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진보의 판타지야!”

어느 자리에서 어느 교수의 말이다. 영화 <내부자들>이 정치, 기업, 언론의 부적절한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에 대한 답이다. 난데없이 진보의 판타지라니, 무슨 말인가? 이 영화에 나오는 내용이 전부 거짓말이라는 뜻인가? 그런 건 아니다. 정치와 기업과 언론이 서로 기득권적 이득을 주고받는 데 대한 표현을 거짓이라고 할 순 없다. 다만 양상이 꼭 그 영화의 내용 같지는 않을 수 있다.

<내부자들>에 등장하는 인물 혹은 사건의 모티브는 대개 현실에서 따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조선일보, 현대자동차, 홍준표, 김학의, 장자연 등의 키워드가 머릿속을 헤집는다. 영화가 노골적으로 현실의 기표들을 장면에 붙들어 매는 순간 ‘현실감’은 배가 된다. 뒤집어 말하면 이건 영화의 전략치고는 1차원적이다. 대중이 갖고 있는 정치적 냉소를 형상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건 음식을 맛있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 원초적인 단맛을 첨가하는 것과 같다. 폄훼할 것은 아니지만 분명 영화적인 관점에서 좋은 말로 치장을 해줄 것도 아니다.

▲ 영화 내부자들 포스터

어쨌든 그런 의도된 현실감을 들어내고 나면 이 영화에서 그리는 기득권들의 관계는 어떤 사건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여우와 두루미가 등장하는 우화에 가깝다.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고백처럼 언론사의 논설주간이라는 자리가 한국사회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는 배후의 무게감을 가질 수 없을뿐더러 오로지 “미래자동차 없이는 조국일보도 없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건에 대한 보도의 태도를 결정도록 할 수도 없다. 집단적 태도를 결정하는 데에는 명분과 실리의 이율배반과 상호기만이 각기 작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언론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문제가 된 부천 초등학생 시신 훼손 사건에 대한 조선일보의 태도를 소재로 해보자. 조선일보는 그들답게 평소 피해 아동을 학대해 온 아버지를 범인으로 확정하고 실명을 공개했다. 보통 언론들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흉악범들에게 하는 대로 호칭을 빼버리는 최악의 대우를 선보였다. “최씨는 시신을 훼손했다”는 문장은 “최는 시신을 훼손했다”로 바뀌었다. 이는 극중의 “볼 수 있다”가 “매우 보여진다”로 변화하는 마법에 비견할 만하다.

‘씨’의 존재가 그렇게 중요한가? 굳이 대답하자면 그렇다. 조선일보는 그가 ‘씨’같은 건 붙일 필요도 없을 정도로 흉악한 범죄자라는 걸 강조하고자 한다. 조선일보가 ‘씨’를 없애는 순간 ‘씨’라는 호칭을 빼앗긴 그 범죄자는 우리 사회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야말로 돌연변이적인 존재로 규정된다. 조선일보는 무죄추정의 원칙이니 인권이니를 따지지 않고 언론이 가할 수 있는 모든 ‘테러’를 그에게 가한다. 어떻게 우리 사회에 너 같은 놈이 존재할 수 있느냐는 듯한 태도이다.

정말로 끔찍한 것은 그 ‘최’의 존재가 하나가 아닐 거라는 데에 있다. 세상 어디엔가 또 다른 ‘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최’들은 사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보수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사각지대에서 또 다른 학대와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들을 체포하고 격리하고 박살내 곤경에 빠진 아동을 구출해내야 한다. 그러나 양육의 책임을 개인들에게 내맡기고 나몰라라 하는 체제가 존재하는 한 같은 비극은 다시 일어난다. 만일 우리가 언론의 책무를 다하려면 ‘사회’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의 크기를 더 늘려서 앞에서 언급한 ‘사각지대’의 범위를 좁혀나가야 한다. 아이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키워야 한다. 물론 조선일보 역시 장기 결석 아동에 대한 조치를 의무화하자는 등의 주장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게 다분히 일회적인 조치에 지나지 않게 될 거라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 한 해의 사례들만 모아도 그럴 거라는 점을 쉽게 직감할 수 있다.

▲ 조선일보 18일자 지면 일부

결국 조선일보의 ‘최’에 대한 분노는 이 비극의 책임이 체제가 아니라 오로지 그에게만 있음을 명확히 하자는 욕망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조선일보의 이런 태도는 어디서 정해진 것일까? <내부자들>의 논리라면 분명 ‘최’를 미워하는 누군가가 조선일보에 돈을 주고 사주를 했을 것이다. 혹은, 극중의 이강희-안상구와 같은 관계가 이 사건 언저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조선일보는 다만 어떤 이데올로그적 행위를 했을 따름이다. 조선일보의 행위는 자신의 사상적 지향에 충실한 것이면서 보수정치를 강화시키는 실질적 이득을 모색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조선일보의 신심어린 ‘정치’다. 현실의 기득권 세계는 정치, 언론, 기업이 모여 서로의 정치를 겨루고 교환하는 치열한 각축장이다.

