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푸른 강은 흘러라 Let the Blue River Run
DIRECTOR : 강미자
ADDITION : 2008 제작| 77분 30초 | 한국 | color
출연 : 김예리, 남철, 김선애, 이지상

이문재 시인의 에세이를 인용하며 시작하자.

라면과 컵라면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이 있다. 라면에는 (중략) 개인의 기호가 완강하게, 그리고 배타적으로 내장되어 있다. 하지만 컵라면은 일률적이다. 거기에는 개인의 취향이 들어갈 틈이 없다. 뜨거운 물 하나와 일회용 작은 젓가락이 있을 뿐이다. 하다못해 단무지조차 끼어들 여지가 없다.

- 이문재 산문집 중에서

▲ 서울독립영화제 2008
내 경우 컵라면을 먹을 때도 일부러 ‘그냥 라면’ 끓일 때 처럼 냄비에 조리해 먹는 버릇이 있다. 스프를 첨가하지 않은 채 용기에 뜨거운 물을 넣어 한번 데치고 그렇게 기름을 제거한 후 다시 냄비에 끓이는데 이 때 고추를 좀 썰어넣고 식초를 한 방울 넣고 계란이 있으면 풀어 넣고 하다 보면 면도 더 꼬들꼬들 부드럽고 기름기도 적고 ‘그냥 라면’ 보다 오히려 별미가 된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 컵라면은 컵라면이 아닌 한번 데칠 용기容器 를 보유한 오히려 장에 부담이 덜한 ‘그냥 라면’인 것이다.

결국은 이문재 시인과 같은 얘기를 하는 거다. 인용한 에세이의 원문을 요약하자면, 우리를 일률적인 소비자로 호명하는 소비사회에 맞서기 위해서는, 아직까지 ‘개인의 취향’을 이식하는 것이 가능한 그런 공산품들을 오히려 적극적인 ‘우리 편’ 내지 ‘느리지만 옳은 가치’ 로 호출하고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얘기.

흥미롭다. 실은 흥미로운 한편 의구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 ‘우리 편’, ‘느린 가치’의 카테고리에는 개성 있는 조리가 가능한 라면 뿐만 아니라 자전거 취미, 티셔츠 행동, 상업 영화에 대한 적극적인 독해, 사회적 기업, 대안학교, 이글루스 블로그, UCC 같은 것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견 긍정적으로, 나름의 고유한 운동으로 느껴지는 저 목록, 저 가치들의 한계도 라면과 컵라면의 비유에서 도출할 수 있지 않을까.

말인즉슨, 라면의 조리법이 라면의 구조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니까 라면의 빠롤, 이를테면, 계란의 추가, 수프를 넣는 타이밍, 면의 꼬들꼬들한 정도 등등 그 모든 개인의 스타일이 라면의 랑그, 즉, 공장의 시스템, 식용 우지, 유탕 처리, 삼양과 농심, 대형할인매장의 패키지, 그 모든 자본주의 컨베이어 벨트를 바꿀 수는 없다.

가령, 올 초 한국에 소개됐던 잘 만든 두 개의 유럽영화 <잠수종과 나비>,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이 주목하는 서로 다른 지점. 전자는 전신마비 상태의 프랑스 엘르지 편집장이 죽기 직전까지 눈을 깜빡이는 신호를 통해 필생의 산문집을 완성해가는 얘기, 후자는 루마니아의 한 가난한 노인이 자신의 병세를 자각하고 치료를 받으러 병원을 전전하다 기본적인 의료 처치도 받지 못한 채 결국 숨을 거두는 이야기.

둘 다 자기 육체를 운용할 능력을 잃어가는 사내들을 다뤘는데, 몸을 아예 쓰지 못하던 한 명은 인간 정신의 위대한 현존을 증거하는 반면, 오히려 제 발로 걸어다니며 의사표현을 하던 또 한 명은 인생을 회고할 틈도 없이 의식을 잃는 비루한 육체를 보여준다. 솔직히 말하자. 이 둘의 차이를 낳은 많은 변수가 있겠지만 가장 긴요한 지점에서의 판가름은 ‘돈이 있냐 없냐’.

‘잠수종’ 에 갇힌 듯 꼼짝할 수 없는 육신을, ‘나비’로 은유되는 자유로운 사유의 힘으로 극복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 나비의 유영을 가능하게 해준 건 구조의 배려였던 셈. 성실한 사회복지사들을 교대로 배치할 수 있는 시스템 , 장기간의 입원치료를 가능하게 한 은행잔고, 특이 증후군에 대한 의료진의 관심, 먹고 살고 면회하고 간호도 할 만한 가족들. 이렇듯 관객과 연출자와 영화 스스로가 모른 척 하려 해도 좌.우.지.간. ‘존재는 의식을 규정한다’.

