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여름 한국 영화계는 참으로 뜨거웠다.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두 명의 감독인 류승완과 최동훈이 각각 <베테랑>과 <암살>로 비슷한 시기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한국 박스오피스에서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강우석의 <실미도>와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가 동시기 개봉 영화 중에 나란히 천만 관객을 달성한 이래 두 번째 벌어진 사례였다. 언론은 이 흥행 기록에 대해 ‘쌍천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 영화는 이로써 2011년 처음으로 국적별 총관객 1억 명을 넘은 이래 5년 연속으로 1억 관객을 달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각에서 지적하듯 이 흥행 성적이 한국 영화의 모든 부분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베테랑>과 <암살>은 나쁘지 않은 대중 영화였고, 이 두 영화가 기록적인 흥행을 달성한 것은 분명 영화의 품질에 견주어 볼 때 아깝지 않은 성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 영화의 흥행은 한국 영화 전체의 성장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한국 영화를 만드는 모든 이들을 북돋아 줄 수 있는 방향일 것인가. 2015년 올해의 한국 영화를 결산하기 위해서는 ‘쌍천만’이라는 흥행 성적표 뒷면에 가려져 있는 모습들을 봐야만 한다.

그 많은 관객들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

▲ 2006년에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개봉 첫 주부터 600여개의 스크린을 확보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2015년 한국 영화에서 첫 주 스크린 600개는 더 이상 놀라운 수치도 아니다.

2006년 봉준호의 <괴물>이 천만 관객을 돌파했을 때 작품에 대한 찬사 발언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도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의견 중 하나는 <괴물>이 배급사인 쇼박스의 힘을 이용해 무수한 스크린을 처음부터 확보했기에 압도적인 흥행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의견이었다. 이러한 의견은 해당 주장을 적극적으로 내세운 이가 영화계의 뉴라이트를 자처하며 목소리를 높인 최공재 감독이었기에 바로 무시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이야기는 앞으로의 한국 영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상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괴물>이 개봉 첫 주부터 600개의 스크린을 잡은 것으로 논란이 되었다면, 2015년 현재 600개의 스크린은 대형 배급사의 블록버스터 영화라면 당연히 확보해야 할 스크린수가 되었다. 2006년 이후 계속 멀티플렉스가 지방 소도시에도 자리를 잡게 되면서 전체 극장수도 증가했지만 그 수는 2006년 1880개 스크린에서 2012년 2081개 스크린으로 200여개 늘어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형 배급사가 자사의 영화를 위해 확보하는 스크린수는 전체 스크린수의 증가에 비교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모양새가 되었다.

2010년 <아이언맨 2>가 개봉 첫 주 921개 스크린을 확보하고, 2011년 결국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과 <트랜스포머 3>가 각각 1024개 스크린, 1409개 스크린을 확보하면서 할리우드 영화가 한국 영화를 잠식한다는 반발 여론이 흘러나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 영화는 직배 영화가 아니라 미국 파라마운트 사와 손을 잡은 CJ엔터테인먼트 측에서 배급을 담당한 영화였다.) 정작 적극적으로 스크린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 작품은 한국 영화가 되었다.

2012년 쇼박스의 <도둑들>과 CJ E&M의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각각 1091개, 1001개 스크린을 확보한 이래 2013년에는 총 3편의 한국 영화가 (쇼박스 <관상> <은밀하게 위대하게>, CJ <설국열차>), 2014년에는 5편(CJ <명량> <수상한 그녀> <국제시장>, 쇼박스 <군도 : 민란의 시대>, 롯데 <역린>), 2015년 12월 28일 현재까지는 무려 7편의 영화가 개봉 첫 주부터 10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하게 되었다. (CJ <베테랑> <검은 사제들> <히말라야>, 쇼박스 <암살> <내부자들> <사도>, NEW <연평해전>) 2014년의 <군도>가 시원치 않았던 것을 제외하면 스크린을 1000개 이상 모은 대부분의 영화는 높은 흥행 성적을 기록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는 향후 멀티플렉스의 특정 영화 편중 현상이 더 심해질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장은 커졌지만, 시스템은 구축되고 있는가

특정 영화의 시장 독식은 어떤 의미에선 시장 전체의 크기를 키우는 것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시장에서 발생하는 수익이 특정 영화에만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 영화 수익 상위 10편이 한국 영화 전체 수익에서 차지한 비중은 2010년 52.1%에서 2015년 12월 말까지 63.4%로 약 10% 상승했다. 이렇게만 따지면 큰 감흥이 오지 않지만, 전체 개봉 영화와 같이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2010년에는 한국 영화가 총 142편이 개봉했고, 2015년 12월 말까지는 한국 영화가 총 252편 개봉했다. 2010년에는 상위 10편이 벌고 간 나머지 48.9%를 남은 132편이 나눠 가졌다면, 2015년에는 나머지 36.6%를 남은 242편이 나눠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피해는 고스란히 배급의 힘이 약한 중소 배급사나 독립, 예술영화 배급사의 것이 되고 만다.

