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리는 기관차 같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18일 오전 미국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귀국해 현안 보고를 받으면서 "어떻게 돼 가느냐"며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방미 성과에 대해 이른바 '중국경사론'에 대한 우려를 씻어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미국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부담을 안았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중요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제1관심사가 국정교과서에 맞춰져 있음이 다시 한 번 명백히 드러난 것이다.

역사교과서 문제는 일부의 성급한 평가에 의하자면 '제2의 촛불시위' 국면으로 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보수적 유권자 일부까지 포괄할 수 있는 민족주의 관련 이슈로 소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야권의 지지부진과 2008년 당시보다 훨씬 광범해진 냉소적 정서 때문에 이런 평가가 현실에 반영될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문제가 박근혜 정부가 그간 추진한 정책 중 가장 격렬한 정서적 반대를 야기하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이 문제의 폭발력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정부로서도 진지하게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검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검정 강화 등의 방식으로 후퇴하려고 했던 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여당인 새누리당이 당론으로 정하고 당정이 발을 맞춰 이 문제를 밀어 붙이는 과정에서 빚어진 잡음도 이런 추측의 한 근거가 됐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그토록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었다면 황교안 국무총리 등 정부 관계자들이 이렇게 망신을 당할 만큼의 준비부족을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부의 주요 인사들조차 현행 교과서에 무엇이 어떻게 기술돼있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어떻게 추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부 여당의 이러한 혼란은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박근혜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라는 해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정부 관계자나 학계의 주요 인사들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오로지 대통령 한 사람의 주장 때문에 추진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 게 아니냐는 얘기다.

물론 현행 교과서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역사적 편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일각에서 주장하는대로 '질'의 문제일 수도 있다.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수준의 필진들이 제각기 교과서를 내는 것보다는 각 분야의 검증된 최고의 학자들이 모여 질 좋은 1종의 교과서를 만드는 것이 낫다는 주장에 일말의 합리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친일 독재를 미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충분히 검토해봐야 하는 것처럼 교과서의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주장 역시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역사가 정치권력에 의해 지배될 때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왜곡이 다시 어떤 파탄적인 정치적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이미 우리가 충분히 보았다는 거다. 당장 보수우익이 비판하는 북한의 경우를 보면 이 문제의 극단적 결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우리가 역사교과서를 국정화 하더라도 국가 수반의 정통성이 백두혈통이라는 것에서 비롯된다거나 1초에 권총을 3발씩 쏘고도 백발백중이라는 식의 서술은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역사책이 어떤 종류의 '프로파간다'로 기능하게 되리라는 점은 그야말로 '안 봐도 비디오'일 것이다. 더군다나 역사교과서의 질을 높이는 것은 반드시 '국정화'로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학계의 반발은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단일 역사교과서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이 17일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모임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결국 '왜'라는 물음에 방점이 찍힌다. 대통령이 이토록 무리해서까지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밀어 붙이는 의도는 무엇인가?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진정한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이미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정치적 냉소는 정부나 유력 정치인들이 추진하는 어떤 공적 정책의 이면에 '사적 이익의 추구'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관념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 도식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해석하면 결국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는 얘기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구호가 "청와대는 너희 집이 아니고 역사도 너희집 가정사가 아니다"로 정해진 것은 이런 맥락으로 볼 때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단지 자기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만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무슨 심오한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밀어 붙이는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대중의 정치적 냉소를 키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대통령의 모든 선의를 존중하고 인정한다 해도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대통령이 '참 나쁜 정치'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행보가 반복되는 한, 박근혜 대통령은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묘사될지 모르겠으나 결국 '참 나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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