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시리즈는 반드시 1980년대만을 조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응답하라 1988’은 1997년과 1994년을 배경으로 한 전작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그러나 어떤 형식으로든 1988년을 다루는 순간 이 TV시리즈는 1980년대를 다룬 콘텐츠들과 비교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다.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1980년대가 갖는 의미는 여전히 각별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만든 사람은 흔히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여겨진다. 그건 현재의 박근혜 대통령이 그의 생물학적 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어떤 의미로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다수 기성세대의 인식 속에 ‘국부’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독재’를 했기 때문이다. 주식으로 먹어야 할 곡식의 종류에서부터 장례를 지내는 법까지 거의 모든 생활양식을 규정해준 독재자로부터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지난 5월 오후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찾아 박 대통령 영전에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 독재가 ‘궁정동 안가’에서 측근에 의한 살해라는 어떤 희극적 이벤트에 의해 종료됐을 때, ‘포스트-독재’의 시대는 결코 그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표정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 시대는 신군부에 의한 또 다른 독재와 학살로 시작됐다. 독재가 끝난 시대에, 여전히 독재가 이어지고 있는 걸 참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운동’에 투신했고 이 '결단'들은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거름이 됐다. 당시의 직선제 개헌과 1992년 대선을 통한 문민정부의 수립은 군부독재를 뒤로 하고 새로운 역사의 한 장이 열린 듯한 착각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역사의 ‘장’은 여전히 열리거나, 또는 닫히는 중이다. 1980년대가 만든 기틀로부터 여전히 우리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어떤 ‘공적 기여’에 대한 열망을 갖고 사회를 바꿔보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은 이제 기성 정치권에서 중추적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제1야당 내의 소위 486그룹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학생운동 조직이었던 전대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거나 삼민투 따위의 조직에서 이름을 날린 이력을 갖고 있다. 당시 이들은 일본을 통해 들여온 조야한 수준의 원전 번역본 따위로 스탈린주의를 학습하며 한국사회의 근본을 바꿀 혁명을 준비했다. 누구는 대중적 역할을 맡고, 누구는 조직적 실무를 담당하고, 누구는 재생산을 위한 교육에 집중하는 식의 제법 진지한 체계적 역할분담도 연구했다. 전체 학생 사회를 놓고 보면 여전히 적은 비율이었지만, 이런 식의 조직 체계 덕에 상당히 많은 ‘학우’들이 학생운동에 몸을 담을 수 있었다.

우리가 ‘응답하라 1988’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이 당시를 사회적으로 회상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당시 학생운동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아닌, 학생운동을 잠시 경험했다 다시 생활의 세계로 돌아간 수많은 386들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허리'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생운동 경력을 발판 삼아 지금까지도 어디서 ‘한 자리’ 하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한때는 그 정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혁명을 꿈꾼 아름다운(?) 과거를 간직한 채 일상을 살고 있는 이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생각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앞에 놓인 정치적 선택지는 근본적으로 1980년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80년대에는 독재정권과 싸우는 ‘야당’이 있었고, 이에 대한 학생운동 내부의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들을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야당을 지지하는 것은 곧 독재에 항거하는 세력을 지지하는 거였다. 지금도 물론 ‘야당’은 있다. 당시 혁명을 꿈꾸었던 상당수의 386들이 지금도 야당을 지지한다.

그러나 과거 민주화 세력의 후예를 자처하는 오늘날의 제1야당은 10년간 집권하면서 그동안 이뤄낸 것만큼의 실책을 지적받지 않을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만일 역사의 수레바퀴가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간다는 사실을 우리가 전제한다면, 이제 제1야당의 한계를 딛고 미래를 향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이제 등장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단선적 논리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다. 2015년의 정치는 여전히 과거의 독재와 과거의 민주화세력이라는 선택지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 선택지의 바깥으로 의식적으로 걸어나가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롭다’는 포장지를 두르고 있지만 사실은 지루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 낡은 정치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도저히 찾지 못하는 허약한 진보정치 뿐이다.

