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2015년이 지나간 지 2주가 넘었다. 어느 해건 평탄한 해는 없었지만, 2015년은 한국 사회에 누적된 불만이 결국 터지면서 불협화음을 낳았던 시기였다. 별로 쓰고 싶지는 않지만 근래 유행하는 ‘헬조선’이라는 용어는 한국인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관조하면서 바라보고 있음을 매우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 이상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한국은 이미 ‘헬’(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인 셈이다.

대중 매체는 여론의 흐름에 매우 민감하므로, 당연히 이를 반영한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4년 말부터 2015년 초까지 화제에 올랐던 tvN 드라마 <미생>, JTBC 드라마 <송곳>, 영화 <소수의견>,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내부자들> 등의 작품들은 한국 사회의 문제 요소를 코드로 삼아 작품을 전개한 영상물들이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처럼 복고 코드를 전면에 내세우며 현실을 잊으려는 매체들도 등장했다.

하지만 결국 저마다 한계가 있었다. <미생>은 원작에도 내재된 한계였지만 결국 비정규직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지는 못했고,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역시 쉴 틈 없이 일하는 기자의 운명을 그저 소재로만 활용하는 것에서 그쳤다. <송곳>은 그간 드라마에서 나오기 어려웠던 한국 사회의 노동 문제를 꺼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원작 만화의 연출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물론 후반부의 전개에서 기계적인 양비론을 보여주며 아쉬움을 낳았다. <내부자들> 역시 관객들을 계속 자극만 할뿐 판타지 이상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나마 <소수의견>이 법정 드라마로써의 장르를 유지하며 한국 사회를 이야기했지만 흥행에선 쓴 맛을 봐야만 했다.

지난 1월 7일 개봉한 <화장실 콩쿨>(제작 CCRC, 배급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씨앗) 역시 흥행으로는 <소수의견>과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작품이다. ‘독립 영화’인 동시에 ‘단편 영화’이자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CJ나 NEW와 같은 대형 배급사를 통해서 개봉하지 않는 이상 대다수의 극장들이 독립 영화를 기피하는 현상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극장은 상영시간을 획정하기 어려운 단편 영화도, 어린이용이나 매니아 전용이 아닌 애니메이션도 기피한다. 3중고에 처해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점에도 불구하고 <화장실 콩쿨>은 무려 개봉 2주차를 넘긴 이래 전국 5개관에서 지속적으로 상영되고 있다. (종로3가 인디스페이스,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부산 국도예술관, 대구 오오극장) 배급사 씨앗은 지난 몇 년간 꾸준히 단편 애니메이션을 배급했지만 바로 이전에 픽사 애니메이터 3인의 단편들은 모아 개봉한 <댐 키퍼> 정도만 서울 인디스페이스를 넘어 대구 오오극장에서 상영될 정도로 독립영화관 사이에서도 단편 애니메이션은 기피의 대상이었다. (▷ 관련 기사 보기) 그랬던 단편 애니메이션이 무려 전국 5개관에서 개봉을 하게 된 것이다. 무엇이 이 작품을 주목받게 만들었을까.

웃기지만 씁쓸하고, 그리고 감동적인

흔히들 독립 영화라 하면 상업 영화와는 달리 무겁고, 특이하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라 여겨진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최대한 수익을 창출해 많은 이윤을 얻어내야 하는 상업 영화에선 이러한 부류의 작품을 시도하기 어려우며, 특히 한국에선 더욱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장실 콩쿨>은 절대 독립 영화에 흔히 가지는 편견으로 평가할 작품이 아니다. 그저 자본과 독립적으로 제작되었을 뿐, 영화가 지니는 위트는 상업 영화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 <화장실 콩쿨>의 주인공 상민은 변비에 걸린 것은 물론 직장 해고의 위기와 유학 연장으로 인한 3중고의 위기에 처해있는 인물이다. 영화는 그런 인물의 행보를 단순히 슬프게 그리는 대신 위트 있는 서사를 통해 흥미롭게 그려낸다.

영화는 무척이나 희비극적인 상황을 배경에 제시하며 내용을 전개한다. 주인공인 상민은 매우 큰 위기에 빠져있다. 3년 전 아내와 딸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기러기 아빠 신세에 처해있는데 회사는 난데없이 권고 사직서를 보내왔다. 당장 먹고 살 길이 급한 와중인데 아내는 사정도 모르고 딸이 계속 미국에서 유학하기를 원하는 것은 물론 바이올린 교습을 받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아내와 딸이 귀국하기만을 기다렸던 상민은 끈 떨어진 망석중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최근엔 변비까지 걸려 몸도 좋지 않다.

