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를 되살릴 방법이 없듯,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부활이 되었든 시간의 역진이 되었든,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오늘날 이 기적을 일상으로 만들려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국정교과서’라는 추억의 낱말이 언론의 전면에 등장하거나, ‘언론통폐합’을 연상시키는 언론통제작업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 짧게는 30년, 길게는 50년 내지 70년 뒤로 시간을 되돌리려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과거로의 회귀를 보며 회춘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식과 개념이라는 걸 어느 정도 갖춘 사람들에겐 피곤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상식과 개념의 한계 안에서 볼 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기적이 아니라 퇴행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부의 퇴행적 경향이 향하고 있는 목적지는 군사독재시절로 추정된다. 이 추정의 타당성을 뒷받침할만한 상징적인 두 가지 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하나는 11월 5일에 있었던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장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 부결 과정이며, 다른 하나는 11월 3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5인 이하 인터넷 신문 제한조치이다. 이 두 사건은 35년 전 전두환 쿠데타세력이 자행했던 언론학살을 떠올리게 한다.

먼저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한 건부터 살펴보자. 문화체육관광부가 5인 이하 인터넷 언론사의 등록 등을 규제하겠다며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것은 지난 8월 21일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인터넷 신문이 늘어나면서 “과도한 경쟁, 선정성 증가, 유사언론행위 등이 발생”하면서 여론이 왜곡될 우려가 있으므로, 인력충원을 강제함으로써 “기사 품질을 제고”하고 언론으로서 “사회적 책임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번 시행령 개정을 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입법예고 된 시행령 개정안에 대해 이미 각계의 비판이 있었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 공대위는 도대체 5명이라는 숫자는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이냐고 의문을 표했다. 난무하고 있는 인터넷 언론사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광고주협회조차 유사언론이나 사이비언론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다. 한국인터넷기자협회에 따르면, 이 시행령이 통과되고 실질적인 행정처분이 이루어질 경우 물경 85%의 인터넷 매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그 대부분은 지역 언론이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진행한, 소위 ‘K-공작’이라고 명명된 언론통제계획은 ‘사이비, 공갈 언론’의 척결과 “건전언론의 육성과 창달”이라는 명분을 걸고 진행되었다. 가히 ‘언론 국정화’라고 할 수준의 언론통제가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당연히 군사정권의 총칼이 번뜩이던 이때에도 사회 곳곳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동아일보 기자들은 공동명의로 부당한 언론검열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각 언론 기관의 양식과 자율에 의한 자유롭고 공정한 보도논평이 이루어”지기를 요망했다. 비록 동아일보 기자단이 스스로 고백하듯, “비상시국이라는 전제 아래 계엄 당국의 언론검열에 묵묵히 협력”한 과오가 있을지언정, 기자의 양심은 언론에 대한 탄압을 계속해서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총칼을 앞세워 진행된 언론사 통폐합으로 72%에 달하는 방송사와 신문, 통신사가 날아갔다. 172종의 정기간행물은 강제폐간 당했고, 이 과정에 1천여 명이 넘은 언론인이 해직되었다.

방문진이 고영주 이사장에 대한 불신임안을 처리하는 과정 역시 정권의 독단이 언론체제를 좌지우지 하고 있음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35년 전의 상황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미디어스가 생생하게 고발한 지난 5일 방문진 회의과정은 상식과 개념이라는 것이 실종되면 사람들을 얼마나 허탈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이 해프닝이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은 고영주 이사장이 보여준 패기의 배경 때문이다. 매카시의 재림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근거 없는 우익적 발언을 남발하여 구설에 오르고 있는 고영주 이사장이 주위의 호위를 받으며 저토록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현재의 지배세력이 그만큼 강고함을 의미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언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의 권력층은 사회 전반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있다는 것이다.

1980년 당시 언론통폐합을 주도했던 허문도는 본인이 기자출신이었고, 청와대 공보비서관을 역임했을 뿐 군부의 성골이 아니었다. 허문도와 더불어 언론통폐합의 막후에서 칼춤을 추었던 보안사의 이상재는 기껏해야 준위 계급의 하급장교출신이었다. 이들은 전두환이라는 쿠데타의 핵심을 등에 업고 언론을 유린했는데, 그 안하무인의 근거 역시 감히 이 땅에서 누가 군사정권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냐는 자신감에 있었다. 80년대 언론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던 보도지침이나 인쇄소 검열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어떤 제한도 없이 여론을 조작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영주 이사장이 세간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35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 그와 그를 내세운 권력을 제어할 힘이 존재하지 않고 있음을 웅변한다.

언론시스템을 35년 전으로 되돌리는 작업은 개별적이면서 단일한 독립적 사건으로 종결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언론 국정화’ 작업이며, 이 작업은 한 편으로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그 숨결을 이어가고 있는 독재정권 부역세력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다른 한 편으로는 현 집권세력의 영구재집권을 위한 제반조건구축작업의 일환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좌빨’과 노동자세력을 와해시킴으로써 체제도전세력을 분쇄하며, 이를 위해 대중의 눈과 귀와 입을 봉쇄하는 일련의 조치들은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짜여진 종합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 앞에서는 헌법이 천명한 언론출판의 자유나 직업선택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무용지물이 된다. 박정희, 전두환 양자의 쿠데타 정권에서 그러했듯이.

조지오웰이 그린 ‘1984’의 디스토피아에는 진리성(부)라는 기관이 있다. 이 진리성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표어를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기억과 의식은 그리 쉽게 변형되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동원된 오세아니아의 기관이 바로 애정성(부)이다. 애정성의 가혹한 세뇌작업을 거친 사람들은 결국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된다. 윈스턴의 행복은 애정성의 애정을 통해 진리성이 만든 과거를 일체의 진리로 받아들이면서 완성된다.

▲ 윤현식 전 노동당 정책위의장.

한국사회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이 과거를 입맛에 맞게 짜 맞추고, 동시에 체제마저도 과거로 되돌리려하는 이유는 결국 미래를 지배하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경과를 볼 때, 진리성의 역할을 담당할 기관과 그들이 추진하는 사업은 어느 정도 틀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자신감도 넘쳐흐른다. 그리하여 그 다음으로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애정성의 등장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공안기관들의 현실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지만, 오늘 이후 우리는 그 기관들의 넘치는 애정세례를 받은 후 체제와 정부를 사랑하게 될 자신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과거를 지배하고자하는 자들의 보좌를 뒤집어엎지 않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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