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긴급한 상황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연일 나오지 않아도 될 회의에 나타나 ‘사전 구조조정’, ‘대량실업’ 등을 언급하며 위기감을 고취시키고 있다. 15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의 경우 반드시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은 아니다. 절반 정도는 비서실장이 주재한다. 16일 경제관계장관회의의 경우는 좀 더 어떤 의도를 실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이 회의는 보통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주재하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어쨌든 지금이 상당한 위기 국면이라는 것이다. 16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다루고 정부가 발표한 2016년 경제정책방향을 보면 그런 위기감이 상당히 드러난다. 내년 경제정책의 핵심은 전방위적인 단기부양책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정부는 기존 방식인 실질성장률에 새롭게 경상성장률까지 참고하겠다고 밝혔는데 두 지표의 차이는 물가상승률이 포함돼있는지 여부라는 점에서 사실상 공격적인 물가관리를 선언한 것으로 해석된다.

‘물가관리’란 지금까지의 맥락으로는 물가가 오르지 않도록 안정화한다는 것에 가까웠으나 이제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일정 이상 정도로 유지한다는 의미로 변했다. 즉, 저성장·저물가를 부양책으로 극복하겠다는 게 내년 경제정책의 핵심이라는 얘기다. 이를 위해 정부는 연기금과 공공기관의 여유자금까지 모조리 SOC 및 에너지인프라 등에 투자할 계획이다.

미 연준은 현지시간 16일 FOMC 이후 성명을 통해 금리를 0.25%p 인상한다고 밝혔는데, 결국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수출은 내년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의 금리 인상 이후 중국 경기의 둔화나 이외의 신흥국 위기가 닥쳐올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정부로서는 내수부양을 추진하면서 가계부채 등 리스크 관리를 해나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의 위기감은 박근혜 대통령이 반복해서 언급하는 ‘사전 구조조정’과 ‘대량실업’이라는 키워드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정부가 대기업 간 구조조정을 모색하고 있다는 소문이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유통되고 있다. 요약하자면 여러 분야에 걸친 문어발 경영을 지속하지 말고 잘할 수 있거나 이미 잘하는 분야를 중심으로 기업 체제를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의 재벌 체제에서 정부의 이런 주장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제는 오히려 재계가 나서서 이런 흐름을 가속화시키는 분위기다. 삼성이 석유화학, 정밀화학 등의 분야를 정리하고 ‘안 되는 사업은 털고 가자’는 움직임의 선두에 선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결국 기업도 이제 닥쳐올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활성화 관련 법안과 노동개혁5법의 처리를 조급하게 추진하는 것은 이런 맥락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경제활성화 관련 법안 중에서는 특히 기업활력제고법이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다. 이 법은 소위 ‘원샷법’이라고도 불리며 기업 간의 인수합병 절차를 간소화하는 게 핵심이다. 결국 이 법은 기업별 산업별 구조조정을 가속화시키는 어떤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의 입장에서는 앞서 언급한 맥락 때문에 실제 이 법의 효력이 절실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연일 위기감을 조성하는 발언을 경솔한 방식으로 내놓으며 명분을 쌓고 있다. 여당이 언급하는 ‘긴급재정경제명령’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대통령의 행보가 심상찮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부가 경제위기의 근본적 해소를 모색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지금까지의 현실에서 찾아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기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시한부’로 작동할 수밖에 없는 한도 내에서 제출되고 있다. 올해 블랙프라이데이 등 내수진작책은 경제 성장의 ‘마중물’로 삼겠다는 명분으로 다소 억지스럽게 진행됐다. 괜히 공휴일을 축제 분위기로 만든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그러나 가계소득의 증대가 없는 상황에서의 소비 유도는 ‘절벽’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결국 가계 입장에서는 다음 달에 쓸 돈을 당겨서 미리 쓴 것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내년에도 이런 방식으로 내수활성화를 시도한다고 한다. 이게 성장의 마중물이 되는 게 아니라 곧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걸 경제 관료들이 모를 리가 없다. 추가적인 대안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가계부채 관리도 그렇고 그저 하느라 하는 척일 뿐 위력을 발휘할만한 정책이 사실상 없지 않느냐는 평가가 계속된다는 건 우려스러운 지점이다.

▲ 17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중장기전략위원회 제5차 회의에서 민간위원장을 맡은 김인호 무역협회장이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모두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결국 선거를 의식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단기부양책으로 경기의 온도를 잠시 올려놓은 이후에 ‘미국의 금리인상과 중국의 경기둔화 등 대외리스크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권의 경제팀이 현명하게 대처해 이 정도는 유지하고 있으며 야당은 그동안 발목이나 잡아왔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우겠다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내년 총선 때까지 유지된 긍정적 신호가 꺼지면 대외리스크를 언급하거나 야당 탓을 하면 되니 상당히 편리한 논리다.

청와대가 ‘국가비상사태’를 언급하며 정의화 국회의장과 대립하는 것은 앞의 맥락을 둘러싼 정치적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한 행보일 수 있다. 만일 국회와의 극단적 대립 끝에 대통령이 긴급명령권을 발동하게 되면 제대로 일하지 않는 국회를 짓뭉개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대통령의 결단이 재조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나 국회에 대한 일방적 무시라는 맥락에 민감하게 반응할 유권자는 애초에 야당의 지지자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퍼져있는 정치적 냉소주의는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력과 추진력에 환호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손해를 보는 건 힘없는 사람들뿐이다. 두산인프라코어의 예에서 보듯 기업 간 인수합병으로 인한 여러 문제들은 결국 직원들에 대한 정리해고라는 결과로 돌아올 수밖에 없고 무리한 단기부양책의 반동효과로 인한 고통도 서민층에 맨 먼저 가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 경제정책에서 이러한 미필적 고의의 책임은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한 칭송 속에서 엉뚱하게도 야당의 책임인 것처럼 묘사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비상사태’라는 청와대와 정부 여당의 주장은 그게 실제로 가리키는 실체적 진실이 있다고 해도, ‘없이 사는 사람’의 일원이라는 입장에선 괘씸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가다가는 이런 현실이 어느 경로로도 정부 정책과 정치권의 이후 행보에 반영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언론이 앞에 나서서 이 ‘괘씸함’을 대변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이 노동을 소외시키고 기업과 정부의 야바위로만 짜놓은 이 정책을 국회를 통해 보완하게 하던지, 아니면 최소한 국민을 향해 읍소라도 하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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