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래서 그렇게 회의 공개하기를 꺼려했던 거구나!’

4일 오후 2시부터 오후 5시 35분까지 3시간 넘게 진행된 방송문화진흥회(이사장 고영주, 이하 방문진) 회의는 이날도 이렇다 할 소득 없이 끝났다. ‘백종문 본부장 녹취록에 기재된 사실관계에 대한 진상규명 및 향후 방문진 조치에 관한 건’, 즉 지난달 25일 더불어민주당 최민희 의원실이 공개한 ‘MBC 녹취록 파문’에 대해 방문진이 향후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를 정하는 자리였으나 무의미한 입씨름으로 시간을 소모했다.

MBC 녹취록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언론계를 뒤흔들었다. 2012년 김재철 퇴진 및 공정방송 쟁취를 내걸고 진행된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이하 MBC본부) 파업 때 최승호 PD, 박성제 기자가 ‘증거 없이 해고’ 됐다는 당시 인사위원(백종문 현 미래전략본부장)의 폭탄발언이 나온 탓이다. 이밖에도 △보수성향 매체 폴리뷰와 MBC 간부가 만난 자리에서 MBC 프로그램 편성 및 직원들에 대한 소송 전략을 논의한 점 △폴리뷰가 MBC에 정보원 역할을 요청하고 임원회의에 참석한다고 주장하는 특정 간부 스스로 정보원이 되겠다고 자처한 점 △MBC 프로그램과 특정 직군에 대한 편향적 시각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파장이 컸다.

야당 추천 이사들은 대단히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라고 재차 강조하며 녹취록에 등장하는 당사자들에게 경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여당 추천 이사들은 녹취록 내용은 아직 사실로 밝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급 자체를 조심스러워 하고, 녹취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명예훼손’ 여부까지 고려하는 세심함을 보이면서도 이를 보도한 ‘언론’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폄훼 발언을 했다.

“기사는 신빙성이 별로 없다”…“중립된 쪽에서 보도된 것 아냐”

뉴스타파, 한겨레의 첫 보도가 나간 이후 수많은 언론이 MBC 녹취록을 보도했다. 후속보도도 계속됐다. 제보자이자 녹취록에도 등장하는 소훈영 전 폴리뷰 기자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확인하거나, YTN과 KBS 등 타사 언급 부분에 주목하거나, 녹취록과 연관된 다른 문건을 보도한 곳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당 추천 이사들은 보도한 언론과 보도된 내용에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없는 사실을 가지고 쓴 게 아니라 다른 사건과 달리 딕테이션(받아쓰기)을 했다”고 주장하는 야당 추천 유기철 이사의 말에, 여당 추천 이인철 이사는 “믿으시는 분 얘기고, 그건”이라면서 “신문에 보도된 것만 놓고 얘기를 하면…”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 백종문 본부장, 안광한 사장 등 2012년 해고 사태 때 관여했던 당사자들을 불러 사실 관계를 따져보자는 야당 이사들의 주장에도, 이인철 이사는 “불러봤자 (공식해명한 대로) 변명할 텐데 하나마나한 얘기 아닌가”라며 “기사는 별로 신빙성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상황판단을 위해서는 근거 자료가 있어야 된다. 신문 보도를 갖고 설왕설래하면 안 된다”며 ‘녹취록 전문’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미디어스

MBC 녹취록에 이름이 등장하는 여당 추천 김광동 이사는 아예 보도한 매체가 ‘중립적이지 않다’는 딱지를 붙였다. 김광동 이사는 “이 부분(MBC 녹취록)에 대해 현재 보도된 내용도 중립된 쪽(매체)에서 보도가 된 거라고 보진 않는다. 제가 보기에는 여기에도 약간의 편향 내지는 의도를 가진 쪽에서 보도가 됐고 편집된 성격이 있다고 본다”며 “(방문진이) 조치를 하기 위해서는 조치할 만한 상황이나 내용인지, 혹은 (그 내용이) 객관적이냐 중립적이냐 (보도가) 전체를 접근했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저녁 먹으면서 지극히 사적인 자리에서 1년 몇 개월 전에 한 것이고, 비밀리에 녹취된 것이 발표된 것이고, 그 발표도 정치권에서, 특정 국회의원이 발표한 것이고 이것을 보도한 일부 매체들도 제가 보기에는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일부의 편향 가진 매체들이 보도했다”고 강조했다.