▲ 한국 영화는 계속 성장하고 있으나 그 성장은 모두에게 공평히 돌아가지 못한다. 지난 12월 초에 막을 내린 서울독립영화제 2015의 부대행사로 열린 ‘한국영화 스태프 열린토론’의 현장 사진. (사진제공=서울독립영화제)

그렇다면 대형 배급사들이 벌어들인 수익은 과연 영화를 만든 모두에게 제대로 돌아갔을까. 허나 그렇지 않다. 2015년 3월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14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영화산업노조의 운동 등으로 표준계약서가 도입된 이래 계약서를 쓰지 않고 영화를 제작한 스태프들의 비중은 역대 최저치를 달성했지만, 여전히 평균적인 스태프들의 일 년 소득은 1000만원을 넘지 못하는 이들이 총 70.4%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작비 별로 소득을 분류한 결과에서도 제작비가 50억 이상인 영화의 경우에도 대다수의 제작인원들은 제작기간 동안 한 작품당 1000만원도 안 되는 소득을 받는 상황이다.

동시에 거액을 들인 작품들이 박스오피스에 등장한 이후 관객들에게 혹평을 들어 시장에 참패하는 경우도 속속 보이고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가 바로 돈은 돈대로 쓰고 정작 실속이 없었던 사례의 대표 사례이다. 2015년 롯데엔터테인먼트는 12월 31일 개봉 예정인 <조선마술사>를 제외하고 총 7편의 영화를 개봉했지만 이 중 100만 관객을 넘긴 영화는 민규동의 <간신>에 불과했다. 모든 영화들이 시장에서 참패했고, 특히 120억의 제작비를 들인 <협녀, 칼의 기억>과 70억의 제작비가 들어간 <서부전선>이 수익을 각각 33억과 47억 밖에 거두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CJ E&M 역시 <베테랑>과 <검은 사제들>, <히말라야>로 흥행 몰이에 나서고 있지만 <쎄시봉>, <손님>, <은밀한 유혹>이 흥행 참패를 기록하며 한국 영화의 프로덕션 관리에 대한 강한 의문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고 정부의 영화 정책기관인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가 시스템 구축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물론 영진위가 관여한 영화산업복지고용위원회가 영화 제작 스태프의 복지 문제에 대해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해당 위원회가 영화 스태프의 노동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영화산업노조가 참여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온전히 영진위의 공으로 돌리긴 쉽지 않다. 대신 독립영화 지원 정책을 상의도 없이 개악하거나, 스크린 독점 문제에 이렇다 할 대처를 하지 않아 공정거래위원회가 문제에 개입하게 만드는 등 시장 개선을 위해 제도를 연구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게 된지 오래다.

▲ 영화진흥위원회는 영화진흥법 4조에 나와 있듯이 ‘영화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한국영화 및 영화산업의 진흥’을 설립목적으로 두고 있다. 지금 영화진흥위원회는 대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시장의 독점이 가속화되지만 정작 이를 만드는 스탭이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좋은 작품이 나올 가능성이 줄어들고 이에 대한 감시의 시선도 약해지는 가운데 과연 새해에는 어떤 일들이 찾아오게 될 것인가. 벌써부터 절망을 말하기엔 이르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처럼 계속 영화시장의 거인들을 잡아 쥘 고삐를 만들 생각도 없이 가만히 놓고 있다가는 결국 모든 것이 파괴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2015년, 주목했어야 할 영화들

영화를 만드는 것이 어느 나라든지 쉽지 않지만, 한국의 경우엔 시간이 갈수록 보이지 않는 장벽이 늘어나고 있다. 대중 영화를 만들려고 해도 갑작스레 툭 튀어 나온 개그와 뻔뻔하게 뻔한 신파라는 머니코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고 취향으로 삼은 시간도 짧기에 매니악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흥행과 앞으로의 커리어를 제물로 바쳐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엔 여전히 흥미로운 영화가 계속 제작되고 수입된다. 과연 어떤 작품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게 만들었을까.

