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며칠 전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KBS TV뉴스를 보던 중이었다. 방송 말미에 앵커의 마무리 멘트가 귀에 거슬렸다. 내용은 대략 이랬다.
“저희 KBS는 경제 어려움을 고려해 임금을 동결하고, 인력도 15% 감축하기로 했습니다.”

국내외적 어려움을 자신들도 함께 하겠다는 선의였을 것이라 믿고 싶다. 하지만 불쾌했다. 온 나라가 비용절감이다 구조조정이다 뭐다는 판에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가시방석이다. 혹시 내 직장까지 여파가 밀어닥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차에, 여론을 만든다는 공중파 방송에서 앞장서 ‘줄이겠다’고 선언한 모양이니.
‘그래서 어쩌라고, 우리도 임금동결하고 인원감축하라는 소린가?’

#장면 둘.
그 즈음 친분이 있던 다른 신문사 선배와 우연히 차를 같이 타게 됐다. 역시 화제는 경기한파였다. 선배는 말했다.

“지금 살고 있는 주택이 좁고 불편해, 몇 년 전부터 아파트로 들어갈까 저울질해왔다. 회사가 늘 불안불안해 타이밍을 못 잡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다. 차라리 그 때 저질러버렸더라면 싶은 생각이 든다.”

선배의 신문사는 이 지역에서 역사도 있고, 타사에 비해 모기업이 튼튼한 편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각종 사건에 경제 어려움까지 겹치자, 구조조정 얘기까지 나오는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대출 끼고 아파트를 들어간대도 문제다. 몇 년 전에도 회사 구조조정할 때 보면, 위아래 따로 없이 마구 잘라버리더라. 만일 아파트 들어간 뒤로 짤리기라도 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질 텐데.”

그의 얘기는 “어쩌면 차라리 무리해서 들어가지 않았던 게,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절망 섞인 푸념으로 끝났다.

#장면 셋.
지역 언론계에선 신문에 비해 방송사는 ‘부자’다. 하지만 이 지역 한 방송사는 올 연말까지 10여명이 정년퇴직하는데, 빈자리를 채울 신규채용은 않는단다. 당연히 남게 되는 사람들의 일은 많아질 터다.

또 다른 방송사에선 이미 최근 명예퇴직으로 몇 명이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들은 적 있는 한 선배 기자 이름도 있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퇴직금으로 목돈이 쥐어진다고 하지만,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인데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이며 큰 애가 고등학생이라는데 남일 같지 않다.

▲ 지난 12일 국회 본관 앞에서 언론노조와 미디어행동·야4당이 한나라당의 미디어 관련법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장면 넷.
요즘 국회는 정부와 여당의 신문·방송 겸영 허용 등 언론법안 처리 방침 때문에 연일 시끌시끌하다. 조선·중앙·동아 등 정권에 우호적인 신문들이 여당과 발을 맞춰, 방송겸영 진출의 문을 열어달라며 난리다.

언론시민사회단체들은 여론 독과점을 우려하며 연대조직을 만들어 반발하고, 전국언론노조는 MBC와 SBS 등이 참여하는 총파업으로 막겠다고 벼른다.

하지만 오늘도 조중동의 지면은 KBS와 MBC의 기존 보도가 편파적이었다며 뭇매를 퍼붓고, “신문·방송 겸영은 이미 세계적 대세인데 정치권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여권 인사의 인터뷰 기사로 채워지고 있다. 특히 동아일보의 22일치 사설 ‘MBC와 KBS, ‘전파는 국민의 것’ 자각부터 하라’는, 마치 “신문도 우리 것, 이젠 방송도 우리 것”이라고 우기는 것 같다.

지금도 여론 독과점 상태인 조중동이 몸집을 더욱 불리겠다고 여권과 손잡고 여의도를 흔들고 있는 판국에, 생존 자체에 불안해하는 지방신문 기자의 현실은 더욱 작아 보인다.

90%를 가지고도 10%를 마저 빼앗아 가지려는 그들의 악다구니를 보면서, 경기도 어렵고 바람도 찬 세밑에 옷깃 한 번 더 추슬러진다.

광주지역 일간신문 광주드림 행정팀 기자입니다. 기자생활 초기엔 지역 언론에 대한 감시자 역할을 주로 했는데, 당시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많이 절감했구요. 몇 년 전부턴 김광석의 노래가사 중 "인정함이 많을수록 새로움은 점점 더 멀어진다"는 말을 새기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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