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충남 예산의 작은 산골 마을에 사는 20대 농민이다. 12월의 첫째 날, 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작년 6월 10일에 참여했던 세월호 추모행진에 관련한 재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선고만을 남겨둔 마지막 재판이었기에 마음이 홀가분했다. 동네입구에 다다라 벨을 누르고 내리려고 하는데, 이제껏 마을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젊은 여성 두 명이 버스정류장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별 생각 없이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려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아까 정류장에 앉아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김수로 씨가 맞냐고 물었고, 난 그렇다고 답했다. 그들의 옷깃 사이로 공무원들이 흔히 차는 파랗고 넓적한 목걸이 줄이 보였다. 며칠 전 내가 집에 없을 때 경찰이 찾아왔었다는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고, 난 그들이 또다시 찾아왔음을 알았다. 그들은 나에게 경찰서로 가자며 체포영장을 디밀었다. 그저 출석요구에 응하라고 닦달하러 온 줄로만 짐작했는데, 체포라니.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스타렉스 한 대와 남자 경찰관 두엇이 길 건너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안 간다고 저항하니 수갑을 채웠고, 그들과 다투는 동시에 주위에 있던 동네 주민 분들의 당혹스런 얼굴을 보아야했다. 결국 난 순순히 스타렉스에 타 예산경찰서로 갔다.

나에게 붙은 죄명은 ‘공공물건손상’이었다. 지난 11월 14일에 있었던 1차 민중총궐기 때 경찰 버스를 끌어내기 위해 묶었던 밧줄을 잡아당겼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경찰은 나로 추정되는 채증사진 여러 장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밧줄을 당겼단 증거로 내민 사진 속 나는 마스크를 쓰고 우비를 입었으며 고개는 약간 숙인 채였다. 함께 밧줄을 당겼던 수백 명의 사람들 속에서 눈만 드러나 있는 그 사진을 보고 나를 체포해 온 경찰의 솜씨가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난 조사를 받은 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말 그대로 기대에 그쳐 홍성 경찰서 유치장에 입감되었다. 유치장에 들어온 것은 세 번째였으나 이전보다 마음이 훨씬 무거웠다. 머릿속에선 체포 영장 사유란에 쓰여 있던 ‘수사기관의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을 우려가 있다’라는 말이 맴돌았다. 경찰이 우리 집에 처음 찾아왔던 날, 난 경찰과의 통화에서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출석요구서 한 통 없이 집에 불쑥 찾아왔던 것과, 그저 거주지를 확인하려 찾아왔다는 그들의 답변에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또한 집회 참가자들에게 마구잡이로 카메라를 들이대어 건져낸 채증사진으로 ‘네가 집회에 참석한 것 같으니 와서 조사를 받으라’라는 경찰의 부당한 행태에 응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난데없이 유치장에 들어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집도 아닌 버스정류장에서 내가 오는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었다니. 나는 살인이나 강간 등의 중범죄를 저지른 수배자 신분도 아니었고, 산골짝에서 외출도 자주 하지 않으며 소나 몇 마리 키우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런 나를 집회에 참가했단 이유만으로 집에 연락도 없이 들이닥치고, 나의 동선을 파악해 경찰서로 체포해왔다는 게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당시 조사를 하던 경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니 경찰은 이렇게 답했다. 이해를 하고 말고를 떠나 받아들여야 한다고.

▲ 14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 인근에서 민주노총 등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개최한 정부 규탄 '민중총궐기 투쟁대회' 참가자들이 행진도중 차벽을 무너뜨리려 하자 경찰이 캡사이신과 물대포 등을 발사하고 있다. 이들은 집회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과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규탄하고 청년실업, 쌀값 폭락, 빈민 문제 등의 해결책 마련을 요구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경찰과 법원이 집회참가자들에게 남발하는 출석요구서와 체포영장에 순순히 고개를 수그리며 제 죄가 큽니다, 하고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상식이나 양심, 정의 같은 것이 이미 모래처럼 잘게 부스러진 나라에서 우리의 삶이 더 잘게 부서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해 뜨기 전에 집 나와 한밤중에 돌아가야 하고, 정규직까진 감히 바라지도 못한 채 재계약에 목 맬 수밖에 없고, 햄버거 하나 간신히 먹을 수 있는 최저임금조차 못 받는 일을 비일비재하게 겪는 노동자들이 무엇을 더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2천만 노동자의 삶을 더 쉬운 해고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밀어 넣는, 수입농산물을 마구 들여와 농민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이 나라가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저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체포된 다음 날 늦은 저녁, 검사가 유치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집회‧시위 관련 사건을 많이 다뤄본 적이 없는 듯했고, 민중총궐기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검사가 묻는 것에 사실대로 대답했고,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을 때 현재 농장을 돌보고 있는 나에게 어떤 어려움이 생기는지 이야기했다. 사건을 들춰보던 검사는 왜 밧줄을 당겼는지, 광화문에서의 집회가 신고 된 집회였는지 등에 대해 물었다. 당시 경찰버스는 시위대가 광화문 광장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세워졌던 것이고, 경찰이 정당한 집회를 무리하게 막은 것이라고 답하니 뒤이은 검사의 말이 걸작이었다. “근데 경찰이 정말 그렇게 무리하게 했을까요? 그렇게까지 하는 게 가능할 것 같지가 않은데...”