<경성학교 : 사라진 소녀들>, 이해영 감독

이해영 감독은 이해준 감독과 공동으로 연출한 <천하장사 마돈나> 때부터 대중영화로써는 결코 쉽지 않은 시도를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파트너였던 이해준 감독이 <김씨표류기>와 <나의 독재자>로 사회의 구석에 몰려있는 이들을 휴머니즘적 감성으로 다루었다면, 이해영 감독은 <페스티발>을 통해서 장르적인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가져왔다. 그런 점에서 <경성학교 : 사라진 소녀들>은 분명 괴이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대체 누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단순한 사회 고발이나 친일파 척결을 넘어 여학교를 배경으로 퀴어적 코드와 히어로물의 감성이 합쳐진 작품을 하리라 생각했을까. 비록 흥행이 아쉽게 뒤따라 주지 못했지만, <경성학교>의 모습은 단순히 무시하기 보다는 시대적인 상황을 자신만의 장르로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큰 시도이다.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감독

매년 그랬지만 2015년엔 수많은 국내외의 블록버스터들이 극장가를 장식했다. 그 중에는 <터미네이터 : 제니시스>나 <판타스틱 4> 같이 너무나도 처참한 작품도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나 최근 개봉한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 같이 흥미롭게 봐줄 작품도 있다. 그러나 올해 개봉한 어떤 블록버스터도 절대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꼬마돼지 베이브>나 <해피피트>로 광기의 블록버스터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고 생각했던 노장 감독은 자신의 작품을 고전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터치를 통해 <매드맥스>의 매니아층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에서도 기록적인 흥행을 달성하는 것에 성공했다. 단순히 액션을 유려하게 연출하는 것을 넘어, 샤를리즈 테론이 분한 ‘퓨리오사’와 같은 캐릭터의 설정과 배치는 직선적인 스토리를 결코 단방향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어찌보면 이 작품은 조지 밀러의 어떤 선언이 아닐까.

<무서운집>, 양병간 감독

조지 밀러 감독이 자신보다 젊은 감독들이 만든 작품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거나 더 뛰어난 작품으로 다시 돌아왔다면, 양병간 감독은 인위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매끈(하려 노력)한 영화들로 가득한 한국 영화판에 키치와 컬트가 무엇인지를 확인시키며 다시 돌아왔다. 지금 다시 봐도 괴이하지만 묘하게 끌리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던 양병간 감독은, 단 한 명의 주인공과 단 한 곳의 장소를 통해서 분명 호러 영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기존의 클리셰를 뒤집는 것을 넘어 완전히 자신만의 스타일로 탈바꿈한 괴작을 만들었다. 모든 부분이 뛰어난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장기 상영되며 급기야 누적관객 1천명을 돌파했던 원인에는 <무서운집>만이 지닌 독특한 센스와 컬트 영화가 한국에서 나오기를 고대했던 씨네필들에게 있으리라.

<베테랑>, 류승완 감독

이미 <베테랑>은 너무나도 많이 회자된 작품이다. <암살>과 동시기에 천만 관객을 달성하며 전국민의 25% 가량이 본 작품이 되었고, 수많은 프로그램을 비롯해 심지어는 부산국제영화제 개최 기자회견에서 마저 황정민의 ‘가오’ 대사가 패러디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테랑>을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면, 간만에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 액션을 표방한 대중영화가 나왔고 결국 시장에서 제대로 먹혔다는 점이다. <죽거나 혹은 다치거나>, <다찌마와 리> 연작으로 키치함을 드러냈고 <베를린>으로 대규모 블록버스터를 문제없이 끝낼 수 있는 능력을 보였던 류승완 감독은 마침내 <베테랑>을 통해 자신이 이전 작품들에서 계속 펼쳐왔던 진면목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에 성공했다.

<팔로우>, 데이빗 로버트 밋첼 감독

요새 호러 영화 팬들은 불만과 불안에 휩싸여 있다. 이미 한국은 호러 영화의 불모지가 된지 오래고, 주목할 만한 작품이 많이 나왔던 해외에서도 매너리즘에 서서히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호러 영화의 새로운 전기가 될 것처럼 보였던 ‘파운트 푸티지’는 더 이상 감흥을 주지 못한다. <쏘우>나 <호스텔> 시리즈를 비롯해 피가 철철 넘치는 고어 영화도 넘쳐나지만 원래 강한 자극이 계속 될수록 더 센 자극만 찾게 될 따름이다. 이러한 와중에 등장한 <팔로우>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호러 영화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영화이다. 작품은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지도 않고, 이렇다 할 자극적인 묘사도 하지 않는다. 그저 알 수 없는 정체의 누군가가 점점 뒤쫓아 오며 짓누르는 압박감을 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영화에 긴장감을 선사하고, 동시에 그 정체에 대한 암시를 통하여 영화의 공포가 현실과 괴리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선 현실 그 자체임을 전달한다. 그렇게 <팔로우>는 기존 호러와 다른 길을 걸어가며 역설적으로 기존 호러에서는 시도나 표현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관객들은 이에 빠져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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