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결과에 대해 설왕설래가 오간다. 미국 정치권에 퍼져있는 '중국경사론'을 확실히 해소했는지가 불투명하고 부담만 잔뜩 안고 온 결과라는 게 거의 공통된 해석이다. 한국형전투기 사업을 사실상 좌초시킬 요소로 지적됐던 '4대 핵심기술 이전 거부'와 관련된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일부 언론은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사의를 밝혔다고도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어차피 예정돼있던 결과라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 외교안보 정책에 큰 충격을 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문제와 관련한 정치적 후폭풍은 국내이슈에서 터질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 정치권에 퍼져있는 중국경사론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나와있다. 첫째는 실제로 박근혜 정부의 외교 노선이 그렇게 보일만 했다는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대중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상대적으로 중국에 밀착된 외교행보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은 사실이다. 또,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냉각기에 접어들었다는 점을 일종의 '지렛대'로 활용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정부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논란, 사드(THAAD) 배치 논란, 중국 전승절 기념 열병식 참가 논란 등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불거진 문제다.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 한국의 이런 어려움을 모른척 할 것은 아니다. 미국의 직접 개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해 동아시아 관련국들의 역할을 최대한 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중국이 일정 정도의 역할을 맡아준다면 미국으로서는 손해볼 일이 아니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직후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북핵 문제와 관련한 중국 역할론을 명백히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공동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중국과의 남중국해 갈등과 관련해 한국의 역할을 특별히 주문하고 있는 것에는 좀 더 다른 측면의 무언가가 작용하지 않았겠느냐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즉, 일본이 한국의 중국경사론을 미국 내에서 여론화 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지난 3월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발언을 내놨던 것도 이런 상황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일본의 '로비'가 위력을 발휘해 동아시아 지역에서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는 올해 들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고심(?)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간 한국은 '과거사' 문제를 고리로 일본에 대항하는 전선을 형성해 중국과 손을 잡아왔다. 그러나 지난 8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종전 70주년 기념 담화를 발표하면서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을 사실상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는 이에 대해 미온적 반응으로 일관했다.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이러한 태도를 결국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사전정지작업으로 해석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가 직후 국내 보수언론 등이 중국으로 기울어진 저울의 무게추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필수라고 주장한 것도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다음달 초 한중일 정상회의를 진행하고 이후 한일정상회담을 진행한다는 연속된 일정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게 됐다. 일부 낙관적인 관료들은 박근혜 정부가 올해 내에 미국, 중국, 일본과의 관계를 동시에 풀고 대북문제도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장밋빛 전망을 얘기하고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복잡하게 꼬인 동아시아 외교의 매듭을 풀기 위해 노력해온 외교안보분야의 관료들로서는 기분 좋은 한 해의 마무리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앞에서 강조했듯 국내 이슈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돌입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과거사 문제가 다시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는 이 쟁점을 어떻게든 우회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추진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제스츄어'만 취해주는 것으로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대신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구도였다면 박근혜 정부가 이를 용납할 수 없었겠지만 이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일본이 고개만 약간 까딱거려줘도 감지덕지다.

만일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보수언론들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성공한 대통령을 추켜세우기 바쁘겠지만, 정도를 추구하는 언론의 입장에서는 과거사 문제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은 어찌됐건 대중적 소구력을 가질 것이다. 이미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친일, 독재 미화'라는 대중적 프레임이 형성돼있기 때문이다. 이 프레임은 우리 사회에서 특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과 이를 기반으로 한 민족주의적 정서에 불을 붙이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 과정에서 벌어질 논란은 여기에 기름을 부을 것이다.

역사교과서로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려는 대통령이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도 눈을 감았다는 식의 대중적 평가가 횡행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 내년 총선부터 걱정이다. 자기 아버지의 친일 논란을 평전 발간을 통해 우회해보려 했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노력도 허사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정부와 여당은 더 강하게 '종북 프레임'을 밀어 붙일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우리나라는 '종북'과 '친일 독재'가 맞붙는 퇴행적 대결(이것이 과연 이념대결이기는 한가?)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과연 올바른, 좋은 정치인가?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해결책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철회하는 것 뿐이다. 그래야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통치자로서의 '소명'을 팽개치는 건 역사 안에서 죽는 길이다. 역사에 어떤 대통령으로 남을 것인가? 대통령은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아니라 역사 속의 자기 존재를 걱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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