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주의의 시대,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에 대한 ‘심판’을 요구받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특히 인터넷 여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많은 대중들이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할 때 오로지 그것의 ‘유·무죄 여부’만을 판단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과연 그게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한겨레의 교육부 광고 게재 논란이 대표적이다. 이 문제에 대해 언론인과 지식인들을 아우르는 일련의 입장 표명이 이어졌다. 어떤 사람은 광고도 지면의 일부라며 독자의 기대를 저버린 언론에 대한 ‘절독운동’을 언급했다. 또 어떤 사람은 “엿 바꿔먹은 것도 아니잖느냐”며 대중의 지나친 비난을 경계했다. 또 어떤 사람은 광고 게재를 거부한 경향신문을 칭찬할 수는 있지만 한겨레를 비난하는 건 지나치다는 입장도 내놨다.

기사가 광고화 되는 것보다는 당연히 광고를 위한 지면이 논조와 별개로 따로 존재하는 게 낫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광고가 갖는 정치적 효과를 전부 ‘논외’로 하자는 것은 안이한 논리다. 거기에는 정도가 있고 수준이 있고 맥락이 있다. 이건 어떤 신문이 자기 논조를 배반하는 광고를 지면에 실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기계적 원칙을 수립하자는 게 아니다. 정권의 주요한 프로파간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의 정치적 문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건 한겨레를 보지 말자거나, 폐간하자거나, 기요틴에 올려 목을 치자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층위의 논의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역사교과서 국정화 그 자체의 문제다. 박근혜 정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다. 애초에 대통령의 지시 자체가 무리수이다 보니, 여당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수행하는 방식도 무리가 될 수밖에 없다. 현행 교과서가 주체사상을 가르치고 있다는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는가 하면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질 좋은 교과서를 만들 생각이라는 ‘뻥’을 반복한다. 그러고도 야당 의원들의 질문에 주무부처 장관과 그를 통제해야 할 총리가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추태를 노출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10월 27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6년도 예산에 대해 시정연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누구도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왜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 문제는 결국 전형적인 정치적 냉소주의의 논리에 따라 재구성됐다. ‘전형적인 정치적 냉소주의의 논리’란 겉으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공적 논리를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자기 사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의 업적(?)을 미화하기 위하여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한다는 식의 주장은 정확히 여기에 들어맞는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같은 친일파의 후손들이 자기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오류를 가리기 위해 이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돌아가는 꼴을 볼 때, 이 주장들은 일정부분 진실일 것이다. 이 일정부분에서 벗어나는 대목의 경우도 보수정치인들로서는 ‘나쁠 게 없기 때문에’ 동조하고 있는 측면이 클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적 정책 이슈인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이런 식으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국정교과서가 문제라면 지금까지의 민족주의 사관에 기초한 역사교육에는 잘못이 없는가? 이 문제는 과연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을 다시 꺼내들게 만들고 있다. 뉴라이트 역사관의 문제를 ‘기득권의 사익 추구’라는 관점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한 발짝의 전진과 다시 한 발짝의 후진을 영원히 반복하는 일일 뿐이다.

JTBC가 드라마 <송곳>을 방영하는 것을 두고도 유사한 논란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무노조 경영’을 사시(社是)로 삼고 있는 삼성가와 총수가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JTBC가 ‘노조를 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드라마를 방영하는 ‘의도’가 무엇이겠느냐고 지적한다. 결국 자신의 보수적 색채를 탈각해 대중을 기만하겠다는 것 아니냐는 반발이다. 반면 또 한 쪽에서는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송곳>이 방영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며 과도한 비난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란은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종편의 일원인 JTBC를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와 맞닿아있다.

그러나 이들이 <송곳>을 방영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종편으로서 JTBC의 성격을 비판하는 것은 양립불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종편에 대한 정책적 반대는 단지 그들이 보수적 시각으로 엉망진창인 TV콘텐츠를 양산하리라는 경계에서만 도출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신문‘재벌’에 모든 영역의 방송을 허용하는 것이 미디어 생태계에 끼칠 영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반영돼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의 예를 생각해보라. 이탈리아 미디어 산업의 구조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는 건 베를루스코니가 소유한 매체들의 논조를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JTBC가 <송곳>을 방영한다는 사실이 그의 종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하도록 해서는 안 되고, JTBC가 종편이라는 사실을 드라마 <송곳>에 대한 무조건적 폄훼로 귀결시켜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모든 일이 이렇게 되고야 마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앞서 설명한 정치적 냉소주의가 일상의 어법에서까지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무슨 주장을 할 때, 우리는 그 주장에 대해 판단하기 보다는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을 ‘의도’를 구성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 사람이 무언가를 비판하는 논리를 반박하는 게 아니라 혹시 누구에게 돈을 받은 건 아닌지, 결국 누구를 편들고 싶은 욕망에 따른 억지 쓰기는 아닌지, 그냥 열등감을 느껴서 비판하는 척하는 건 아닌지, 나를 포함한 대중을 기만하는 것은 아닌지 등의 의문을 반복 제기한다. 여기서 ‘까’와 ‘빠’로 요악할 수 있는 세태가 형성된다. 눈앞에 놓인 문제가 ‘까야 되는’ 문제인지 ‘실드를 쳐야 하는’ 문제인지만 판단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문제만 명확해지면 까거나 실드를 치는 데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좀 알만한 사람들까지 이런 방법론에 빠지는 건 보통은 그게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다루는 소위 진보 언론들이 선택한 길이기도 하다. 진보 언론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대통령의 신원(伸冤)투쟁이라는 프레임으로 해설하는데 경쟁적으로 열을 올렸다. 이런 종류의 해법은 제1야당이 주로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을 점진적으로나마 개선시킬 수 있는 방법은 모든 주체가 쉬운 길을 경쟁적으로 택하는 게 아니다. 문제의 핵심에 대한 근본적인 윤리적 판단을 요청하는 질문을 누군가는 계속 던져야만 한다. 이상(理想)은 인정하지만 그 실현에 대해서는 현실적 이유를 대며 유예를 요청하는 게 기성의 영역에 있는 존재들의 역할이다. ‘이상과 현실 간의 줄다리기’라는 구도가 존재해야 사람들이 오로지 ‘유죄냐, 무죄냐’만 묻는 정치적 냉소주의에 그나마 덜 영향을 받을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처한 현실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누구의 편인지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얼마만큼 이상에 가깝게 전진시킬 지를 두고 사람들이 논의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비평’이다. 언론에 대한 비평은 이런 측면에서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 중 하나다. 그러나 남들이 차마 제기하지 못하는 문제를 앞에 나서서 말해야 하는 운명이지만 기성의 한계를 고스란히 공유해야 한다는 점은 늘 질곡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계속 묻게 된다. 우리는 원래 우리가 했어야 했던 일들을 지금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우리는 안이함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이불변 응만변(以不變 應萬變)이라는 경구를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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