영화의 결론이 다소 황당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의 결말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한국을 배경으로 권력과 부조리를 다룬 영화는 제대로 된 결말을 만들 수가 없다. 둘째, 한국에서는 모든 문제의 해결을 오직 인터넷으로만 할 수 있다. 감독은 영화를 제대로 결말지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억지스러운 반전과 활극을 동원해야 했다.

이런 진행에는 다른 사례들과는 달리 현실감이 가미되지 못했다. 안상구와 우장훈의 대역전극에는 조선일보, 현대자동차, 홍준표, 김학의, 장자연 등처럼 현실에서 따온 그럴듯한 ‘겉껍질’을 입혀줄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장훈이 중수부에 진출한 이후 모두가 모여 벗고 노는 카르텔에 합류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씁쓸할지언정 그럴듯한 결말이라는 평가를 받을 순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영화의 엔딩이 무언가를 해소하는 걸로 맺어져야 한다면 제대로 된 방식으로는 어떤 걸 제시할 수 있을까? 사실 <내부자들>의 결말은 앞서 언급한 기득권 정치의 안티테제로서의 대안적 정치를 언급할 수 없었다는 데에서 비롯된 걸로 생각된다. <내부자들>이 만든 우화에 등장하는 언론, 기업, 정치의 카르텔은 또 다른 정치를 통해서만 해소 가능하다.

엔딩롤이 올라가다 말고 뜬금없이 등장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강희가 대놓고 카메라 정면을 힐끔거리며 ‘딱딱한 오징어’를 언급하는 그 순간 말이다. 그가 말하는 대로 우리는 종종 딱딱한 오징어를 씹다 지쳐 버리는 입장에 늘 처한다. 그걸 씹어야 할 이유를 아무도 말하지 않고, 누가 씹을 동기를 제공해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의 부재다.

<내부자들>의 황당한 결말은 결국 <내부자들>이 대안적 정치를 말할 수 없는 처지라는 데에서 비롯된 걸로 볼 수 있다. 대업(?)을 이룬 안상구와 우장훈은 강 건너 국회를 보며 모히또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는 둥 알 듯 모를 듯 한 소리나 한다. 우장훈은 결코 강을 건너 국회에 입성할 수 없다. 만일 이 영화가 그런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면 제작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거나 개봉에 어려움을 겪게 됐을 게 분명하다. 즉, <내부자들>의 딜레마는 <내부자들> 자체가 ‘내부자’라는 점에서 온다.

우리 언론의 처지가 이와 꼭 같다. 대통령이 신년기자회견 장소를 청와대가 아닌 ‘청와극장’으로 만든다 해도 다들 꿀 먹은 벙어리다. 마음속으로는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한 편의 잘난 연극에 최대한 협력한다. 사전에 정해진 질문지를 웬만한 언론들은 다 받았을 텐데, 자기들 손에 피 묻히기 싫으니 힘없는 인터넷 언론이 어디서 주워서 공개한 문서를 제3자처럼 앞 다투어 인용한다. 이 와중에 그나마 양심 있는 기자들이 차마 자기 손으로 그 문서의 존재를 보도하지는 못하고, 애초에 힘이 없어 그들만의 리그에 끼지 못한 인터넷 언론에 정보를 넘긴다.

▲ 다수 언론이 인용보도한 박근혜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의 사전 질문지 (국민TV 뉴스K)

오늘날의 언론은 정치와는 완전히 담을 쌓은 입장이라는 듯이 행동한다. 기자의 정당 가입은 보통 사규로 금지된다. 스스로를 기자로 규정짓는 이들은 최대한 중립적인 시각에서 양쪽의 의견을 모두 물어 기사에 반영하는 스스로를 공정함의 구현자로 여긴다. 그러나 공공성에 기반하지 않은 공정함이 무슨 소용인가? 그런 식의 중립과 공정함은 ‘언론의 정치’를 포기함으로써 공론 조성을 위한 언론의 사명을 보수정치의 자양분으로 갖다 바친다.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내부자들>이 포기한 정치를 언론이 부활시켜야 한다. 이건 특정 언론사가 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를 대놓고 지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여의도 지향적인 모습으로 일관하라는 뜻도 아니다. 공공성과 다양성의 위에서라면 저널리즘의 어떤 ‘편파’는 공정함으로 전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저 전달하고 묘사하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감시하고, 비판하고, 비평해야만 한다. 심판이 심판이기 위해서는 단지 서있는 게 아니라 마치 선수처럼 뛰어야 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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