즉, 우리가 아무리 우리 의식의 상부구조에서 나비의 날개짓을 한들 우리 생계의 하부구조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뻘짓을 한다면, 예를 들어, 동물을 갈아만든 사료를 쓴다면, 그리고 그 사료를 먹은 소들이 광우병 위험에 노출된다면, 그리고 그 위험이 잠복했을지도 모를 쇠고기를 별다르게 견제하고 저어하는 절차도 없이 냉큼 수입한다면, 라면이건 컵라면이건 심지어 그냥 국수에 첨가하는 조미료까지… 믿을 게 없어진다. 자본권력은, 조그만 문화적 단절의 퍼포먼스 따위 이렇듯 냉큼 뛰어넘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퍼포먼스가 아니라 보다 정교한 말글 아닐까. 영화가 할 일은 개개의 프로파간다보다는 그 정교하고 섬세한 감각을 일깨우고 누리는 시공간의 제공. 따라서 방금 내 소소한 시비와는 별개로 이문재 시인의 시와 산문들은 여전히 기껍다. 우리의 어휘가 풍부해질수록 우리는 좋은 싸움을 할 수 있으니까.

같은 맥락에서, 개발과 독점, 경쟁만능, 시장만능의 위험을 검증하지 않은 채 인간살이 모두를 화폐가치로만 환산하는 정권의 악덕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급한 퍼포먼스보다 꾸준하고 질긴 모험이 필요하다. 지난 봄 광화문의 수십만 인파는 반갑지만 (그 직관적인 분노가 경로가 될 수 있기에), 장기적으로는 정서에의 호소를 뛰어넘는 이성의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 온도를 어떻게든 데워야만 함께 할 수 있는 구호들은 필연적으로 다시 온도가 낮아질 때 조금 허무하게 동력을 잃어버리기 마련. 모로 가도 서울을 가자고 했지만 그 경로가 나침반을 잃어버리면 그 다음은? 우리에겐 나침반 없이도 성큼성큼 나아갈 길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이성. 상식. 합리적 감각. 꾸준한 친구.

이 글의 마지막은 바로 그 꾸준한 친구를 소개하는 시간. 이 얘기 저 얘기 돌고 돌아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라면 이상의 먹거리…는 바로 독립영화다.

흠도 있고 결도 있고 부침도 있겠지만 이 시절에 우리들이 함께하면 좋을 서사를 고민하는 것이 ‘독립영화’의 모토. 수상한 시절일수록 사람살이의 문제를 모른 척하지 않는 영화가 긴요하지만 아무래도 큰 돈과 많은 인력, 스타 시스템, 그리고 기존의 유통망이 모두 오케이 사인을 내려야 첫 삽을 뜰까 말까 하는 덩치 큰 영화들의 행보는 조심스럽다. 이럴 때 자본과 권력의 눈치를 덜 보며 공동체의 얘기를 꾸준히 해온 어떤 독립영화의 기운이 여러분에게 작지만 단단한 친구가 되기를.

물론 독립영화 4음절이 그 개별 원소들 모두의 완성도를 담보할 수는 없기에, 그 중에는 수작도 있고 태작도 있겠다. 일단 곧 개막할 ‘서울독립영화제(http://www.siff.or.kr/)’를 그 기대와 아쉬움, 그리하여 다른 가능성을 확인할 정팅의 기회로 추천한다.

▲ 서울독립영화제 2008 개막작 <푸른 강은 흘러라> 중 한 장면
종로에 한 군데 밖에 없는 독립영화전용관을 찾을 시간과 동선이 바쁜 살림살이로 여의치 않으시다면, 그래도 이 영화 한 편은 꼭 일감을 권한다. 바로 개막작인 <푸른 강은 흘러라>. 지금 연변의 소년 소녀들을 (이름도 ‘숙이’와 ‘철이’) 주인공으로 한 이 당당한 청춘 영화는 기이할 정도로 계몽적인 대사와 천진한 장면들의 연속이지만, 그 촌스럽고 낯선 기호들이 오히려 우리가 이 땅에서 잊고 살았던, ‘세상이 그렇지 뭐’ 하며 슬금슬금 포기했던 가치들을 제대로 환기시킨다. 우리가 우리의 어떤 옹졸함과 싸워야 하는지, 이후 어떤 진짜 풍요를 얻을 수 있는지를 괜한 실험이나 치기가 아닌 골방 바깥에서의 씩씩한 대화와 걸음걸이로 증명하는 작품 (개막일 외에도 영화제 기간 중에 두 번 더 상영이 있다).

다른 소개는 차치하고, 영화의 첫 시작은 이렇다. 까만 화면에 세로로 쓰여진 문장. 이를 활기차게 발성하는 두 소년 소녀의 목소리.

푸르름은 랑만이야.
푸르름은 광대무변이지.
그것은 숙원의 약속이고.
그것은 옥같은 고백이야.

이어서 다시 영화 속 주인공 숙이와 철이가 채팅을 하며 같은 대화를 반복한다.

“푸르름은 낭만이야!”
“푸르름은 광대무변이지!”
“그것은 숙원의 약속이고!”
“그것은 옥 같은 고백이야!”

이렇게 두 번 말하는 걸 운동이라고 한다. 계급의 단절을 무늬로 극복한 척하려는 퍼포먼스가 아닌 진짜 운동! 삶의 가치가 삶의 조건에 어떤 시달림을 받고 그럼에도 어떻게 이겨내는지 보여주는 진짜 영화!


2001년에 스물다섯이었던 성호. 그 해부터,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아예 모르는 『산만한 제국』『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우익청년 윤성호』『이렇게는 계속 할 수 없어요』등등 극영화 같기도 하고 다큐 같기도 한, 실은 UCC에 가까운 - 중단편을 만들어왔다. 2007년『은하해방전선』이라는 장편영화를 만들며 나름 촉망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별로 안 풀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존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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