물론 짧은 시기나마 진보정치가 새로운 대안처럼 떠오르던 시기도 있었다.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겠으나 2004년 민주노동당 소속 10명의 의원들이 국회에 진출한 것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성과였다. 그러나 이 성과는 진보정치 내부의 노선논쟁에 기반한 조직적 분열로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이 불행은 결국 박근혜 정권이 통합진보당을 해산함으로써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이 대립의 한 축을 1986년부터 학생운동에서 다수파를 점했던 소위 NL(민족해방)계열의 문제가 떠받치고 있다는 건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1980년대에 만들어진 정치적 구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이다.

▲ 이정희 대표를 비롯한 통합진보당 전 당직자, 의원단 및 시도당 위원장들이 지난 2월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대한 재심 청구를 추진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러한 ‘정체’는 정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경제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독재 대 민주화’라는 대중정치에서의 대결구도는 경제적 영역에서 ‘국가 대 시장’의 구도로 은근슬쩍 오도된다. 민주화 세력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한동안 독재와 국가, 민주화와 시장을 등치시켜 편리하게 시장주의를 선택해왔다.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대통령 선거는 이 등식에 균열이 나타난 사례지만 이에 대한 반동이 형성되면서 균열은 다시 메꿔지고 있다.

‘국가 대 시장’이라는 이러한 구도는 결국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으로부터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 주도의 수출경제체제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기업을 국가의 의도에 맞추도록 통제하는 동시에 물질적으로 지원했다. 이것은 정권이 기업의 노동자들에 대한 상식 이상의 착취를 용인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추동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이 급격히 증가하고 노동자들의 주장이 ‘정치화’되면서 문제는 복잡해졌다. 전두환 정권 내내 추진된 안정화 정책과 3저호황의 종료까지 겹치면서 국가와 기업 간 관계의 전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가 추구하는 경제 정책과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게 되면서 급기야 '재계'는 자신들이 원하는 국가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직접 정치로 진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 등이 정치권에 진출한 시기(1988년)도 이 때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출마한 것을 결코 한 사람의 ‘이상한’ 결단에 의한 것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헌법 상 경제민주화 조항의 정치적 재산권(?)을 주장하는 김종인 전 수석이 노태우 정권 시기인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았다는 사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즉, 1980년대는 국가가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경제권력이 재계로 일정 부분 넘어가는 시기로 볼 수 있다. 이후 기업은 자신들이 필요할 때에는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주장하면서 국가가 자신들을 통제하려 할 때는 ‘시장의 원리’를 들먹이며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을 방기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던 건 바로 이 상황을 묘사하려 했던 걸로 볼 수 있다. 기업과 국가의 이런 식의 줄다리기는 박근혜 정권에서도 창조경제혁신센터니 청년일자리 창출이니를 둘러싸고 반복되고 있다.

▲ 1992년 8월 당시 김영삼 민자당, 김대중 민주당, 정주영 국민당 대표가 국회에서 3자 회동을 열어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 구도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해야 할 ‘없는 사람들의 정치’는 서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강요된 양자택일의 구도 속에서 국가의 편을 들 수도, 시장의 편을 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의 다수’인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 나라 노동운동의 산 증인인 민주노총은 단지 ‘노동자들의 대표’를 자처했다는 이유 만으로 보수언론에 의해 부당한 폄훼를 당하고 있다. 과거 노동자들의 정치를 ‘맹아’의 형태로나마 만들어낸 당사자인 대중운동은 이제 완전한 붕괴를 눈 앞에 두고 있다.

2015년에 보는 1980년대는, 물론 낡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형성된 것들은 앞의 사례들에서 보듯 우리의 삶을 여전히 규정하고 있다. 좌파들은 백년도 더 전부터 ‘위기’를 말해왔다. 거대한 정치적 냉소주의 속에서 '위기'의 존재는 언제나 추인되지만 동시에 늘 부정된다. ‘헬조선’이라는 고통스러운 단어가 유희적으로 소비되는 건 이런 사례의 대표격이다. 유럽의 어떤 사람은 ‘낡은 것은 죽어가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못한 시기’를 위기로 규정했다. 물론 이런 규정은 다분히 문학적이다. 그러나 1980년대의 영향이 이토록 길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단지 ‘전통’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눈 앞에 닥친 실제적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2015년이 여전히 위기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2015년에 돌아보는 1980년대는 그 시선의 애초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본질적으로 위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이미 1980년대의 언론정책을 돌아보며 언론의 끝없이 지연되고 있는 위기의 현재를 탐구한 바 있다. 즉,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돌리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새로운 체제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이 순간에도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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