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울산의 남쪽, 온산공단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서 자랐다. 다행히 온산공단과 우리 동네 사이에는 산이 몇 개가 있어 바람이 자주 넘어오지는 않았지만, 한 번 바람이 넘어오면 희한한 냄새가 났다. 동네 사람들은 그 ‘냄새’를 ‘온산 똥 구린내’라고 불렀다. 똥냄새는 아니지만 역겨운 냄새에 눈도 따갑고 구역질도 나곤 했다.

장에서 해산물을 사온 어머니가 욕을 할 때가 있었다. 멍게를 사서 배를 갈아보면 맛있는 속살이 나오는 게 아니라 허연 비누 같은 게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어머니는 득달같이 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한바탕 싸움을 했다. 어디 팔 게 없어서 온산에서 잡은 걸 파냐고 난리를 폈다. 파신 분은 죄송하다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 분의 신용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외삼촌이 산 곳은 고리 원자력 발전소 근처였다. 외삼촌은 원자력 발전소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숙을 했다. 주말이나 방학에 종종 놀러가서 발전소 근처의 방파제에서 게도 잡고 고동도 잡으며 놀았다. 당연히 거기서 잡은 것들을 맛있게 먹었다. 고리 원자력 발전소는 ‘발전’의 상징이었지 어린 시절 한 번도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늘이 까맣게 되고 빗물에서 가끔 비누냄새가 난다고 하더라도 그건 불가피한 것이었고 오히려 경제가 발전되고 있다는 징표였다. 감수해야하는 것이었다. 온산에서 피부병이 돌고 난리가 났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면 그건 무섭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거기서 나는 걸 먹지 않으면 되고, 심지어 그쪽 사람들과 만나지 않으면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해야하는 것은 ‘사람’이고 ‘지역’이었지 결코 ‘산업’은 아니었다. ‘산업’은 축복이었으니까.

그렇게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피해자를 추방하고 배제하며 지워버리는 형태로 이룬 것이 한국의 ‘발전’이었다. 동네가 사라지고, 사람이 사라지고, 역사가 사라지고, 자연이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니 그 비용이 얼마인지는 ‘계산’되지 않았다. ‘계산’이라면 기가 막힌 것이 자본주의인데도 말이다. 그 ‘사라짐’을 기억하기보다는 망각함으로써 우리는 ‘발전’에 취할 수 있었다. 그 대신에 도로가 생기고, 도로가 생기고 또 도로가 생겼다.

기억나는 일이 있다. 초등학교를 마칠 때쯤 울산에서 부산으로 가는 도로가 학교 뒷산을 깎고 만들어졌다. 그 때 학생들 사이에 괴담이 돌았다. 초등학생들이야말로 괴담을 좋아하지 않는가? 우리들 사이에 떠 돈 괴담은 학교 뒷산이 호랑이의 어디에 해당되는데 그 산을 깎아버려서 호랑이가 노해서 곧 큰 재앙이 닥친다는 거였다. 산이 깎이면서 호랑이가 피를 흘린다고 무서워했다. 진짠지 가짠지 공사를 하다가 다친 사람이 나왔다는 말이 떠돌 때마다 우리는 ‘호랑이의 저주’를 떠올렸다.

꼬마들의 괴담이었지만 이 말에는 자연을 대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어떤 태도가 담겨있다. 모든 자연에 ‘정령’이 들어있다는 정령주의적 믿음이지만, 그 믿음으로 자연을 함부로 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연을 해할 때면 조심해야하고 최소화해야한다는 ‘지혜’가 ‘비과학적’인 정령주의엔 들어있다.

또한 돌이켜 생각하면 저 ‘괴담’은 당시 초등학생들의 생활 세계가 파괴된다는 안타까움의 발로였던 것 같다. 우리는 학교 뒷산을 넘어 그 뒤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산을 뛰어다니며 놀았으니까 말이다. 그 산을 넘어 진달래도 따먹고 칡도 캐먹으며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 도로가 뚫리면서 우리는 어른들로부터 강력한 경고를 받았다. 차가 씽씽 달리는 도로이니 죽기 싫으면 절대 그리로 다니지 말라고 말이다.

