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차례의 ‘민중총궐기’ 집회가 진행됐다. 박근혜 정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수단을 동원해 이에 대응했다. 시위대의 자유로운 이동을 봉쇄한 차벽의 존재나 백남기 씨를 중태에 빠뜨린 물대포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박근혜 정권의 특별한 점은 집회에 대한 탄압을 전방위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반복해서 IS와 ‘복면’을 언급하고 있는 건 대표적 사례다. 그 어떤 대통령도 해외의 테러리스트의 존재를 인용해가며 자국 내에서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시민을 모욕한 일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 반복되자 수사기관은 곧바로 성과를 내기 위해 움직였다. 경찰의 2차 민중총궐기 집회에 대한 금지통고와 복면을 착용하고 금지된 집회에 참가할 경우 가중처벌한다는 검찰의 방침은 이런 맥락이 반영돼있다. 만일 사법부가 2차 민중총궐기 집회 금지 통고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가면을 쓴 군중과 경찰력이 대대적인 물리적 충돌을 겪는 악몽은 현실이 됐을 것이다.

기성 언론에서 크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수사기관이 집회 참가자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 역시 하나의 특징으로 꼽아볼만하다. 노동운동단체나 시민단체 소속의 활동가가 경찰 수사에 대한 출석요구서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곧바로 연행되는 사례가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다. 세간에는 노동조합 밀집지역에 대한 경찰의 저인망식(?) 수사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주장도 등장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이러한 움직임은 물론 그들이 가진 이념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사태를 이러한 관점 하나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어찌됐건 대통령에게 조언하며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들은 스스로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공안통치’와 연관된 박근혜 정권의 상식 이하의 행위들은 꽤 기능적인 데가 있다.

이를테면 이제 몇 개월 안으로 다가온 총선 일정을 고려해 생각해보자. 박근혜 대통령은 8일도 IS와 테러를 언급하며 국회에 책임을 떠넘겼다. 테러방지법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면 발목을 잡고 있는 야당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건 억지라며 웃고 말 일이 아니다. 실제로 4개월 안에 원인이 불분명한 무슨 사고라도 일어나면 여당 지지층 사이에 무차별적으로 유포될 논리의 원형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근 행보는 허무하게 날려버린 임기 2년차의 구멍을 메꾸고 어떻게든 업적을 남기겠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업적을 남기기 위한 개혁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고, 고통은 정권에 대한 인기를 식게 만든다. 아무리 콘크리트 지지층이 버티고 있어도 어떤 순간에 부스러질지 모른다. 그러나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총선에서 대통령의 힘이 마지막으로 확인되어야만 한다. 만약 총선에서 꺾이면 이제 남는 것은 레임덕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총선에서의 승리를, 개혁을 병행하며 쟁취해야 한다. 그러니 청와대의 정치공학자들 입장에선 오직 한 석도 허투루 잃지 않기 위한 전방위적 ‘작전’을 고안해내지 않을 수 없다. 노동운동단체나 시민사회단체의 대형집회를 ‘폭력’으로 몰아가기 위해 IS까지 동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제2차 민중총궐기 대회 참가자들이 5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대회를 마치고 백남기 농민이 입원 중인 서울대 병원을 향해 무교동 일대를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즉,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라는 질문은 이미 박근혜 정권의 정략적 한도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역대 정권의 집회 시위의 자유에 대한 훼손 역시도 유사한 의도에서 자행됐을 거라는 직관 역시 가져볼 필요가 있다. 결국 정권은 늘 폭력적인 집회의 양상을 규탄하지만 그런 ‘장면’과 권력이 공생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한탄한다. 언론은 집회참가자들이 내건 ‘요구’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고 오직 폭력적 시위 장면을 전시하는 기능만을 충실히 구현한다는 이유다. 이건 반만 가치있는 지적이다. 당연히 언론은 지금보다 더 신의성실하게 집회의 본질을 취재하고 보도해야 한다. 그러나 언론이 이렇게 밖에 하지 못하는 원인을 언론 밖에서 찾아야 할 필요도 있다.

거의 모든 혁명적 순간에, 그 전까지 선도적 역할을 하는 듯 했던 정치세력들은 오히려 대중의 흐름을 뒤쫓아 가기 바쁘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서의 경험이 이를 방증한다. 우리의 사례로 본다면 1987년 양김의 분열과 소위 운동권의 쇠락 역시 이런 맥락으로 해석할 만 하다. 제1야당과 진보정당이 유능, 경제, 안보, 중도, 점진, 현실, 운동이 아닌 정치를 단지 외치고만 있는 사이에 거의 10만에 이르는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세상에 전하려 한 것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민중총궐기 집회의 본질이 폭력이냐 비폭력이냐의 소모적 구도에 흡수돼버린 것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노동개악 반대’라는 구호와 요구가 충분히 정치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물론 이 사안을 다루는 언론이나 전술을 짠 집회 주최 측의 책임도 있겠으나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정치가 대중의 흐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서 시작되는 문제이다. 비감을 안고 말하자면 광화문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서며 보수언론에 의해 ‘폭력’으로 해석될 몸짓을 보인 수많은 군중들은 그야말로 나라 잃은 백성의 처지다. 그들의 존재를 책임지겠다고 나설 수 있는 정치세력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또다시 정치의 문제다. 정치가 대중의 요구를 소화하지 못하고 폭력이냐 비폭력이냐의 의미없는 물음에 그들을 방치할 경우 고개를 드는 것은 냉소주의다. 거리에 직접 나서 목소리를 높여도, 훌륭해 보이는 정치인에 대한 지지활동을 해도, 투표장에서 좋은 정당에 열심히 투표를 해도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체감한 대중은 기득권에는 늘 좋은 먹잇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간은 결코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권의 정치는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한가한 전략전술을 열심히 종이 위에 그려보는 게 아니라 광장에 나온 저 시민들을 스스로 책임지겠노라고 결단하고 나서야 한다. 폴리스라인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고 물러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직접 집회 장소에 나와 인간방패 역할을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결국 좋은 내용을 갖고 승리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긴 어려운 이 길을 끝내 찾는 것만이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수호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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