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새해가 밝았지만 정치는 2015년과 비교해 나아질 게 없어 보인다. 2016년 정치를 규정지을 근본 문제인 ‘박근혜 정권’의 성격이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4년을 거치며 상당한 위기에 봉착한 것으로 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어느 새 부활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에서 2014년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해였을 것이 분명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해 거의 모든 정치 일정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시기인 집권 2년차는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정권과 정치권의 혼란스런 줄다리기 국면에서 사실상 없어져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4년 말에는 이른바 비선 실세의 국정 개입 의혹에 대한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이 벌어져 혼란이 가중됐다. 2014년의 정치적 혼란은 안대희·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와 정홍원 국무총리의 유임으로 이어지는 상징적 차원의 사건에서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2015년은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 볼 때 최악의 조건 속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공무원 연금법 개정을 시작으로 공공·노동·금융·교육의 4대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해 이 ‘최악의 조건’을 벗어날 수 있는 통치력을 축적하고자 했다. 그러나 2015년 5월 메르스가 대유행하고 이 문제에서도 정부가 무능으로 일관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는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간의 무기력을 정면돌파 하고자 정권이 선택한 또 하나의 카드는 정치권과 재계에 ‘사정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는데 이 역시 의도한대로의 성과는 없었다. 오히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메모’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로 인해 이완구 국무총리가 낙마하는 총체적 난국이 이어지는 계기로 작용했을 뿐이다.

유실된 통치력을 다시 축적하는 전기를 만든 건 두 가지 포인트를 통해서였다. 첫째는 쉬운 해고와 정규직 노동조건의 하향을 핵심으로 하는 ‘노동개혁’을 밀어 붙이면서 동시에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정권 2년차와 3년차 초반기를 날려버린 대가로 시간을 두고 추진했어야 할 부담스러운 과제들을 한꺼번에 밀어붙여버린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을 우려하며 ‘복지부동’의 단계로 슬슬 넘어가던 중이던 관료조직들은 이를 계기로 ‘면종복배’의 단계로 다시 되돌아왔다.

두 번째 포인트는 하마터면 원내에서 ‘반박(反朴)’의 새로운 구심점이 될 뻔한 유승민 의원을 ‘배신의 정치’라는 표현을 동원해 그야말로 짓밟아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여권 내 불만세력을 향한 박근혜 대통령의 강력한 ‘경고’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후 여당은 전략공천과 오픈프라이머리 등의 방법론을 두고 연일 논란을 이어가게 됐는데, 이게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으로서 얼마든지 다른 정치인들의 생사여탈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촉발된 문제라는 건 따로 해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과 황교안 국무총리, 국무위원 등이 새해 첫날인 1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참배한 뒤 현충탑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이렇게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국내정치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의 ‘위기관리능력’을 갖추고 있고 그걸 발휘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2015년을 ‘최악의 조건’에서 시작해야만 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는 그나마 축적된 통치력을 남긴 상태에서 새해를 시작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야당의 정치력이 부족한 탓이 있다고는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인기가 없는 정책을 밀어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년 총선을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입장이라는 점 역시 이런 평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부분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 ‘위기관리능력’은 어떤 정치공학적 합리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 정치의 특징은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한 여러 경로의 과제를 흔들림 없이 수행한다는 것이다.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아 ‘불통’이라는 말을 듣는 것 역시 이게 원인인 걸로 진단할 수 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경로’와 ‘과제’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혼자 독단적으로 계획하기보다는 그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참모들의 개인기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자임하고 있는 역할은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이를 이루기 위한 참모들의 판단이 관철될 수 있도록 방어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문고리 권력 3인방’을 보호하며 그들에 의존하는 것을 보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합리성’에 ‘정치’가 결여돼있을 경우 오히려 정권이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여건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위안부 문제이다. 한국과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두고 담판을 벌여 내린 결론에는 물론 수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간 박근혜 정부가 추진해온 외교정책의 큰 틀에서 보면 그들이 자평하는 대로 ‘기대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는 협상 결과임이 분명하다.

이것이 ‘기대 이상’이 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 미국의 이해관계에 한일 양국이 종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그간 전통적인 한미일 삼각동맹의 틀에서 벗어나는 형태의 외교 노선을 고수해왔다. 중국과 손을 잡고 일본과 각을 세우자는 게 대표적이다. 위안부 문제는 이것이 ‘과거사’와 관련한 주제라는 점에서 일본과 격렬히 대립하고 있는 중국과 공동전선을 펴는 구실이 될 만한 것이었다.

