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예상대로 ‘5자 회동’은 성과 없이 끝났다. 야당은 “벽을 느꼈다”고 했다. “이럴 거면 뭐하러 회동을 했느냐”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일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박근혜 대통령에 맞서는 문재인 대표의 메시지 자체는 좋았지만 전술적으로는 실패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된다. 5자회동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만 득을 보는 결과가 됐다는 것이다.

세세하게 짚어보면 무리한 해석이 아니다. 애초 회동을 제안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방미 순방의 결과를 공유하고 이후 ‘민생법안’ 처리에 있어서 국회의 협력을 요구한다는 명분이다. 이것은 국민들이 보기에 명분 있는 행동이다. 대통령이 외국에 나갔다 들어와서 여야 대표와 대화하겠다는데 그게 잘못됐다고 할 사람은 없다.

시작부터 새정치민주연합이 끌려간 듯 보인 것은 문제다. 어차피 5자회동의 형식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었다면 3자회동, 대변인 배석 등의 요구는 할 필요가 없었다. 의제에 있어서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중심에 놓은 것이 옳은 판단이었는지도 고민해볼 문제다. 물론 문재인 대표가 경제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국정교과서 문제를 우회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의도한 대로 상황이 돌아가지는 못했다. 이외의 핵심 쟁점은 다소 백화점식으로 나열돼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의도적 ‘무시’ 속에 그저 지나가 버렸다.

▲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원유철 원내대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이종걸 원내대표가 22일 오후 3시 청와대에서 회동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23일 오후 대구 동성로를 찾아 '친일독재 미화 국정교과서 반대 대국민 서명운동'에 참여해줄 것을 대구시민에게 독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차라리 박근혜 정부의 ‘외교 무능’에 집중하면서 이를 역사교과서 국정화까지 논리를 연결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이 ‘방미 순방’이라는 명분에도 맞는 것일 수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 미 대통령의 메시지와 현지 언론 기자들의 질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물론 박근혜 대통령의 순발력 문제이기도 할 것이지만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 외교의 문제가 반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우리 정부로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남중국해 문제를 들어 사실상 ‘중국이냐 미국이냐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강변한 것에 명확히 대답할 말이 없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와 언론 등은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한 장면을 강렬한 기억으로 갖고 있다. 때문에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더불어 중국으로의 편향이 강조된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반드시 막대를 반대로 구부려 일정 정도 이상의 친미적 행보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판국에 몰려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모처럼 펜타곤을 방문했음에도 한국형전투기(KFX)사업과 관련한 4대 핵심기술 이전에 대한 허가를 미국 정부로부터 받지 못한 것에도 이런 국제정치적 맥락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선언과 일본과의 관계개선은 한미정상회담 이후에 반드시 뒤따라올 결론이었다.

만일 박근혜 정부가 “올 하반기는 외교적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공언한대로 미국, 중국, 일본, 북한 등과의 관계를 모두 개선하는 쾌거를 이룬다면 이런 우여곡절이 충분히 양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대로 되는 것은 없다. 당장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의 회담 내용이 문제가 됐다.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해 타국 영토에 진입할 시에 해당 국가의 동의를 전제로 한다는 점은 양자 사이에 분명히 확인됐다.

그러나 자위대가 북한에 진입할 경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우리 헌법은 우리나라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북한의 영토 진입에 대해 우리 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게 한민구 국방부 장관의 주장이었으나, 나카타니 겐 방위상은 남한의 실효적 지배는 휴전선 이남까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결국 이와 관련해서는 미국을 포함한 틀에서 재론하는 걸로 결론났다. 이 과정에서 국방부가 나카타니 겐 방위성의 주장을 발표하지 않았다가 일본 언론의 보도를 확인한 기자들의 질문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사실을 확인해주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것은 박근혜 정부가 한일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불필요한 ‘불신’을 받는 상황을 자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잖아도 ‘반일감정’과 이에 호응하는 ‘민족주의’가 늘상 문제가 되는 판국에 정부가 의도적으로 나카타니 겐 방위상의 발언을 숨긴 것처럼 돼버린 건 분명한 악재다.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진행해도 어려울 한일관계 개선은 이 악재 때문에 더욱 큰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설혹 한일관계를 개선한다 하더라도 그 반대급부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상당 부분을 인정하는 결과가 될 거라는 걸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황교안 총리가 국회에서 일본의 자위대와 관련한 부적절한 발언을 함으로써 국민여론은 악화돼있다.

이런 판국에 역사교과서 국정화까지 진행하는 것은 작정하고 반일감정에 불을 지르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국정화 된 역사교과서가 ‘친일교과서’가 되리라는 점이 국민적 공감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김무성 대표가 5자회동의 자리에서 ‘우편향’이 우려되면 야권도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해서 이를 막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였으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례가 이미 공분을 산데다 대통령이 스스로 현행 교과서가 ‘좌편향’돼있다고 주장하는 마당이다.

결국 앞뒤와 손발이 맞지 않는 형국이다. 외교를 중시하였다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 붙이지 않는 것으로 국내 여론을 수습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한미일 동맹 강화’라는 미국의 입장을 희석시킬 수 있는 외교적 카드를 방미 기간 동안 보여줬어야 한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판에 국민들의 뇌리에 남은 것은 상대의 답변이 길어 원래 질문이 뭔지 잊어버렸다며 동문서답을 하는 대통령의 어리버리한 모습이다.

이 모든 혼란이 대통령의 잘못된 상황인식과 독선에 가까운 왜곡된 신념, 한 번 정한 바는 치킨게임을 감수하며 끝까지 밀어 붙인다는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벌어졌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니 야당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이를 분명히 가르쳐 줘야 한다. 야당이 국정에 협력할래야 협력할 수 없는 사정을 국민들에게 소상히 밝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도 외교는 잘한다”는 박근혜 정부의 자화자찬을 “외교도 망쳤다”는 국민적 평가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번 5자 회동이 그 기회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렇게 또 한 번의 고비를 모두의 안이함 속에서 넘겼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