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9일 오전 10시 30분 중앙대학교 서라벌홀에서는 작은 강연이 열렸다. 후배가 문자로 알려준 이 강연은 필자에겐 의미 있는 강연이었기 때문에 회사일도 미루고 오랜만에 학교를 찾았다. 일상적인 학부강의라고 보면 규모가 꽤 컸고, 30여 년간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친 교수의 고별 강연이라고 보면 조촐했다. 정년퇴임을 앞둔 교수의 고별 강연은 제법 규모가 나가는 회의실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생각은 빗나갔다.

학부 강의가 진행되는 강의실이었고, 실제로 학기를 마치는 학부생들의 마지막 강의 시간에 고별강의가 진행됐다. 그래서 학부생들보다는 졸업한 대학원생, 기자 등 외부 인사들이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물론 학부생들도 얼마쯤 보였다. 이 강의는 영문과 강내희 교수의 공식적인 마지막 강의였다.(아래부터는 개인적인 관계─친하다는 의미가 아님─에서 교수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자 한다)

필자는 영문과 학생은 아니었지만 인문학을 좋아했고, 교수님은 학교 안팎에서 워낙 유명한 분이셨기 때문에 두 학기에 걸쳐 수업을 듣게 됐다. 교수님의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연구자로서 이론과 현상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필자가 전공한 언론학(또는 신문방송학)은 지나칠 정도로 이론과 방법론에 경도되어 있는데 교수님은 이론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하셨다. 이론가가 아닌 분석가로서 글쓰기를 하라고 하신 말씀은 직업적 글쓰기를 하는 상황에서도 곰곰이 되새기는 말이다.

사실 이 말은 수업 시간 이전에도 한 번 들은 경험이 있다. 하루는 필자의 지도교수와 점심을 먹으러 학교 후문의 한 식당에 들어갔는데, 마침 강내희 교수님이 계셨고, 필자의 지도교수와 두 분이 잘 알고 지내는 사이셨기 때문에 동석해서 점심을 먹은 기억이 있다. 그때 지도교수는 강내희 교수님께 필자를 소개시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필자는 석사과정을 막 마치고 박사과정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으레 그렇듯 교수님은 석사논문 주제가 뭐였냐고 물었고, 주제를 말씀드리자 신방과스럽지 않은 석사논문(온라인 공간에서 페르소나 형성에 관한 내용)을 썼다고 특이하다고 하셨다. 지도교수는 어떠한 이론가를 참고하면 좋을지 조언을 요청했는데, 그때 교수님은 이론보다는 현상을 좀 더 볼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 필자에겐 굉장히 인상적인 말이었고 박사과정 입학하자마자 교수님의 수업을 듣게 됐다.

교수들은 정년을 마치면 보통 명예교수라는 이름으로 학교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는데, 교수님은 명예교수직을 거절하셨다고 한다. 아마 부담스러운 자리라고 생각을 하신 것 같다. 고별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시간에 교수님의 향후 일정에 대한 질문에서 교수님은 중앙대와는 별개로 현재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의 학장을 맡고 계신데, 학장일 외에 특별한 계획은 없고 당분간은 쉬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학장으로 계신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이 잘 되길 바라며, 교수님도 재밌게 노시면서 건강하시길 바란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가 교수님 고별 강연의 핵심 주제다.

▲ 지난해 12월 강내희 교수 고별강연 모습 (참세상)

고별강연 내용의 일부를 필자와 교수님과 대화 형식으로 재구성해 소개한다.

한찬희(이하 한): 고별강연의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노동 거부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어떤 의미죠?

강내희(이하 강): 원래는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하는 강의인데 제목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바꿨습니다. 노동 거부는 쉽게 말하면 노동하지 말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자들은 노동하면 할수록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한: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것 같습니다. 저나 제 가족들 경우 일을 해서 특별히 삶이 개선되기 보단, 현상 유지만 겨우 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일을 안 하면 불안하고요.

강: 맞습니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힘들어요. 경제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 일을 하라고 합니다. 사회적 부가 증대되면 다들 잘 살 것이라는 것이지요. 일하고 또 일하라, 그렇게 시키는 것이지요. 때문에 노동이 강권되는 사회가 됐습니다. 역사적인 과정에서 노동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노동 윤리가 제시됐고, 확산시킨 세력 내지는 사회적 장치가 있었다고 봐요.

