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 현실’이라는 관용적 표현이 우스개의 대상이 된지는 오래다. 왜냐하면 현실이 언제나 영화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공개된 MBC 백종문 미래전략본부장과 보수인사들의 2014년 발언들은 그야말로 ‘영화를 압도하는 현실’이라는 수식을 붙여주기에 충분하다.

물론 누군가는 단지 몇 사람이 모여서 이런 저런 발언을 한 걸 가지고 너무 크게 문제 삼는 것 아니냐는 항변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볼 수 없는 것은 이들이 나눈 대화에 드러나는 인식이 결국 현실에 어떤 영향을 줬다는 게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 뉴스타파 24일 보도 화면 캡처

이들이 했다는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MBC 주변에 풍문처럼 떠돌았던 어떤 ‘비사’들이 사실에 가까운 것이라는 심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최승호 PD와 박성제 기자는 평소 본인들이 왜 해고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그간 진행되어 온 소송을 통해 이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점도 확인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MBC 사측 역시 그러한 사실을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송에서 질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 이유는 MBC 사측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그러나 이제 이 녹취록을 통해 우리는 진실을 알게 됐다. 그 진실의 실제 내용은 우리가 짐작하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MBC를 보수세력의 입맛에 맞는 곳으로 바꾸기 위한 나름의 한 수였던 거다.

또 눈여겨 볼만한 것은 <무한도전> 등에 대한 MBC 수뇌부의 적대감이 사실로 다시 한 번 드러났다는 거다. 이들은 보도나 시사프로그램보다 파급력이 큰 게 예능이라며 <무한도전>과 <라디오스타> 등을 언급하고 있다. 백종문 본부장은 당시 예능프로그램들이 은근슬쩍 파업을 편들었다는 취지의 대화에 “회사가 손을 못 대고 있다”고 첨언했다. “못 대고 있다”는 건 ‘대고 싶다’는 욕망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예능프로그램이 ‘표현의 자유’와 같은 가치의 영역 안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좌파의 프로파간다’로 기능하고 있다는 순박한 인식이다.

JTBC 손석희 보도부문 사장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도 있다. 손석희 사장이 오랫동안 몸 담아 왔던 MBC를 떠나 JTBC로 갈 때 결국 수뇌부의 반발 때문에 밀려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무성했다. 본인이 이에 대해 직접적인 표현을 한 바 없지만 이 녹취록 덕분에 우리는 대략의 진실을 추측할 수 있게 됐다.

이 녹취록에 따르면 백종문 본부장은 프레시안, 한국일보 등의 기자들이 시사 라디오프로그램에 출연해 뉴스브리핑 등 코너를 진행하는 것에 불편함을 드러내면서 “라디오는 다 빨개”라고 발언했다. ‘빨갛다’는 건 물론 라디오 출연자들의 어떤 역량 부족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성향이 문제라는 거다.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오랫동안 뉴스브리핑을 담당해 온 시사평론가 김종배씨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과거부터 늘 교체하고 싶었는데 대안이 없어서 교체를 못했었다는 투다. 이런 노골적 압력이 횡행하는 동안 내부에서 손석희 사장이 어떤 고민을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비디오’다.

보수 인터넷 언론의 대표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의 하나인 MBC의 고위 간부가 서로 선배님 주필님 해가면서 서로 청탁을 하고 역할분담을 하는 장면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들이 ‘언론’을 자처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을 자처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가 토론프로그램 패널로 나가느니 마느니 하면서 여론을 어떻게 뒤흔들지 고민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의 하나인 MBC의 고위 임원이 끼어있는 대화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저열하고 천박하다.

이 녹취록이 폭로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엇갈린다. 안광한 MBC 사장을 둘러싼 내부 불화가 반영된 것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정치적 맥락이 작동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그런 해석들보다 우리가 무겁게 여겨야 할 것은 언론이 스스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포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 녹취록의 존재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냉소적 인식을 강화시키는 커다란 근거로 작용할 것이다. 이 녹취록에 의하면 언론 지상의 보수와 진보 간 싸움은 공론의 장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커튼 뒤의 음모와 협박이 본질이다. 언론에 등장하는 ‘명분’은 모두 다 어떤 구실일 뿐이며, 실제로는 음모적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를 속이기 위해 기능할 뿐이다.

▲ 더불어민주당 최민희 의원이 2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 도중 자신이 공개했던 MBC 노조원 해고와 관련한 MBC 간부의 녹취록 공개 취지와 언론의 보도에 대해 설명하다 눈물을 흘린 뒤 감정을 추스르고 있다. (연합뉴스)

MBC는 이 녹취록이 폭로된 날 경찰이 더불어민주당 최민희 의원의 선거법 위반 여부에 대해 내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출마 기자회견을 마친 뒤에 시청 사무실 등을 돌며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소위 ‘호별방문’이다.

선거법 위반 사실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의혹이 제기된 사실이 객관적으로 봐서 그리 엄중한 것도 아닌데, 과연 이런 뉴스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 중 하나라는 MBC의 간판 뉴스프로그램에 등장할만한 성격의 것인지 의문이다. 더군다나 이 문제는 14일에 발생했고 20일에 남양주 경찰서와 남양주선관위원회가 밝힌 바에 따라 경기일보 등의 지방지가 21일 지면에 게재한 것이다. 즉 거의 5일이 지난 사안을 새삼 문제 삼는 것은 어떤 ‘의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의도란 물론 ‘복수’다. 녹취록은 최민희 의원에 의해 언론에 보도됐다. 간단한 문제다.

언론은 독자 또는 시청자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 신뢰를 얻지 못한 뉴스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MBC뉴스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개별 보도를 접할 때마다 이 소식이 또 어떤 음모에 의해 화면에 드러나게 된 것인지, 어떤 정치적 이해관계나 금전이 오갔는지에 대해 상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뉴스는 사안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MBC의 어떤 이해관계 때문에 만들어지고 유통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사람들은 언론의 이런 현실을 생각하며 ‘기레기’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기업과 정치와 언론이 부적절하게 공생하는 내용의 영화를 보기 위해 천 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몰린다. 언론은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 ‘영화적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기레기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커튼 뒤의 적나라한 음모가 드러나고 이 폭로에 대한 복수가 화면에 등장한 이상 그럴 수 없게 됐다. 그러니 언론으로서의 MBC는 끝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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