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가 명령하는 곳에서, 이제 바람의 비명은
궁전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다.
"여기는 약자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권세가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바람은 소리친다.
-10세기에 활동한 아랍의 세속적 시인인 알마아리의 시

구두가 날았다. 다시 한 번, 미확인 비행물체가 성소를 겨냥해 날아올랐다. 2001년 9월 11일 이래 두 번째였다. 9.11과의 직접적인 비교가 가당키나 한 것이냐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두 행위는 다른 시간대를 날아 오른 하나의 분노라는 점에서 같은 동기를 갖는다. 하지만 이번 행위가 ‘훨씬’ 훌륭하다.

우선, 2001년의 미확인 비행물체가 불특정 다수의 보편 미국을 살상하는 것을 목표로 한 부적합한 비행이었다면, 이번의 비행은 그보다 훨씬 정교한 목표를 갖는 인류애적인 비행이었다. 특정, 미국인 단 1인만을 겨냥한 합리적인 비행이었다. 물론, 아쉽게도 비행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든 이렇게 날릴 수 있다는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 신발은 미국의 최첨단 레이더 장치들이 결코 사전 차단하거나 식별해낼 수 없는 무소불위의 장치이다. 이, 참을 수 없는 경호의 어려움을 백악관은 어떻게 돌파할지 사뭇 궁금해질 뿐이다.

7년의 시간차를 갖는 이번 비행은 또한 문제의 여전함도 확인한다. 이라크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고, 미국에도 흑인 대통령이 등장하는 시대의 변화를 겪고 있지만, ‘근본주의의 충돌(The clash of fundamentalisms)’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인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부시의 패권적 일방주의와는 질적 차원을 달리한다 하더라도 오바마 역시 기본적으로 아메리코필리아(Americophilia, 미국숭배증)의 정체성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어쩌면, 이번 비행은 충돌이 스펙터클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라도 오히려 그 양상은 복잡해질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라크의 젊은 기자가 존재론적인 울컥함과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구두를 던졌다. 자라보고 놀라고 솥뚜껑 보고 또 놀라면 우스워져서일까, 자극에 강해진 국내 미디어들은 이번 사태를 비중 있게 조망하지 않고 있다. 9월 11일의 사태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릴 것 없이 엄청난 미디어의 소용돌이를 낳았던 것에 비해 이번 사태는 가십과 해프닝의 차원에서 간헐적으로 전해질 뿐이다.

▲ 위에서부터 16일자 한겨레, 경향신문, 서울신문 만평.
오히려 눈여겨 볼 점은 이번 구두 비행 사건을 주요 소재로 삼은 만평들이다. 한겨레, 경향신문, 서울신문이 구두 비행 사건을 패러디한 만평을 게재했다. 재밌는 것은 누가 어떻게 구두를 맞는 것이 마땅한가에 대해서는 묘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한겨레 만평(장봉군 화백)은 2mb가 신발을 맞아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아직, 신발은 저 멀리 등 뒤에서 날아오고 있는 중이다. “저항의 대가가 뭔지 '체험학습'이 좀 되지?”라고 물으며 대운하 폭로 연구원과 일제고사 거부 교사를 땅에 묻은 2mb의 등 뒤로 새까맣게 신발이 날아오는 구성이다.

경향신문의 만평(김용민 화백)은 정면에서 이미 날아온 구두를 2mb가 삽을 들고 막는 공수 교대적인 구성을 택했다. 참호에 숨은 듯 2mb 옆에서 반쯤 머리만 내밀고 있는 이는 아마도 2mb의 절친 만수이지 않을까 싶다. 말풍선 역시 ‘이제부터 전쟁이다’는 호전적 문구를 달았다. 대운하 추진을 직접 적어 넣고 그림 하단에 생선뼈까지 넣음으로써 왜 2mb가 구두를 맞아야 하는지를 직선으로 묘사했다.

서울신문의 만평(백무현 화백)은 노선을 달리했다. 구두를 맞아야 할 대상으로 도망가는 민주당을 꼽았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불분명한 수 켤레의 구두가 도망가는 민주당을 쫒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먼저 도착한 구두는 민주당의 뒤통수를 때렸다는 상황 풀이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한겨레는 아직 본격적으로 구두가 날아오지 않은 시점으로, 경향은 대운하가 사실상 확정된 마당에 이미 구두를 던져봤지만 2mb 역시 구두를 막을 수 있는 삽을 들고 있는 상황으로, 서울신문은 진짜 구두를 맞아야 할 대상은 2mb가 아니라 민주당이란 인식이다.

당신의 존재론적 울컥함과 구역질은 무엇을 향해 있는가? 청와대 춘추관 아니면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우리도 구두가 날아오르는 장면을 볼 수 있을까? 이라크의 기자가 던진 구두는 결국 상황을 호도하는 절대 권력의 일방적 통치, 말이 통하지 않는 정치의 무능을 향한 ‘울음소리’였다. 위의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보라. 그리고 미디어의 만평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라.

‘아메리코필리아와 옥시덴탈리즘을 넘어’라는 부제가 붙은 <근본주의의 충돌>을 쓴 타리크 알리는 ‘울음소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울음소리는 신자유주의에 희생된 사람들 모두의 울음소리라고, 정치가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느낄 때 테러가 등장한다고, 테러란 결국 절망과 자포자기의 신호라고. 그래서일까? 나뿐인가? 자꾸 구두가 신고 싶어지는 사람은.

덧붙임> 연구자와 연구가 님이 각기 다른 입장의 댓글을 주신 이후 김용민 화백의 전작들을 면밀한 분석해 본 결과, 만평 속의 인물을 머리가 곱슬어진 정도와 눈꼬리가 쳐진 각도 등등을 고려할 때 박희태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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