노동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기본적으로 짐을 지고 비틀거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고문 도구를 의미하는 말에서 유래하기도 했죠. 노동에는 노역, 고생 그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어느 순간 이러한 노동을 노동자들이 더 원하게 된 것 같아요. 일할 권리를 말하면서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같습니다.

가난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동을 하지만 삶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가난, 굶주림, 빈곤이야말로 노동을 하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합니다. 가장 자연스럽게 그리고 가장 강력한 노동을 불러일으키죠. 자본주의의 대변가들은 가난한 사람들 보고 일하라고 합니다. 더 가난해지기 위해서죠. 더 가난해지면 더 일하게 되고요. 이렇게 하는 것이 자본주의 생산의 철칙입니다.

한: 월급쟁이가 월급 모은다고 재벌이 되지는 않겠지만, 일하면 더 가난해진다는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강: 옛날에 농토는 농민들의 생활수단이자 생존수단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할 때, 농민들은 농토를 빼앗기죠. 신흥부르주아들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자유로운 무토지 노동 프롤레타리아트가 되게 되죠. 여기서 자유는 농토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자유입니다. 그래서 토지가 없는 가난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됩니다.

이들은 노동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힘들죠.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노동 윤리, 직업 윤리를 강조하는 게 이게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찌들게 했습니다.

한: 현시대에 임금 노동자들이 처해있는 상태같이 보이네요. 맑스의 경제학-철학수고를 보면, 부가 증가하는 사회에서 자본가들의 노동 수요도 늘어나고, 공급을 초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동임금의 상승으로 초과노동이 발생하며, 노동자들은 자신을 희생하죠. 그리고 자본의 집적은 분업을 증가시키고 분업 때문에 노동자는 노동에 의존하게 된다고 합니다. 기계적 노동에 의존하게 되는데, 오로지 노동만 하는 인간계급의 증가로 인해 노동자의 가격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노동자들이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인데,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맥락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상황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지요?

강: 제가 처음 문장을 배울 때 첫 문장이 “영희야 이리와 나하고 놀자”였습니다. 어릴 때는 놀자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요. 아마 기억에 서울에서도 80년대 중반까지는 동네 골목에서 제일 많이 들린 것이 ‘OO야 놀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전혀 아니지요. 지금 아이들은 다 학원에 있겠죠.

대체로 한국에서 노동자 길들이기가 체계적으로 시작된 것이 박정희 정권 때라고 봅니다. 새마을 운동이죠. 대학교 입학 이후 고향을 찾았는데 그때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시골마을에 6시 되면 나무 위에 달아 놓은 스피커에서 새마을 운동 노래가 나왔습니다. 안 일어날 수가 없었죠. 일어나서 일하러 나가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제가 지도한 박사논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구래의 나태하고 체념적인 생활태도를 비판하고, 자립과 자활을 위한 적극적 태도와 근대적 노동윤리가 강조됐다. 원조 물자나 국가의 보호에 기대는 태도는 경제적으로 불리할 뿐 아니라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약자에 대한 무상 구원은 낭비적이고 비생산적인 정책으로 치부된다.”

이런 게 박정희 정권 때부터 지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OECD 자료를 보면 한국의 노동시간이 굉장히 많습니다. 제일 짧은 데가 네덜란드인데 하루 8시간 노동으로 비교하면 석 달 이상이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노동할 권리를 말하면 안 된다고 봐요. 노동을 거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동을 계속해서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것이지요.

한: 말씀을 듣고 있으니 답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해결책 같은 것이 있을까요?

강: 임금 노동은 강제적인 필연에 의해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노동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동은 필요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는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강제적인 임금 노동을 너무 많이 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더 큰 효율성과 더 큰 생산성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일을 더 많이 안 해도 되는 것이죠. 노동이 고역이라고 한다면, 이를 많이 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이 생산성 증가인데, 그 반대가 나타나죠.

취업은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이 잉여가치는 착취되기 때문에 취업은 착취당하는 것인데, 취업하면 축하하고, 이게 오늘날의 상황입니다. 임금 노동은 거의 강제적인 노동입니다. 임금 노동의 강제로부터 벗어나면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합니다.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게으를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노동이 지배하는 사회,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게 하는 그런 사회를 바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노동의 강박,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꿈꿀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로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말씀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게 많이 아쉽네요. 앞으로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강: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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