그 도로가 뚫리고 난 다음 학교 뒷산은 그냥 반토막이 난 볼품없는 산이 되었고, 우리는 더 이상 그 너머로 갈 수가 없었다. 아마 꼬마들이 말한 피를 흘리는 호랑이는 우리들의 생활세계, 놀이세계였을 것이다. 뒷산이 갈라지면서 그 뒤로 이어지는 우리들의 놀이터는 영원히 사라졌으니까 말이다. 꼬마들은 그 생활세계의 죽음을 호랑이의 저주로 애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 도로 옆에 또 다른 도로가, 그리고 그 너머엔 고속도로까지 뚫렸다.

▲ 황윤 이계삼 김주온 구자상 신지예 김은희 남우근 이유진 장서연 하승수 한재각, 포도밭출판사, 2015.12.21

<숨통이 트인다>(황윤 외, 2015, 포도밭출판사)는 녹색당에 비례대표로 출마한 분들이 어떤 정치를 하려고 하는지를 담은 책이다. 녹색당이니 당연히 가장 중요한 주제는 환경-생태 문제일 것이다. 내가 이 글의 시작을 내 어린 시절의 기억, 특히 한국의 공업화와 산업화, 그리고 그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가지고 있는 도시인 울산의 이야기로 시작한 것도 녹색당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자연-생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한국사회가 이뤄낸 발전의 허상에 대해 통렬히 지탄한다. 한국은 여전히 ‘발전이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 그러나 그 발전이 어떤 존재들을 갈아 넣어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망각한다. 예를 들어 밀양의 송전탑 싸움을 보자. 우리는 도시의 전기를 위해 밀양의 몇몇 시골 마을을 통째로 갈아 넣었다. 이웃끼리 서로 의지하고 살던 마을이 통째로 박살났고 이치우 어르신을 비롯해서 목숨이 잃은 분들도 있다. 발전은 이처럼 누군가의 삶과 삶의 터전을 통째로 박살내었지만 그것을 ‘계산’하지는 않는다.

동물들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지금 전북에서 또 구제역이 돌고 있다. 구제역이나 조류독감과 같은 전염병이 돌 때마다 동물들은 살처분 당한다. 수백마리 수천마리 수준이 아니다. 2010년엔 수천만 마리가 죽음을 당했다. 전염병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처사라고 하지만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질병이 대규모화되는 이유이자, 질병이 돌면 살처분이 대규모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중에는 ‘공장식 축산’이 있다. 숨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좁은 우리에 빽빽이 가두었으니 질병이 빠르게 번질 수밖에 없고 살처분을 대규모로 할 수 밖에 없다.

온산공단과 고리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말을 한 것처럼 한 마을을 통째로 이주시켰다.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잘 나가던 시절 그 주변 마을을 흥청거렸다. 외삼촌이 하숙을 하던 마을에도 돈이 넘쳐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 주변 마을은 사람이 살기를 기피하는 곳이 되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늘 불안에 떨고 있다. 사람과, 역사와, 마을과, 자연을 다 파괴했지만 그 비용은 ‘계산’하지 않는다. 다만 불가피한 일이었으니 망각하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발전의 짝패는 ‘망각’이다. 나는 세월호에서부터 메르스, 그리고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 사회에서 사람들이 얼마 정도는 누구보다 애도하고 가슴 아파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직도 하고 있냐?”고 짜증을 내는 것을 이런 점에서 이해한다. 망각하지 않으면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누가 죽었고, 무엇이 없어졌으며,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하나 하나 기억하다간 제 정신으로 살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개인의 불행’ 혹은 ‘운명’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려야 한다. 망각을 통해서만 삶을 버틸 수 있기에 ‘잊지 말자’고 말하는 것을 무엇보다 못 견디는 것이다.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깐 말이다. 잊지 않고 그걸 다 계산에 넣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이 다 ‘허깨비’일지도 모른다는 게 드러나니깐 말이다.