여당 추천 권혁철 이사 또한 “앞뒤를 잘라내고 따옴표만 보면 다를 수도 있다. 앞뒤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전문을 봐야 한다”고, 여당 추천 유의선 의사도 “신문에 나온 것만 봐서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유감”이라면서도 “회사의 조직적인 부정행위를 스스로 자백한 건지 개인적인 호기를 부린 건지 파악하려면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고 거들었다.

보다 확실히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녹취록 전문과 녹음파일 등 충분한 자료를 공유하자는 여당이사들의 주장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충분한 판단과 검토 아래 이루어졌을 각 언론사의 보도를 ‘선택과 집중’이 아닌, 부정적 의도 아래 진행된 ‘악의적 발췌’로만 보는 시각은 분명 문제다. 자의적 기준에 따라 보도 매체를 ‘중립적이지 않다’고 매도한 김광동 이사의 발언 역시 부적절하다.

자신들이 관리·감독하는 MBC의 ‘뜨거운 감자’도 모른다는 당당함

더구나 ‘녹취록 전문을 보자’는 주장 자체가 한참 ‘뒷북’이다. 이미 지난달 25일 언론에 대대적으로 공개됐던 사안을 열흘 가까이 지난 4일에서야 논의하는 자리에서, 여당이사들은 전체 내용을 봐야 파악이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녹취록 내용을 잘 모른다’고 당당하게 밝힌 이사도 있었다. 여당 추천 김원배 이사는 “사실 저는 내용을 잘 모르고 있다. 언론에서 다 보도됐다고 하는데 접하지 못했다. 내용 자체가 공식 석상에서 하는 건지 사석에서 나눈 이야기인지도 잘 모른다. 그리고 이게 공식 석상에서 이야기 같으면 괜찮겠지만 사석에서 식사하며 농담 삼아 한 걸 가지고 (문제라고) 하면 그 자체가 문제지 않겠나. 녹취록 내용을 전혀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라며 “구체적 내용은 다음 번 이사회 때 하는 게 어떤가”라고 제안했다.

방송문화진흥회법은 방문진의 목적을 ‘방송문화진흥회를 설립하여 방송문화진흥회가 최다출자자인 방송사업자의 공적 책임을 실현하고, 민주적이며 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의 진흥과 공공복지 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방문진 홈페이지 고영주 이사장의 인사말에도 “MBC의 관리감독기구이자 대주주로서 국민의 재산인 MBC가 신뢰받는 방송이 될 수 있도록 관리·감독”한다는 방문진의 역할이 잘 나타나 있다.

방문진은 ‘MBC를 잘 관리·감독하라’는 책무 때문에 월 2회 회의를 열어 MBC 현안과 방송계 동향을 보고 받고, MBC와 관련된 각종 결정을 하는 것이다. 본인의 직업과 ‘겸직’ 가능한 비상임(이사장은 상임)이라는 위치임에도, 대외직무 활동비와 조사연구수당, 회의참석 수당 등 연 4000만원 이상의 보수를 받는 것(관련기사 링크)도 역시 같은 이유다.

그런데 회의 개최 8일 전인 지난달 26일 올라온 안건 내용이 뭔지도 몰랐다고 말하는 태도는 무엇을 의미할까. 본인이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실토하는 것과 다름없다. 각 분야 전문성을 고려해 추천됐다는 거창한 수식과는 맞지 않는 함량 미달의 자세다. MBC 문제에는 관심 없고 그저 용돈 벌이나 하러 온 것 아니냐는 반격이 나오면 무어라 방어할 것인가.

여당이사들은 이전부터 종종 방문진 회의 관련 언론 보도에 노이로제에 가까운 반응을 표해 왔다. 회의라는 공식석상에서 직접 한 말을 가지고 쓴 기사를 두고도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정파적 왜곡보도’라고 힐난하고, 여러 매체들을 싸잡아 ‘중립적이지 않은 언론’이라고 단정하는가 하면 자신들의 발언이 ‘기록되는 것’ 자체도 유난스레 불편해 했다. 공영방송 중 유일하게 속기록을 작성하지 않는 것도, 간단하게 정리한 회의록에도 발언한 이사 이름을 표기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까. 자신이나 자신을 옹호하는 세력의 유·불리에 따라 좌우되는 ‘불평’을, 언론의 중립성과 공정성을 중시하는 태도로 착각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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