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또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다. 국가적 추모 열기 속에 몸을 맡겨보려는 사람도 있고, 문민정부의 과오를 새삼 강조하며 무비판적 태도를 경계하는 사람도 있다. 본래 숨을 거둔 사람에 대한 뒷말은 여러 형태로 돌아다니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이런 저런 말들은 일반적 차원의 것을 넘어서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는 거의 평생을 정치인으로 살았으므로, 지금 사람들 평가의 성격 역시 정치적인 틀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 틀에서 보면 사람들의 ‘왈가왈부’는 결국 어떤 종류의 정치적 ‘찬반’을 묻는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욕망은 무엇일까? 새누리당 지지자에게는 그들이 내세우는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도식에 들어맞는 인물이라는 점이 작용할 것이다. 자신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신군부세력을 통해 산업화를 이뤘고, 문민정부를 탄생시켜 민주화라는 과제까지 해결하였다는 게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이다.

야권 지지자의 입장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저항한 사람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추모함으로써 이들은 ‘독재 대 민주’의 구도를 현대 정치에 적용하도록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그리 적극적으로 추모하지 않는 사람들의 욕망은 크게 두 가지로 추측된다. 하나는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민주계’에 대해 악감정을 갖고 있는 과거의 민정계, TK지지세력이다. 이들은 조선일보 ‘나도 한 마디’ 같은 공간에 욕설을 쏟아내고 있다.

다른 하나는 문민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거리로 나섰던 ‘운동권’ 출신들이다. 이들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광범한 추모 분위기가 결국 거대양당의 대결구도에 활용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직감할 것이다.

▲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과거의 정치인으로서 이미 정치적 평가를 받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발 딛고 있는 정치세력의 이해에 따른 ‘해석투쟁’을 벌이기보다는 그가 통치했던 한국의 과거를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평가하는 언론의 역할이 절실한 시기다.

김영삼, 김대중 두 전 대통령이 모두 세상을 떠남으로써, 우리가 다시 들여다봐야 할 역사적 순간들이 언제인지가 보다 분명해졌다. 이를테면 1987년 ‘양김’의 단일화 실패 국면과 같은 대목이 그렇다. 직선제 개헌 추진 시기부터 불거진 내각제 문제와 3당합당 시기의 전후사정도 다시 돌아봐야 할 문제다. 바로 이 시기에 지금까지도 우리 정치의 문제를 규정하는 모든 기반이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외환위기에 대한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IMF 구제금융 사태에 대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도 그러한 위기는 반드시 왔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당시의 일부 관료들은 그나마 ‘연착륙’ 할 수 있었던 상황이 ‘경착륙’ 된 데에는 중요한 국면에 경제부처 수장을 교체한 청와대의 책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 한쪽에서는 문민정부의 경제정책 자체가 진단과 처방이 다른 방식으로 한계를 보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1996년 노동법 개악과 이후 김대중 정권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개혁 조치들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조망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문제들이야 말로 언론이 정파적 입장을 떠나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 다뤄볼만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1996년 12월 26일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 의원들이 단독으로 새벽에 노동법 개정안 등을 기습처리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외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추모 분위기에 대해 다시 한 번 성찰해보아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있다. 앞서 이 글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 추모의 정치적 입장에 따른 태도를 논하였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을 추억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목소리는 이를 넘어서는 무언가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김영삼 전 대통령의 특징으로 화끈함, 솔직함, 뚝심 등이 회자되는 것을 보면, 오늘날의 사람들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떤 정치적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것은 사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을 높이 평가한 것과도 어떤 면에서 통한다.

과거 우리 정치에서는 지도자의 결단 하나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정치세력간의 협력이나 공존, 민감한 문제까지 포괄한 정치협상 등이 가능했다. 그러한 정치 풍토가 상도동이니 동교동이니 하는 계파 문제를 만들었지만, 확실히 어느 시기에 국민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가 작동한다는 믿음을 줬던 것도 사실이다. 그걸 믿기 때문에 국민들은 ‘3김’에게 속아 줄 수(?) 있었다.

현대의 정치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정치인이 무엇이라도 결단하기 위해서는 당 내의 분란부터 수습할 방책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끝으로 절대적 권위를 지닌 지도자로서의 정치인 상은 당분간 현실에서 보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어쨌거나 우리 정치에서는 수직적인 것보다 수평적인 리더십이 더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강력한 수직적 리더십을 다시 부활시켜야 하는가? 만일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것 역시 ‘오답’이다.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거목’으로 불리는 정치인들은 모두 자신의 정치를 어떻게든 국민들이 믿게 만들어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치인을 믿지 않는다. 정치적 냉소주의는 날로 그 위력을 키우고 있다. 한때 이런 저런 정치인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을 따라해 보았음에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 의도가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아무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적자’를 자처하며 눈물을 흘려도, 그게 정치적 이득을 구하기 위한 뻔한 수단이라는 구도를 탈피하지 못하는 한 큰 효과를 볼 수 없다. 사람들은 그런 장면들에 냉소하기를 좋아한다.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슬퍼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전형적인 정치적 냉소주의가 지시하는 것처럼 분명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국회의원이 된 정치인들이 있다. 그러나 방법론이야 어쨌든 좋은 뜻을 마음속에 품은 정치인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정치인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절박함’을 냉소를 뚫고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정말로 큰 과제이다. 국민의 입장에선 무분별한 냉소에 속는 게 아니라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정치’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판단할 수 있는 수단과 능력을 갖추는 게 급선무다.

언론은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도맡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언론은 국민들에게 정치를 판단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정치적 냉소주의를 부추겨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을 강화하는 데 골몰한다. 조선일보가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석한 전교조 위원장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인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며 마녀사냥에 가까운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사과한 게 대표적이다.

조선일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난리 통에는 종북이라는 배후가 있다’는 것일 게다. 겉으로 내세우는 것과 뒤로 추구하는 것이 영 딴판이며 그것이 결국 공동체에 해가 될 거라는 전형적인 정치적 냉소주의의 논리다. 일단 사과한 걸로 그들의 시도는 좌절된 것 같지만, 1등 신문은 지더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보수언론이 때만 되면 제기하는 ‘종북사냥’을 가만 두고 보는 것은 우리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스스로 고백하는 것 밖에 안 된다. 3김정치가 그 정치적 냉소주의를 결과적으로 강화했다고 평가한다 치더라도, 우리는 거기서 그걸 극복하는 방법을 여전히 배워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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