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전이었다. 사무실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삼단합체 김정남>이라는 소설 말입니다. 그거 표절 아닙니까?"
"네?"
"<삼단합체 김창남>이라는 웹툰은 보셨어요?"
"네, 보긴 했습니다만..."
"내용을 확인해봐야겠지만, 제목부터 표절이잖아요"

살짝 각색을 거치긴 했지만, 실제로 있던 이야기다. 일하고 있는 기관에서 작은 문학상을 운영하는데 올해 소설부문 선정작 제목이 <삼단합체 김정남>이었다. 작가에게 넌지시 이야기했더니, 그 만화는 알지도 못했다며 펄쩍 뛰었다. 설령 알았다손 치더라도 무슨 문제일까. 하일권 작가의 웹툰 <삼단합체 김창남>은 제목과는 달리 합체 이야기가 끝내 나오지 않는다. 반면 소설 <삼단합체 김정남>은 노동시장에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세 명의 등장인물이 한 인간으로 합체한다는 이야기다. 웃프다. 웃기고 슬픈, 아니 웃겨서 슬픈 이야기다.(소설 전문은 부천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웹툰과 단편소설이라는 장르적 차이는 둘째 치고 전혀 다른 내용과 구조를 가진 이야기에 우연히 유사한 제목이 달렸다고 해서 그것을 표절로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처사다. 이건 누가 봐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아래 경우는 어떨까?

▲ 공유인으로 사고하라(데이비드 볼리어 저,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맥도날드는 오랫동안 식당의 이름에 맥(MC)이라는 접두사를 쓰는 것을 막아왔다. 이것은 비단 미국 내에서 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맥헤어(McHair)’라는 이름을 쓴 베트남의 미용실, 몬트리올의 ‘맥콘돔스(McCondoms)’, 덴마크에서 핫도그를 팔던 ‘맥알렌(McAllan)’ 등이 맥도날드와의 소송에서 패해 간판을 바꿔야 했다. 맥도널드와 무려 8년간의 법정 소송 끝에 이름을 인정받은 말레이시아 ‘맥커리(McCurry)’의 풀네임은 '말레이시안 치킨 커리(Malaysian Chicken Curry)'다. 상표권이란 이름으로 막무가내로 지역에서 통용되어 오던 이름들을 밀어내는 행위는 개탄스러운 일이다. 언어는 인간이 오랜 세월동안 가꿔온 풍성한 공유지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맥도날드를 포함한 기업들이 상표권을 과도하게 행사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인클로저다. 인류 공동의 재산에 말뚝을 박아 이권을 챙기는 파렴치한 행위다.

남의 나라 일 아니냐고, 말 몇 마디쯤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공유[재]에 대한 약탈은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다국적 기업들은 토지, 수자원, 어자원, 삼림자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든다.

“전세계에서 비슷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목재 회사들이 공유림을 훼손하고, 정유 회사들이 원시 황야에서 시추를 하고, 대규모 트롤선이 연안 어자원의 씨를 말리고, 다국적 생수 기업들이 지하수를 고갈시키고 있다.”(71쪽)

대학과 학문이라는 공유[재] 역시 기업들의 침탈에 취약하다. 대학에서의 연구는 더 이상 공공선을 위해 진행되지 않는다. 이제 대학은 산학협력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이윤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주제를 선택하고 결과를 선별해 공개한다. 사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사례들은 전혀 낯설지가 않은데, 그만큼 한국 역시 집요한 이윤추구의 메커니즘에 포섭되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육박하는 지점이 세 가지 있었다. 하나는 공유[재]에 대한 개념정의다. ‘공유[재]’라는 역어는 ‘commons’를 물질적 관점에서의 ‘공유재’만으로 규정하지 않기 위한 역자의 노력이다. 데이비드 볼리어는 공유[재]를 관리, 관계, 역사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특히 공동체와 자원남용을 규제하는 합의와 규칙으로 파악한다.

