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이 중요한 사회다. 다양성에 기반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은 단지 여러 가치를 우리 사회가 존중해줘야 한다는 어떤 당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에 기반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은 만사에 속류적인 상대주의적 태도를 고수 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에 기반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따져보면 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일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다양성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가 진지한 고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전체주의 체제의 실패를 우리 모두가 지켜봤기 때문이다. 계획경제에 기반했던 소련과 집단적 광기를 동력으로 삼았던 나치 독일은 전체주의의 양극단이라 할 만하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을 손쉽게 비판하지만, 대중이 어떤 조건 하에서 그러한 체제를 스스로 지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역시 특정한 조건이 충족된 상태에서 같은 오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이야기다.

▲ 박근혜 대통령이 6일 경복궁에서 열린 한국방문의 해 선포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최근 행보에 우려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신문법 시행령 개정을 통한 5인 미만 인터넷 신문들에 대한 사실상의 공격, 극단적 견해를 가진 인사들의 방송권력 접수 등은 모두 우익전체주의로 가는 하나의 길에서 만난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히 ‘너무 오버한다’고 반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한국은 엄연히 대의제에 의한 민주정치가 구현되는 나라인데, 권력이 좀 자기 좋을대로 했기로서니 전체주의의 부활을 논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오버’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어떤 근본적인 지점에서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전체주의, 집단주의, 국가주의의 맹아들을 꾸준히 키워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국정교과서가 만들어낼 역사의 왜곡을 우려하고 있는데, 우익들의 주장처럼 그 교과서가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문제가 있는 교과서들이 난립하는 판국이니 차라리 하나의 ‘좋은 교과서’를 국가가 나서서 만들겠다고 하는 그 논리 자체는 어떤 사람들에겐 그럴듯해 보이겠지만, 전체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혐의를 벗지는 못한다. 그리고 전체주의는 악당이 하든 천사가 하든 똑같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 그리고 독일 시민들이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에 투표를 하던 그 순간에 볼셰비키나 나치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건 ‘대중이 지지하면 무조건 선’이란 얘기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반박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대중들에게 그 순간만큼은 볼셰비키와 나치가 ‘선’이었고 ‘대안’이었고 ‘올바른 정치’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선택에 의한 역사의 결말은 파국이었다. 이 대목은 우리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게 한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고 지지하고 있는 그 이상적 정치가 과연 국가사회주의나 파시즘과 같은 것이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우리 스스로가 과연 그것을 보증할 수 있는가? 결국 다양성에 기반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은 우리가 요구한 정치가 틀렸을 수 있다는 걸 근본부터 인정하자는 이야기다. 권력과 대중적 합의가 ‘올바르다’고 인증한 어떤 것이 있더라도 그것에 반하는 여러 존재들이 갖는 의의를 늘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5인 미만 인터넷 신문에 대한 권력의 태도에도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저널리즘의 질적 향상을 언급하고 있다. 대다수의 인터넷 신문 관계자들이 정부의 이런 주장을 진정한 ‘의도’를 숨기기 위한 명분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데, 이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정부의 변을 거칠게 다시 요약하자면 평소 5인도 고용하지 못할 정도로 실력없는 언론이 기본도 안 된 기사를 아무렇게나 쓰게 하는 것보다는, 검증된 기자들이 모여 있는 대형 언론사가 정제되고 품격있는 기사만을 쓰도록 하는 게 더 좋다는 것이 된다. 결국 이는 ‘좋은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정권이 자기 입맛에 맞는 이념적 논리를 생산해내는 인터넷 신문을 의도적으로 키워주고 이념적 충성심이 투철한 인물을 공영방송의 가장 윗자리에 앉히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 대목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서 뉴라이트의 개입과 박근혜 대통령의 ‘효심’으로 요약되는 부분에서 닮은꼴로 등장한다.

물론 이런 의문을 제기해볼 수도 있다. 인터넷 신문 등에 무제한의 자유를 줬을 경우 예상되는 부작용도 분명히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실제 황당무계한 논리를 동원해 북한 체제를 거의 일방적으로 선전하던 한 인터넷 신문은 ‘종북’ 딱지를 이마에 붙인 채로 폐간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그런 신문들이 퍼뜨리는 논리에 사상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대중들이 물들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당연히도 가질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인터넷 신문이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선동을 반복하고 있다면 과연 그걸 그냥 내버려 둬야 하느냐는 공격적 질문을 제기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필요한 것은 폐간이나 신문 등록취소가 아니다. 이 상황을 극복하는 올바른 방법은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이 오갈 수 있는 공적영역을 다시 복원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납득할 수 없고 납득해서도 안 되는 주장들을 비판하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구조에 대해 비평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언론은 이들이 소중하게 다뤄질 수 있는 담론의 장을 자처해야 한다. 즉, 사회적 차원에서 다양성은 비판과 짝을 이루지 않으면 애초에 지켜질 수 없는 가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미디어스가 ‘매체비평전문지’를 자처하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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