 있다. '진정한 정치'의 전제는 지금의 정치를 진정하지 않은 것, 즉 '거짓'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 정치에 대한 또 다른 냉소를 전제하지 않고 이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의 불행한 점은 대상이 '진정한 정치'에서 벗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정치는 없다'는 반동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에도 있다. 이런 판국의 정치는 '진정한 무엇은 있다'로부터 '그런 건 없다'는 논리 사이의 진자운동으로 반복된다.

물론 '정치는 없다'는 것보다 '진정한 정치는 있다'는 논리의 시도가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리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진정한 정치는 있다'고 말하는 정치인은 유능해야 한다. '진정한 정치는 있다'고 말했으니, 그게 실제로 있다는 게 확인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정치인은 통치를 잘 할 수 있어야 하고 당사자 간의 이해 조정에도 탁월한 순발력을 발휘해야 한다. 만일 그 정치인이 진보적 이념을 갖고 있다면 이 이상의 것도 감당해야 한다. '진정한 정치는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후에 또 하나의 구조로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선 이들의 욕망을 조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샌더스가 '정치혁명'을 말하는 것은 조직적 기반이란 측면에서 열세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서와 같은 측면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인 걸로도 보인다. 샌더스가 경선에서 승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애초의 의도를 어느 정도로 관철시킬 수 있을지 보아야겠으나 적어도 냉소주의의 파고를 거슬러 올라가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 설 연휴가 시작된 6일 오전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가 서울 노원구 상계 중앙시장을 찾아 상인들에게 새해 인사를 한후 상인들이 건넨 전을 맛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제 샌더스를 자처하고 있는 정치인이 포함된 한국의 정치 생태계로 눈을 돌려보자. 정치적 냉소주의는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 자기 정치를 하기 바쁜 국회는 나라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으니 '진실한 사람'을 뽑아달라는 주장을 통해서 말이다. 이런 프레임을 특히 그나마 청교도적 태도를 갖고 있는 유승민 의원에 뒤집어 씌운 것은 도널드 트럼프나 티파티의 사고방식에 비견할만 하다.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 같은 이들이 "헌법 위에 사람(인간관계)이 있다"는 충격적인 발언까지 내놓으며 충성을 과시한 것이나 최경환 의원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진박 마케팅'에 열중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미국의 정치 환경에 완전히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상황은 한국에서도 샌더스 현상과 같은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한국 버전의 샌더스 현상을 이끌 주체는 누구인가. 샌더스를 간접적으로 자처한 안철수 의원은 과거 '새정치'라는 깃발로 정치적 냉소주의의 돌파를 시도한 바 있다. '새정치'란 앞에서 말한 '진정한 정치'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떻게든 '진정한 정치'의 내용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인 샌더스와는 달리 안철수 의원은 늘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아 오면서도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다. 제1야당에 몸을 던져 온갖 사건에 휘말린 이후에는 그나마 갖고 있던 '새정치'라는 깃발 마저도 던져 버렸다. 가치와 노선을 말하기보다는 좌클릭이니 중도니 하며 장이 서는 곳으로 당의 정체성을 옮기는 것에 익숙했던 제1야당의 혼란은 더 이상 지적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다.

진보정당 역시 같은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통합진보당 창당 이후의 진보정당운동은 '진정한 정치는 있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이를 믿지 않는 도착적 태도로 기울어지고 있다. 정치공학과 계파 간 갈등 조정은 물론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지만 여기에만 몰두한 결과 '패배하더라도 우리의 역할이 있다'고 믿는 사명감과 역사의식은 희미해져가고 있다. 이제 진보정치는 시대정신을 파악해 사람들의 욕망을 조직하고 구조화 시키기 보다는 일회적인 홍보전술의 효과를 확인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의 샌더스가 되고 싶다면 정치의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치는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룰에 대한 활동이다. 그 룰을 어떻게 만들고 변화시킬지에 대한 문제가 노선이 되고 이념이 되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대한 청사진이 된다. 정치인은 자신이 가진 신념을 대중에게 심판받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고쳐가면서 그러한 과정 자체가 세상을 바꾸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샌더스 효과에 숟가락을 얹어 잠시나마 화제가 되어 보자는 식의 태도야말로 가장 샌더스답지 않은 일이다. 자꾸 샌더스를 말할 게 아니라 노선과 가치와 명분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냥 "정권교체 할테니 지지해달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잡으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를 말해야 한다. 정치적 냉소주의의 손에 우리의 미래를 맡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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