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것. 계절이 바뀌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것조차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된다.

‘구본홍 사장 반대’로 시작한 YTN사태가 10일로 146일이 되었다. 뜨거운 땡볕 아래 처음 ‘출근 저지 투쟁’을 시작했던 YTN노조원들은, 아마도 오늘까지 투쟁이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YTN취재를 시작할 그 당시만 해도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는 겨울까지 YTN을 취재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12월9일 YTN노조원 100여명이 YTN타워 후문에서 구본홍 출근 저지 투쟁을 하고 있다. ⓒ송선영
지난 146일 동안 YTN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서로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는 날이 계속됐다. ‘선배’들은 십년 넘게 보아온 후배들을 징계했고, ‘후배’들은 그런 선배들을 향해 “기자 정신을 이야기하던한 선배가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성토했다. ‘구본홍 임명’으로 시작된, 이 사소하면서도 아픈 싸움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YTN노조원이 연극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들이 참여한 연극은 그들의 일상(YTN사태)을 연극으로 옮기면서 내부의 상처를 드러내 치유를 받는 일종의 ‘치유성’ 연극이다. 지난 6일과 7일, 경기도 가평에 모인 YTN노조원 10여명은, YTN사태 한 가운데서 그들이 겪고 있는 일들을 연극으로 만드는 데 뜻을 함께 했다.

YTN노조원들은 YTN사태를 겪으면서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인가에 대해 1박2일 동안 집중적으로 논의했고, 이를 연극으로 옮겼다. 대본과 짜인 틀도 없이, 즉흥적인 애드리브로 진행된 이날의 연극은, 오는 13일 집중 연습을 거친 뒤 조만간 YTN내부 구성원들 혹은 시민들 앞에 공개될 예정이다.

▲ YTN노조원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 ⓒ송선영
연극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공간 -해’의 노지향 대표는 YTN노조원들에게 YTN사태를 겪으면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 물으며, 이를 말로 표현하지 말고 몸을 이용한 조각상으로 표현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노조원들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 노조원은 ‘이상한 담배’라는 주제로 남들이 투쟁에 참여할 때 혼자서 참여하지 못하는 미안한 다음에 한쪽 구석에서 담배만 피웠던 경험을 살려 조각상을 만들었고, 다른 노조원은 ‘변절 보다 슬픈 무관심’이란 주제로 YTN사태에 무관심한 내부 구성원들의 모습을 꼬집었다. 또 다른 노조원은 ‘혼돈’이란 주제로, 여러 모습을 보이는 선배들 가운데 누구를 믿고 따라가야 하냐며 괴로움을 표현했다.

YTN노조원들은 실제 내부에서 겪은 일화들을 연극으로 옮겼으며, 항상 회사 쪽 입장과 대립점에 서있던 YTN지부 노종면 지부장과 권석재 사무국장이 간부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이제 투쟁을 그만하고 노조원들을 살려야 하지 않나. 구본홍씨를 받아들이면 다 살릴 수 있다. 그냥 구 사장 받아들이고 이 사람들 복직시키는 게 어떻겠냐. 가서 노조원들 설득해서 일단 해직당한 사람들 먼저 살리고 보자.”

▲ 노종면 지부장(왼쪽)과 권석재 사무국장(가운데)이 회사 쪽 간부 역할을 맡아 연극에 참여하고 있다. ⓒ송선영
노조원들은 또 각자 자신이 겪고 있는 가장 힘든 부분들을 대사로 풀었다. “동료들이 해고당한 후 계속 술만 마셨다” “노조원으로 투쟁에 참여해야 하는지, 기자로서의 본분을 먼저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떤 선배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다” 등 그들만의 고민을 토로했다.

이 연극은 내부 구성원들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으로, YTN사태에 대한 옳고 그름을 가리자는 것이 아닌, 내부의 갈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자는 취지로 진행된다고 한다.

노종면 지부장은 “우리 속에 있는 갈등들, 노조에서 차마 밝히지 못하고 덮어야 하는 비열한 모습들까지도 모두 이야기하자는 것”이라며 “선악을 나누자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을 모두 끄집어내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YTN노조원들이 연극에 참여하고 있다. 당초 맥주와 소주는 연극의 소품으로 등장했으나, 실제 연극에 들어가자 한 노조원이 괴로운 듯(?) 술을 마시자고 제안해 연극에 참여한 노조원 모두가 술을 마셨다. ⓒ송선영
1박2일 연극 치유 프로그램이 끝난 뒤 한 노조원은 “평소에 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른 노조원도 “평소 선배들이 말했던 것을 그저 말로만 이해했는데 연극을 통해 그 상황을 이해하게 된 것 같다”면서 “회사 쪽 간부들의 연기를 잘한 것은 그만큼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감정의 골이 더 깊게 파여서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노조원은 “최근 100여 일만에 가장 많이 웃은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노조원들은 참 많이 웃었다.

▲ 연극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한 YTN노조원들이 웃고 있다. ⓒ송선영
겉으로는 굳건하게 공정방송을 수호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 YTN노조이지만, 차마 외부로 드러내지 못할 수많은 고민과 상처들을 안고 있었다. 긴 투쟁 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이들은 노조뿐만이 아니라 “구본홍 측근에 서서 후배들을 징계하는 데 앞장섰다”고 비난받고 있는 간부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YTN의 한 간부는 “노사가 너무 감정적으로 첨예하게 맞서면서 서로 물러설 수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면서 “어떤 형태로든지 해결이 되겠지만 이미 서로가 서로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지금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냐”고 씁쓸해 했다.

이 길고 긴 상처의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 어느 시점에 매듭될 지 알 수 없지만, YTN구성원들의 상처가 치유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임이 분명하다. 이들에게 이토록 극심한 고통과 상처를 안긴 쪽에서도 이런 사실을 아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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