“공유[재]에는 물론 온갖 유형, 무형 자원이 포함된다. 그러나 어떤 특정 공동체가 있을 때 그 공동체가 어떤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 적용하는 일련의 사회적 관행, 가치, 규범이 있다고 보고 이 두 가지가 합쳐진 패러다임으로 정의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다시 말해, 공유[재]는 자원+공동체+일련의 사회적 규약이다.” (40쪽)

이제껏 우리가 공공의 자원을 두고 공유재라 표현한 것과는 다른 종류로 사고하는 이 방식은 공유[재]에 대한 다른 지평을 열어준다. 자원을 관리하는 주체, 자원을 관리하는 사회적 합의나 약속이 전제된다는 이야기는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익숙하지만 오도된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심플한 길을 제시해 준다. 저자는 공유지의 비극을 주창한 생태학자 하딘의 논의를 논파한 엘리노어 오스트롬을 인용하며 존재하지 않는 비극을 존재하지 않았던 자리로 되돌려 준다.

“공유[재]에는 경계, 규율, 사회적 규범, 무임승차에 대한 규제가 있다. 공유[재]는 자원을 지키는 양심 있는 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기꺼이 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존재를 필요조건으로 한다. 하딘은 공유[재]를 "주인 없는 땅"과 혼동한 것으로, 그 과정에서 공유[재]를 실패한 자원관리 패러다임으로 오도하는 우를 범했다.” (51쪽)

또 하나의 인상적인 지점은 공유[재]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인간에 대한 다른 관점, 세계에 대한 다른 해석을 이끌어내는 부분이다. 전통적인 세계관, 흔히 이야기되는 주류경제학적의 관점은 인간이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 경제동물로 취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암묵적으로 삶은 냉혹하고 치열한 싸움이며 경제란 수많은 개인들이 사적인 부와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아등바등하는 일종의 기계라고 본다.(216쪽) 생각해보면 이는 인간에 대한 모욕이다. 인간이 자기주체성을 갖지 못하고 다만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휘둘려 기계적인 판단밖에 하지 못한다는 모욕을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감내해 온 것은 아닐까.

지은이가 책에서 들고 있는 사례들 - 인도 토착 마을 여성들의 공유 종자 운동에서부터 오픈소스의 효시가 된 리눅스, 하와이 서핑 애호가들이 서로 다툼 없이 조화롭게 서핑을 즐길 수 있도록 파도를 공유[재]로 관리하는 관행까지 - 에서 우리는 공유[재]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익을 위해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공감하는 존재인 동시에 성찰하는 주체기도 하고, 공존을 추구하는 동시에 협업과 배려를 아는 존재다. 인간을 다른 지평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야말로, 공유[재]의 가장 강력한 지점 중 하나일 것이다.

세 번째로 인상적인 부분은 ‘국가-시장’ 모델에서 ‘국가-시장-공유[재]’ 모델로의 확장전략이다. 저자는 책에서 자주 국가와 시장의 실패를 언급한다. 국가와 시장은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더 이상 해결의 전망을 보여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가와 시장의 실패를 넘어서는 대안으로서의 공유[재]를 자신만만하게 주장하지만, 구체적인 지점에서는 저자도 머뭇거리고 서성거리는 모양이 느껴진다. 그만큼 국가와 시장은 강력한 장벽이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국가와 시장의 시효는 끝났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시장의 영향력을 무시하거나 도외시하고는 공유[재]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부패한 국가와 잔인한 시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공유[재]의 모델을 국가-시장만으로 규격화된 기존 시스템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어찌 보면,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을 필두로 한 ‘협력적 경제’, ‘착한 경제’, ‘공유경제’가 화두가 되는 지금의 시점과 맞아 떨어지는 논의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은 기존의 시스템에 추가되는 하나의 솔루션으로서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 출발은 공유인으로 사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저자 데이비드 볼리어의 제안이다.

이 책은 공유[재]에 대한 다양한 사례와 기업들의 인클로저 행태, 공유[재]가 품고 있는 인식적 확장의 가능성과 새로운 거버넌스의 추동 등을 통해 공유[재]와 관련한 입문서의 역할을 너끈히 수행해 낸다. 출간 1년 만에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한국에서 번역본이 출간되었고 스페인과 그리스, 중국에서 번역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국가와 시장으로 대변되는 현 시스템이 주는 갈증이 공유[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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