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대한민국에 기막힌 정치·사회 이슈가 많았지만, 개인적으로 여성이면서 교육자인 나에게 가장 기(氣) 막힌 뉴스는 10월 말 새누리당이 당정협의를 거쳐 내놓은 저출산, 고령화 대책이었다. 골자는 초등학교 입학 시기를 만 5세로 앞당기고, 초등과정은 5년으로, 중고교 과정도 합쳐서 5년으로 줄이라는 것이다.

세포증식을 멈추지 않는 악성종양처럼 ‘더 빨리’, ‘더 많이’를 강제하는 신자유주의의 시스템이 우리 시대의 정신을 얼마나 강고히 지배하고 있는지가 가늠된다. ‘빨리’ 취학하면 고용 인구가 ‘많아져’ ‘빠른’ 취업이 가능하므로 아이를 ‘많이’ 낳게 될 거라는 철저하게 양화된 사고의 막힘없는 논리는, 그 많음과 빠름을 위해 희생되어 상처 입고 고통 받는 것들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치부하며 인식의 대상에서 배제시킨다.

의도적/비의도적 불임뿐만 아니다. OECD 국가 자살률 1위, 노인 빈곤률 1위, 아동 학업 스트레스 1위, 대기질 178개국 중 166위 …. 사람이 살 수 없는 나라임을 경고하는 명백한 물질적 지표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곳에서 일상화된 인간적/비인간적 신체의 고통을 질적으로 사유하지 못하는 정신의 불능은 멀지 않은 미래에 또 다시 제2, 제3의 세월호를 낳을 것이다.

모든 것을 동질화시키고 평준화하는 정신의 영토, 헬조선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우리는 현재의 궁핍과 고통을 포착할 수 있는 도구(개념과 이론)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자 되는 것이고, 힘이 곧 정의이며, 사랑은 게임, 결혼은 사업이 된 헬조선에서 낱말들은 일제히 자본주의 상품의 마법에 걸려 변형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 정동이론, 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시그워스,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역, 갈무리, 2015.12.21

정동 연구는 1990년대 이래 영미권 학계에서 머리(이념)와 몸(행동)의 괴리현상들을 파헤치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정동이론>은 약 20년에 걸쳐 전개된 연구의 중간 결과물들을 엮어낸 선집이다. 나는 암울한 헬조선의 현재를 직시하고 또 교정해가는 데 필요한 어떤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받길 기대하며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정동 연구는 항상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정신의 강박에서 벗어나 진짜 삶에로 나아가려는 유물론적 기획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기획의 출발점은 정동, 즉 몸과 정신의 분리 너머에 있는 “비주관적 힘” 또는 “활력적인 차원 내지 능력”, “의식화된 앎 아래나 옆에 있거나, 또는 아예 그것과는 전체적으로 다른 내장의(visceral) 힘들, 즉 정서(emotion) 너머에 있기를 고집하는 생명력(vital forces)”이다. 어렵지 않게 “느낌”이라고 하자. 즉 세계에 의해 정동 되/(하)기는 제대로 느끼는 것, 이전까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또는 사회적으로 약호화된 감정에 의해 왜곡되어온 미세한 사건들을 내 몸으로 다시 새롭게 조응하는 일이다. 이러한 조응은 정신의 필터를 통과한 세계의 의도된 표상을 부정하고, 이전과 똑같은 세계를 이전과 질적으로 다르게 경험하고 사유하도록 촉구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정동 연구자들은 느낌의 촉수를 예미하게 세워 일상과 접촉하고 있다. 하지만 일상의 리듬과 양태를 응시하는 그들의 미시론적 시선은, 놀랍게도 미학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그리고 정치·경제적인 것이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거시적 장을 파고든다.
예를 들어 사라 아메드는 <행복한 대상>에서 우리가 꿈꾸는 행복한 삶이 “함께 어울림의 기호들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압력”(75쪽)에 의해 구성된 것임을 폭로한다. 이 논문의 통찰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분석하는 데도 유효하다. 요즘 TV 방송에서 대세인 <슈퍼맨이 돌아왔다>, <오 마이 베이비>, <아빠, 어디가?>, <맘마미아>, <자기야- 백년 손님> 등 가족예능 프로그램들을 보자. 등장하는 연예인과 가족 구성원, 에피소드 배경과 구성방식에 있어 프로그램마다 차이가 있지만,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를 등장시켜 갈등을 고조시킨 다음, 그것을 해결해가는 행복의 서사가 끝없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도 없다.

반복된 서사의 주입이 우리에게 ‘습관적으로’ 가족을 행복의 대상이라 여기게 한다. 하지만 이혼율과 한부모 가정 자녀가 급증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TV 프로그램의 화면과 자신을 대조하며 불행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행복의 약속 없이 살아갈 수 없고, 또 매우 ‘행복하게’ 그렇게 살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의 원인이 된 결과로 그렇게 사는 셈이다.”(84쪽) 아메드에 따르면 가장 내밀하고 직접적으로 유발되는 좋고, 나쁜 느낌 속에 거부할 수 없는 정치적인 투쟁이 내재해 있다. 헬조선에서 투쟁을 원한다면 자기 느낌부터 살펴볼 일이다.

“헬조선을 떠나 이민가고 싶다는 나라들도 천국이 아니다. 현재의 취업난 및 양극화는 정보기술의 발전에 따른 결과로 전세계적 현상이다. 남만 탓하면 영원히 지옥이다.” 이어령의 말처럼 전지구적인 자본주의의 힘 아래 그 어느 나라도 천국일 수 없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이 정보기술의 발전을 위해 치러야 할 불가피한 대가는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어원사전을 찾아보면 느낌은 ‘늦’에 ‘기다’가 붙어 생긴 말이다. 이때 ‘늦’은 “징조”의 뜻을 가진 말이다. 그래서 느낌의 원래 의미는 “징조를 감각하다”라고 한다. <정동이론>에 따르면 전개인적인 단계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한낱 주관적인 감정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작동하는 권력과 복합적 관계망들의 어떤 징조를 담고 있다. 한국을 영원한 지옥으로 만들기 전에 먼저 각자 제대로 느끼자. 그때서야 비로소 지금보다 더 느리고 작아도 충분한, 그래서 더불어 살 수 있는 삶의 가능성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행복, 위협의 정치, 수치, 낙관주의, 음식, 전쟁, 바이오 미디어, 사무실, 글래머 등 일상의 소소한 주제들에 관한 <정동이론>의 생생한 느낌들이 그 예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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