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인터넷에서 가장 화제가 된 신문의 글은 <간장 두 종지>라는 제목의 칼럼일 것이다. 조선일보 한현우 기자가 작성한 이 글은 조선일보 주말판 지면에 실려 있다. 혹시나 보지 않았을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중국집에 가서 4명이 탕수육을 시켰는데 간장 종지를 2개 밖에 주지 않아서 화가 났다는 얘기다.

▲ 조선일보 28일자 칼럼

한 마디로 ‘황당하다’는 반응이 다수다. 지면 사유화라는 비판도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뼈아플만한 것은 이런 행동이야 말로 ‘사이비언론’이나 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정부와 언론계 안팎의 주요 인사들은 그간 5인 미만 인터넷 신문들을 겨냥해 ‘사이비언론’ 문제를 제기해왔다. 국가기간통신사인 연합뉴스도 이 문제로 특집기사를 쓸 정도였다. 제대로 된 언론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일군의 무리들이 인터넷신문이라는 탈을 쓰고 기사를 무기로 기업이나 관공서를 협박하고 있다는 게 ‘사이비언론’이란 개념이 주장하고 싶은 바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오히려 조선일보 기자와 중국집의 관계를 두고 설명하는 게 더 어울린다. 간장 종지를 2인당 1개 밖에 제공하지 않는 중국집이 어디인지를 사실상 지목함으로써 상당한 피해를 입히려고 시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집 주인의 입장에서도 세계에 단 4명밖에 없는 어떤 불행한 인터넷신문의 기자보다는 ‘1등 신문’ 조선일보의 기자를 더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만일 조선일보의 기자가 글에서 공언한 바와는 다르게 이 중국집에 다시 방문한다면 어떻게 될까? 주인 입장에선, 군만두를 시켜도 탕수육을 서비스로 줘야 할 판이다. 이 사례 뿐 만이 아니다. 유력 언론사 소속 기자들이 동네방네 무슨 ‘갑질’을 하고 다녔다는 전설 같은 무용담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일개 중국집에 이런 태도인데, 대기업이나 정부 중앙부처에는 어떻게 하겠는가? 결국 ‘사이비언론’이란 일종의 핑계에 불과했다는 게 이렇게 드러난다.

한 발 나아가면, 이 글은 한국사회에서 언론이 처한 위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간장종지를 2인당 1개만 주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면 언론은 그걸 진지하게 다룰 수 있다. 이 사례에서 언론(이 글은 문화면에 배치됐다)이 제기해볼만한 문제는 오히려 탕수육을 간장에 찍어먹을 필요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탕수육은 돼지고기에 튀김옷을 입힌 후 소스를 끼얹거나 볶아서 내놓는 음식이다.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형태라는 뜻이다. 정석대로 하자면 이걸 간장에 찍어먹는 행위 자체가 예외적인 것으로 다뤄져야 한다. 만일 그 탕수육이 간장에 찍지 않으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없다면 그건 고기와 튀김옷에 제대로 간을 하지 않은 탓이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선 으레 사람들이 탕수육을 간장에 찍어먹을 것을 예상하고 간을 덜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성의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비슷한 예로는 볶음밥이 있다. 최근의 많은 중국집들이 볶음밥에 간을 사실상 하지 않는데, 추측하기로는 다들 짜장 소스를 곁들여 먹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짜장에 밥을 비벼먹을 거라면 계란을 넣고 볶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그 수고로 인한 맛의 성과는 짜장 소스에 가려져 크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 역시 정석대로 하자면 간이 잘 된 밥과 재료를 그저 잘 볶으면 되는 문제다.

즉, 신문이 문화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싶다면 차라리 중국음식의 현재에 대해 논해야 한다. 간장 종지를 2인당 1개 밖에 주지 않는 중국집의 방침에 대해서도, 그게 문제라면 취재를 했어야 한다. 간장이 비싼 게 문제인지, 간장조차 아껴야 할 정도의 건물 임대료가 문제인지, 손님이 탕수육을 간장에 찍어먹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그냥 주방의 편의를 위해서인지…. 물어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은가.

한국 사회 언론의 비극은 ‘1등 신문’ 조차 이런 접근을 제쳐놓고 “안 가기로 했다”며 소비주의적 대응을 택했다는 것에서 배가 된다. 앞에서 다룬 ‘사이비언론’ 문제를 미뤄놓더라도, 조선일보의 이런 행태는 대중이 언론을 비토하는 방식을 그대로 닮아있다는 점에서 자기파괴적이다. 언론‘소비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사와 기자에 대해 “안 산다”고 말하고만 마는 것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얘기다.

언론의 존재이유는 권력을 감시·비판하고 공론을 조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언론이 제기한 문제를 독자가 ‘논’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이를테면 독자가 자기가 보는 신문에 대해 논조나 관점이 잘못됐다거나, 사건의 내용을 왜곡하고 있다거나, 취재가 부실하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독자와 언론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이다. 어쨌든 그건 언론의 근본적 목표인 ‘공론’을 조성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가 그 신문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안 보겠다’는 선언(이 선언의 실제 내용은 ‘안 산다’에 가깝다)을 하는 것은 언론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근본적 실패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최근의 우리 사회는 어떤 문제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식을 말하는 것 보다 ‘안 산다’는 소비주의적 선언을 선택하는 행위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이런 선언은 정치와 언론에 대한 냉소주의를 부추겨 결과적으로 기득권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는 경우가 많다. 기자가 나름의 고민을 담아 기사를 쓰더라도 “한겨레가 원래 야당 편이지 뭐”, “조선일보? 늘 여당 편드는 거지”라는 비웃음을 흘리며 판단을 중지해버리는 경우가 다수다.

자기편에게는 무엇을 하든 환호를 보내고 ‘적’이 어떤 생산적인 일을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세태 속에서 고전적 의미의 언론이 설 자리는 없다. 이런 비극은 정치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논조와 관계없이 언론은 존재적으로 이런 유행에 저항해야 한다. 기자 스스로가 문제의식을 갖지 않으면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조선일보의 이 작은 칼럼이 유감스러운 건 이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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