무척이나 씁쓸한 상황이지만 영화는 이를 단순히 슬프게 표현하는 대신 콩트적인 요소를 적재적소에 삽입하여 한 편의 직장 시트콤을 보는 것처럼 연출한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영화의 중심적인 공간은 ‘화장실’이다. 변비에 걸린 주인공이 아내와 딸과 국제 전화를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공간 역시 화장실이며, 주된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 역시 화장실이며 또한 사건이 어느 정도 해결된 뒤 에필로그가 벌어지는 공간 역시 화장실이다. 화장실은 남에게 보여주기 껄끄러운 사적인 공간이고, 영화는 이러한 특성을 재치 있게 활용한다.

서사의 중요한 축인 ‘권고사직’을 푸는 에피소드 역시 보다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상민을 비롯해 권고사직을 통보받은 직원들은 항의하러 본부장을 찾아다니지만, 본부장은 해고당할 위기에 놓인 이들의 속도 모르고 애인과 함께 밀회를 꿈꿀 따름이다. 상민의 직장 상사는 그런 상민의 속도 모르고 골려대지만 정작 자기도 상민과 같이 회사를 떠나야 할 위기에 놓이자 힘을 모으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신입사원도 얼떨결에 이 둘과 함께 하며 본의 아니게 사건을 해결하는 것에 도움을 주고 만다. 이렇게 쉽게 뭉치기 어려워 보이는 요소들이 조금씩 연결고리가 드러나며 좌충우돌 굴러가는 모습은 자극적인 코미디가 범람하는 한국의 환경에서는 무척이나 참신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이 재미있고 독특한 블랙 코미디의 마무리는 ‘가족’이라는 코드로 장식된다. 하지만 <화장실 콩쿨>의 가족이라는 소재는 <응답하라 1988> 등에서 드러나는 시대착오적인 가족주의가 아니다. 함께 살아가고 싶지만 딸의 미래를 이유로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지내야만 했고, 직장에서 해고당할 위기에 처하며 미국에 있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사건은 해결되지만 여전히 딸과 아내가 미국에 남아있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분명 최악은 면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은 와중에서 딸이 휴대폰으로 들려주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비록 달라지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가족의 미래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이 되어 감동을 낳는다.

제2, 제3의 <화장실 콩쿨>을 극장에서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살펴봤듯 <화장실 콩쿨>은 분명 흥미로우며 재미있는 작품이지만, <화장실 콩쿨>만 특별하게 그런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관객들이 잘 모를 뿐 국내외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화장실 콩쿨> 못지않게 독특하고 대중성을 모을 수 있는 작품들이 꽤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저 SICAF나 인디애니페스트와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제를 제외하면 이러한 작품들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을 뿐이다.

▲ 네이버와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가 함께 협력해 운영하는 ‘네이버 애니씨어터’는 수도권은 물론 독립영화관이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서도 독립 애니메이션을 만나게 해줄 수 있는 통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옛날에는 알음알음 정보를 구하며 영화제 일정에 맞춰 극장에 찾아가거나, 가끔 운이 좋아 발매되는 단편 모음집의 비디오테이프나 DVD를 구하는 것으로 단편 애니메이션을 봐야 했었다. 하지만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를 위시한 단체나 감독들의 노력으로 작품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증대하게 되었다. <화장실 콩쿨>처럼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의 배급팀 ‘씨앗’이 일 년에 한 작품 가량 소규모로 작품을 배급하고 있으며, 동시에 네이버 TV캐스트와 협력해 ‘네이버 애니씨어터’라는 이름을 걸고 온라인으로 작품을 공개하고 있기도 하다. (▷ 링크 보기)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열리던 정기 상영회 ‘인디애니 씨앗터’가 중단된 것이 아쉽지만, 대신 수도권이 아니더라도 인터넷이 닿는 곳이라면 누구나 독립 애니메이션을 접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이전보다 좋아진 것이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녹록치는 않는 것 역시 현실이다. <화장실 콩쿨>은 전국 5개관에서 작품을 상영했지만 1월 15일까지 전국 관객이 108명에 불과하다. (쇼케이스 관객 9명 포함) 배급사 씨앗이 작년 2월 26일에 개봉한 <댐 키퍼>가 같은 기간 1개관에서 127명의 관객을 모았던 것을 생각하면 상영관의 수는 늘어났지만 오히려 관객의 수는 줄어든 것이다. 물론 <댐 키퍼>의 경우 픽사 스튜디오에서 근무하는 애니메이터들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화장실 콩쿨>보다 더 인지도가 높았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이러한 수치는 아직도 독립 애니메이션이 상황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만다.

분명 앞으로도 지금의 난국은 계속될 것이다. 특히 2015년부터 시작된 독립영화판의 대기업 쏠림 현상이 2016년엔 더욱 가속화되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향후의 전망도 결코 밝지는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계속 독립 애니메이션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마치 이젠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와 함께 <서울역> - <부산행> 프로젝트를 공동 진행하는 위치에 오른 연상호 감독이 지속적으로 독립 애니메이션의 창작과 홍보를 시도했던 것처럼, 누군가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야지만 결국 미래가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화장실 콩쿨>보다 더 재미있고, 더욱 참신한 작품을 극장에서 만나기 위해서라도 그 시도는 분명 응원하고 함께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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