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EBS사장이 될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뜨거운 관심은 어떤 사람이 ‘교육방송’이라는 EBS의 정체성을 강화할 것인지, 어떤 부분을 현실에 맞게 바꿔나갈 것인지 등의 생산적 관점에 의한 것이 아니다. ‘과연 이번에도 정권의 코드에 맞는 사람이 사장직에 오르는가’, 이것이 유일한 쟁점이며 관심사이다.

당장 ‘유력시’되는 후보들의 명단이 심상찮다.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대폭 반영돼있는 교학사 교과서를 대표 집필한 이명희 공주대 교수가 공모에 지원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언론이 언급하는 유력 후보 명단에는 유사한 흐름으로 볼 수 있는 류석춘 연세대 교수도 있다. 류석춘 교수는 뉴라이트 단체인 교과서 포럼의 운영위원을 맡은 이력을 갖고 있고 연세대 산하 이승만연구원장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언론계 안팎에서는 이들보다 더 유력한 후보로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을 지낸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를 꼽는다. 양정호 교수는 이번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서 정부 여당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했다. ‘국정교과서 지지 교수 모임’을 만들어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긍정적 여론 조성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모임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지지한다며 연명해서 발표한 성명에 대해 “왜 연명에 참여한 교수들의 소속과 전공이 기재돼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되자 양정호 교수는 “그게 왜 궁금하냐”고 반응했다. 이런 인사가 EBS사장이 될 경우 벌어질 일은 불을 보듯 뻔하다.

EBS는 그 특성 상 다소 실험적인 형식의 콘텐츠를 개발하고 방송하는데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하다. 그러나 양정호 교수가 사장이 된다면 어떤 프로그램은 없어지거나 축소될 것이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를 묻는다면 양정호 교수는 대답할 것이다. “그게 왜 궁금하세요?” EBS에서 ‘이승만 박정희 만만세’라는 내용의 실험적(!) 콘텐츠가 방송될 수도 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면 양정호 교수는 대답할 것이다. “그게 왜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 지난달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교수 모임'이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지지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맨 왼쪽이 양정호 성균관대 교수. (사진=연합뉴스)

보수정권은 거의 7, 8년에 걸쳐 방송장악의 완성을 위해 한 걸음씩 전진해왔다. KBS는 말할 것도 없고 ‘마봉춘’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MBC도 박살냈다. 이명박 정부가 폐허로 만든 자리에 박근혜 정부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납득 불가’의 인사들을 그야말로 ‘꽂았다’. KBS이사장직을 뉴라이트 역사학자가 손에 넣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직에 공안검사 출신이 오를 줄 누가 꿈에나 생각했겠는가? 도대체 이들이 방송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EBS이사장은 이미 박근혜 정권의 초대 교육부 장관을 맡았던 정통 교육부관료 출신 서남수 씨가 맡고 있다. 이제 또 한 명의 ‘뉴라이트’ 내지는 ‘극우인사’를 EBS사장에 낙하산 태워 내려 보내는 것으로 박근혜 정권의 방송장악은 화룡점정을 찍게 될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방송을 장악해야 당장 내년의 총선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방송뿐만이 아니다. 박근혜 정권은 포털을 압박해 검색 및 노출 대상이 되는 언론의 선정에 개입하고, 5인 미만 인터넷신문들은 사실상 폐간 위기로 몰아넣으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종편과 극우 인터넷매체에는 정부광고를 펑펑 퍼줘 5명이 아니라 50명도 고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걸로 내년 총선에서 여당이 그래도 한 180석 정도는 해야 개헌을 할 수 있고, 그래야 ‘선거의 여왕’ 박근혜 대통령의 퇴임 이후에도 TK-친박 진영이 ‘해먹을’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여의도 주변에 심심찮게 돌아다닌다. 더 무서운 것은 당사자들이 이런 시나리오를 굳이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정권의 EBS 장악은 더욱 무서운 일이 된다. 이건 2016년 총선만을 겨냥한 게 아니라 젊은 세대의 미래까지 장악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박근혜 정권이 자유당 정권, 박정희 정권, 군부독재 정권에 대한 향수를 젊은 세대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분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게 옳은 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대다수 ‘없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 허덕였다는 걸 권력이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국제시장> 같은 영화나 틀면서 자기위로나 할 때가 아니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역사적 화해는 그런 체제를 어떻게 반복하지 않을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자는 것이지 독재의 정당성을 추인하려는 절차가 아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최소한의 의지라도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지나온 길보다 가야할 길이 더 먼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EBS사장 마저 정권의 입맛에 맞는 극우인사로 임명해서는 안 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EBS사장에 누가 응모했는지 비공개로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데, 어쨌든 그 중에 분명 중립적이고 교육적인 인사가 포함돼있을 것이다. 정권의 코드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 그야말로 훌륭한 사람이 이 나라의 ‘교육방송’을 이끌어야 한다. 이 사실을 끝내 외면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에 쓴 것은 뱉고 단 것은 삼키는 비겁자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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