난 이게 무슨 순진한 소린가 싶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까지 하는 게 가능했겠냐고? 가능했다. 11월 14일 서울 한복판, 헌법이 보장한 집회의 자유니 민주주의 국가니 하는 것들은 그곳에 없었다.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이 곧 법이었고, 그 아래 있던 차벽과 물대포는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온당하게 국민들을 탄압했다. 그 자리에 모였던 13만 명의 민중들은 국민은 고사하고 사람조차 되지 못했다. 70대 농민을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했던 그곳에서, 다친 이를 실은 구급차 안에 물대포를 쏘던 그곳에서 최소한의 상식과 도덕적 양심은 그야말로 우스운 무엇이었다.

면담을 마친 다음 날 아무리 기다려도 석방 소식은 오지 않았고, 이틀 전 체포되었던 시간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초조해졌다. 세 시 반쯤 되었을 때, 유치장 간수는 구속영장이 청구되었고 내일 아침에 영장실질심사가 있을 거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때부터 시간은 참 느리게 갔다. 변호사님이 보여준 구속영장 청구서엔 검사와의 면담에서 했던 얘기들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이럴 거였으면 도대체 나는 왜 찾아왔던 것인가 싶었다. 구속 영장 사유엔 내가 1차 조사 때 진술 거부를 했다는 이유로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쓰여 있었고, 그걸 보고 왜 경찰이 2차 조사를 하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난 유치장에 있는 내내 2차 조사를 받지 않았는데, 그저 검사와 직접 이야기를 했으니 굳이 조사를 더 할 필요가 없나 보다 라고만 생각했다. 경찰은 구속 영장 청구 사유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야 했고, ‘혹여나 내가 순순히 혐의를 인정해선 안 되니’ 조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날 오후 내내,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오지만 참 별 생각을 다 했다. 번호가 쓰인 누런 옷을 입고 구치소에 들어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고, 구속됐다가 석방될 즈음엔 우리 집 새끼강아지가 다 커서 날 알아보지도 못 하겠다 하는 생각도 했다. 구속이 안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한편으론 그 마음과 많이 싸우기도 했다. 탄압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질수록 앞으로의 활동에 있어서 움츠러들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아득해질수록 부당한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몇날 며칠을 굶다가 병원에 실려 간 사람들과 뼛속 깊이 추운 겨울날 높은 탑에 오르던 사람들, 오래 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탄압을 받고 징역을 살았던 어머니 아버지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네들처럼 강해져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유치장 꼭대기에 붙어있던 창문이 심하게 덜컥일 만큼 바람이 불던 그 날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영장실질심사를 받았다. 다행이도 변호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도움과 지지 덕에 구속영장은 기각되었고, 난 유치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석방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바로 다음 날 마치 바통 터치라도 하듯 아르바이트노동조합의 이혜정 동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경찰의 이러한 막무가내식 체포가 계속해서 이어질 거란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유치장 안 TV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던 주요 지상파 방송 3사와 종편채널의 뉴스가 떠올랐다.

뉴스에선 1차 민중총궐기 때의 모습과 조계사에 있던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나타났고, 그 앞엔 어김없이 ‘폭력시위대’란 칭호가 붙어 있었다. 쇠파이프를 들고 있던 참가자의 모습은 하도 여러 번 나온 통에 난 그가 입었던 우비 색깔까지 외울 지경이었다. 정말 우스웠던 것은, 쇠파이프와 한 테이크 안에 등장했던 물대포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뉴스 속 앵커와 기자들, 패널들의 눈엔 물대포라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들의 머릿속과 네모반듯한 화면 안에서, 무자비하게 발사되었던 최루액과 그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백남기 씨의 존재는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마치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혁이라는 찬란한 이름 속에서 철저히 지워진 노동자들의 삶처럼 말이다.

그리고 세계인권의 날이라는 12월 10일,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로 싸워왔던 한상균 동지가 조계사에서 나와 천여 명의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체포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사측의 부당해고 이후 77일간의 옥쇄파업과 3년간의 징역살이, 출소 후 돌입한 고공농성 등 보는 이로 하여금 먹먹한 투쟁의 세월을 보냈던 그였다. 7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가 겪었을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서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런 그가 이 나라에서 머물 수 있는 곳이 또 다시 감옥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 냉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그와 함께 걸어왔던 길을 계속해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잘게 부스러진 우리네 삶을 다시 단단하게 잇고, 모두의 삶의 터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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