▲ 새해 첫날을 맞아 1일 오후 서울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비(소녀상)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한일 협상 폐기를 위한 대학생대책위원회가 마련한 '소녀상 의미 해설' 프로그램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정상회담을 통한 관계개선을 요구하는 일본에 공개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이를 외교쟁점화시켰다. 이후 한국과 중국은 실제로 과거사 문제를 고리로 손을 잡고 일본과 대립하는 구도를 스스로 형성해갔다. 2015년 한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을 선언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의 전승절 기념행사에 직접 참석한 것은 이런 행보의 효과를 한계까지 끌어올린 상태였던 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중국해 문제 등에서 중국과 직접 대립하게 된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한미일 동맹의 복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2015년 3월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의 발언 등을 통해 한일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인 위안부 문제의 해결 필요성을 직접 언급하기까지 했는데, 이런 압력 덕에 한국 정부는 마치 한쪽으로 쏠려 올라갔던 시계추가 이제 다른 한 쪽으로 급격히 기울듯 ‘친중(親中)’에서 ‘친미일(親美日)’로 달려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일 양국의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가 긴급한 의제로 다뤄지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위안부 문제의 정부 관련성이나 강제성을 일점일획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식의 평소 지론에서 한순간이나마 일부 후퇴한 듯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 문제를 해결하고 한일 양국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압력으로 작용했던 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진일보’는 위안부 문제를 오로지 외교정책에서 동원할 수 있는 하나의 ‘카드’로만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국내외의 정치에서 위안부 문제는 단지 외교정책의 테이블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로 소비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물론 국내의 전통적 ‘반일감정’의 해소와 긴밀히 연결돼있는 부분도 있지만, 이를 넘어 제국주의 폭력에 대한 반대와 전쟁범죄의 예방 및 세계평화 추구라는 ‘가치’의 문제로 확장시켜야 할 사안이라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를 정부가 의지를 갖고 추진하기 위해서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지지 획득과 연대의사 표명이 기본 전제가 돼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이런 의지를 가져본 일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이번 협상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상정한 어떤 ‘정치적 행위’도 계획하지 못했던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관료의 통치논리만 횡행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즉,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어떤 일들을 애초에 계획하지도 않았다. 위안부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오로지 외교노선의 문제로만 고려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해결하고 싶었던 것은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오로지 한미일 동맹 복구로 태도를 전환하기 위한 명분을 쌓는 것이었을 따름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식의 태도가 박근혜 정부를 위기에 빠뜨린 모든 사안에서 반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역시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에 누적돼온 비합리적 세태가 어떻게 우리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바로 그 시점부터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국민들이 납득하겠는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정치적 계획을 제출하기 위한 준비를 했어야 했다. 언론은 ‘관피아’니 ‘정피아’니를 언급하며 나름의 진지한 분석을 하기도 했다. 이런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정치인과 관료의 기득권을 무너뜨려야 하므로 여기에는 어떤 ‘정치적 결단’이 필요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은 해경을 해체한다면서 사실상 신설된 국민안전처의 산하로 이들 조직을 집어넣는 이상한 조치로 이어졌다. 기득권을 뒤엎고 새로운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는 평소 주장해온 ‘4대개혁’ 등의 추진을 강조하는 정도로 소화됐다. 말하자면 ‘눈 가리고 아웅’인데, 정부가 이렇게 대응한 것은 세월호 참사를 그저 정권에 대한 어떤 ‘악재’로만 사고하고 이의 부정적 효과를 공학적으로 차단하는 데에만 주력한 결과이다. 2015년을 ‘공포’로 물들인 메르스 사태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정권 차원의 어떤 정치적 행위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대응은 그저 대통령의 현장 방문 등 ‘이벤트’로만 채워졌다.

정치의 논리로 말해야 할 정치의 영역에서도 이런 상황은 반복됐다. 1월 1일부로 선거구가 없어진 것의 전후사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거구 획정에 대한 여야 간 협상이 지지부진 한 건 총선의 성과를 통해 레임덕을 방지해야 할 청와대가 단 1석을 잃는 결과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기반인 경북지역의 위상 축소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분위기다.

그러나 협상을 통한 모두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정치의 영역에서 상황을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결국 정권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지금이야 혼란을 틈 타 마치 야당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처럼 여론을 몰아가고 있지만 결국 이게 청와대의 문제라는 걸 상당수 국민들도 체감하고 있다. 때문에 이 문제 역시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입법부 수장인 정의화 국회의장에까지 압력을 행사하는 이해할 수 없는 정치를 보여줬다.

▲ 박근혜 대통령이 31일 청와대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한 신년사에서 "빈틈없는 안보태세로 북한의 도발에는 단호하게 대응하면서 대화의 문은 항상 열어놓고 평화통일의 한반도 시대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에 필요한 것은 공감이다. 상대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으려고 할 때만 정치를 작동시킬 수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과연 무엇에 공감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연속된 발언과 행보를 보면 답답한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 누구에게도 공감하지 못하는 걸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유족들과 메르스 환자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도 공감하지 못했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영혼의 울림이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엔 영혼이 없고, 공감이 없고, 정치가 없으며 이는 결국 ‘무능’으로 이어진다.

이런 현상은 2015년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졌다. 절망적인 것은 2016년도 마찬가지일 걸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2016년 총선은 야권의 지리멸렬 때문에 여당이 승리할 확률이 높다. 박근혜 정권은 내년에도 단기부양책을 총동원해 저물가·저성장을 극복하겠다는 계획이다. 총선에서 승리한 박근혜 대통령은 ‘진실한 사람들’로 국회를 채우고 단기부양의 ‘약발’에 대해선 국회에서 경제활성화 및 노동개혁 관련 법안 처리를 막은 야당에 책임을 돌리며 미국 금리인상과 중국 경기둔화 등의 대외리스크를 핑계처럼 언급할 것이다. 이렇게 2016년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무능·무정치·무공감·무영혼의 통치는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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