나아가 이 책에서 저자들이 주장하는 정치에서 가장 주목해야하는 것은 우리가 발전에 대한 신화에 빠진 산업화를 통해 잃어버린 어떤 태도다. 나는 그 태도가 바로 ‘존중’과 ‘상호 호혜성’이라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말해 이들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녹색의 의미는 인간이 돌보아야하는 여린 존재로서의 자연이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녹색’은 그것이 동물이건, 자연이건, 청소년이건, 소수자건, 그 어떤 존재라고 하더라도 상호호혜적인 존중의 관계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녹색은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방식의 언어다. 이 책에서 구자상은 녹색은 관계의 언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이 책이 주장하는 녹색이 가장 거부하는 것이 ‘일방성’이다. 아마 저자들은 인간이 자연을 더 잘 돌보아야한다는 ‘자연보호주의’에 대해서도 거부할 것이다. 자연보호주의가 녹색의 가치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보호’라는 말에서 잘 나타나듯이 그 방향은 인간에서 자연으로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동물이건, 소수자건, 청소년이건 이런 보호주의적 태도에 의한 관계의 일방성이야말로 상대방의 주체성을 파괴하는 가장 반-녹색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일방성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취약점이다. 많은 철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근대사회의 주체를 ‘독백의 주체’라고 부른다. 근대적 자아는 무엇보다 자기가 중요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를 대화의 상대가 아닌 도구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그는 타자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독백을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런 나르시스트적인 근대적 자아는 남과 대화하는 법을 모르는 존재다.

반면 녹색이 취하는 관계는 존중과 상호호혜성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일방적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보호를 제공하는 게 아니다. 존중과 상호호혜성의 바탕에는 모든 것은 자기의 세계가 있으며, 그 자기의 세계들이 서로 의존적으로 얽혀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얼마 전 타계하신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셨고 구자상이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자유’는 ‘자기의 이유’다. 존재하는 것들이 다 자유가 있다는 것, 즉 자기의 이유가 있으며 다른 존재는 그 이유를 경청하고 존중하고 인정할 의무가 있다.

상호 호혜성은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쓸모’와 ‘쓸모 없음’으로 나누지 않는다. 오히려 호혜적 관계에서 본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쓸모가 있고 쓰임이 있다. 다만 어떤 쓸모를 우리는 쓸모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미 쓰이고 있는 존재를 쓰임이 없는 존재로 깎아내리고 있다.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은 쓰임이 없는 존재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경제발전에 기여하지 못하는 존재는 다 쓸모없는 존재고 사회의 짐이라고 여긴다. 나치가 그렇게 했듯이 말이다.

사회학자 바우만이 지적한 것처럼 근대사회는 존재를 쓸모와 쓸모없음으로 나눠 쓸모없는 것으로 규정된 존재를 ‘쓰레기’로 취급한다. 이 쓰레기를 청산하는 게 신자유주의 이후 통치의 방향이라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쓸모 없는 존재로 취급받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쓰레기’로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가 쓰이지 못하는 것이 쓸모가 없어서 그렇다고 인정하고 자학할 때 통치는 훌륭하게 성공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핵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학’하게 하는 것이 한 편에 있다.

그렇기에 나는 녹색의 정치가 무엇보다 깨부셔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쓸모’와 ‘쓸모 없음’을 나누는 것을 통해, 그리고 쓸모의 ‘위계화’를 통해 작동하고 있는 권력이라고 생각하다. 그에 맞서는 녹색의 이념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쓸모 있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모두 쓸모 있으며 이미 쓰이고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 나는 기본소득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소득은 직업이 없는 사람도 살아야하니까 돈 좀 던져주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사회에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이미 우리는 충분히 이 사회에서 쓸모 있게 쓰이고 있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자는 말이어야 한다고 본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자학에 맞서는 정치, 사랑의 정치라고 말하고 싶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자기를 소중히 여기고, 자기를 계발하며, 자기를 실현하라며 자기만을 생각하는 ‘나르시스트’를 대량으로 양산했지만 이 나르시스트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오히려 이 나르시스트들은 자기를 계발하고 실현하기 위해 자기를 감시하고 파괴하며 ‘자학’에 빠질 뿐이다. 나르시스트가 되라는 명령의 종착점이 자기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학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나는 녹색의 정치는 바로 이 자학에 맞서,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를 회복해가는 과정이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상호존중을 통해서 말이다.

이 책은 발전을 넘어서는 기억의 정치, 일방성을 넘어서는 상호존중과 호혜성의 원리, 그리고 자학을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기의 이유를 가지며 자기를 돌볼 수 있게 하는 사랑의 정치가 우리 사회의 새로운 원리여야 한다는 것을 자기의 삶으로 구현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물과 더불어, 마을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소수자와 더불어, 청소년과 더불어 상호 존중의 세계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 이 숨통 막히는 정치를 뚫겠다고 나선 출사표다.

요새 인터넷에서 떠도는 것처럼, 이왕 이렇게 된 것, 녹색당이 국회에 진출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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