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188번지 W컨벤션센터. 10일 오전 10시.

‘세계인권선언’은 60주년을 맞았다. ‘세계인권선언’은 60년 전 파리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이후 그 선언은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라고 불린다. 유구한 인간의 역사라지만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합의에 이른 지 이제 딱 60년이 흘렀을 뿐이다. 올해로 창립 7주년을 맞은 국가인권위원회는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맞아 ‘세계인권선언 6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 12월 11일자 동아일보 25면.
자리는 성대했다. 갓 공사를 끝낸 W컨벤션센터는 화려하고 또 적막했다. ‘명문가 결혼의 전당’이라는 선전이 허명만은 아니지 싶었다. 물론, 확인할 길은 없었다. 금빛 테두리가 둘러진 그 육중한 컨벤션센터의 정문 앞에서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이 직접 손님을 맞았다.

안경환 위원장의 손을 스쳐 차곡차곡 손님들이 입장했다. 민주화 가족 모두의 어머니인 임기란 어머님이 오셨고, 강경대 열사의 아버지인 강민조 아버님이 오셨다. 안경환 위원장의 오랜 지기인 안병욱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 위원장이 왔다. 그리곤 한적했다. 맞을 손님이 그렇게 많아 보이진 않았다. 그 ‘흔한’ 국회의원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악수를 기다리는 안경환 위원장은 애처롭고 위태로워 보였다.

그 시각, 안경환 위원장의 옆으로는 전에 없던 낯선 풍경이 자리를 잡았다. ‘동성애반대국민연합’ 같은 이들이 피켓을 들고 섰다. 그들의 구호는 명확했다. 인권위가 동성애를 조장한다고 했다. 북한 인권을 외면한다고 했다. 정치 편향적인 <시사투나잇>을 옹호한다고 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그 한 장면은 지금 인권위가 마주하고 있는 외로움의 이중성을 명징하게 포획했다. 지금, 인권위는 좌우 사회단체의 협공과 상하 정부조직의 압력을 사방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인권위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제가끔의 상황들이 ‘세계인권선언’의 환갑을 함께 맞았다.

그리고 잠시 후 축사를 하기로 한 김형오 국회의장의 일행이 에쿠스 3대에 나눠 타고 등장했다. 김형오 의장과 안경환 위원장이 입장하는 것으로 식은 시작되었다. 사회는 국가인권위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개그우먼 김미화와 성우 양지운이었다. 식의 내용은 적당히 흥겨웠고 형식은 적당히 상투적이었다.

안경환 위원장이 기념사를 했다. 위원회가 결정한 후보를 행정안전부가 훈장 추천 대상에서 제외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의 독립성에 대해 역설했다. 축사는 김형오 의장이 했다. 인권은 보편적이어야 함을 역설했다. 덧붙여 우리 동포인 북한주민들도 따뜻한 인권의 양지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인권의 독립성과 보편성은 같은 것일까? 기념사와 축사는 엇갈리고 있었다.

기념사와 축사가 끝나자 옆 자리에 앉아있던 기자가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내용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다는 보고였다. 전화를 받은 이는 아마도 데스크였을 것이다. 데스크의 대답은 더 있으라는 것이었다. 데스크는 왜 지루한 기념식에 분주한 기자를 남기는 둔탁한 판단을 했을까? 뭔가 ‘그림’이 더 나오리라는 선견지명이었을까, 아니면 ‘세계인권선언’을 국가기관이 기리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슬픈 예감 때문이었을까.

돌발적 상황이 시작된 것은 몇 곡의 노래가 지나가고 난 뒤였다. ‘대한민국 인권상 시상식’ 차례가 되자, ‘동성애반대국민연합’ 같은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찬성하는 오완호 한국인권행동 사무총장의 수상을 반대한다고 외쳤다. 편향적인 <시사투나잇>에 대한 시상을 반대한다고 외쳤다. 작지만 큰 소동이었다. 물리적으로 숫자가 적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경험이 많지는 않아 보였다. 선명한 구호에 비해 숫기와 결의도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많은 것이 뒤바뀐 세상을 확인하기에 충분한 액션이었다. 인권위는 힘써 막진 않았다.

어쩌면, 충분히 예고됐던 파열은 그렇게 해프닝으로 끝났다. 곧 행사가 끝나고, 오찬이 시작됐다. 행정안전부에게 물을 먹은 안경환 위원장, 신지호의 세치혀에 굴욕을 당하고 있는 안병욱 위원장, 그리고 수상자들 또 그 모두를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던 이들까지. 함께 오찬장에서 밥을 먹었다. 인권위는 애써 그 모두에게 밥을 먹였다. 결국, 그들은 모두 밥을 먹으려 모였다. 그 밥과 함께 ‘세계인권선언 60주년 기념식’은 끝났다.

사무실로 돌아와 아침에 산 빵을 씹으며, 김훈의 책을 펼쳤다. ‘밥’에 대한 단상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 있다고. 밥은 그렇게 개별적이면서 보편적인 것이라고. 12월10일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188번지 W컨벤션센터의 밥 먹는 풍경.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고 새로웠다. 우리는 모두 다름이 없었다. 다만, 화려하고 또 적막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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