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의 지원을 받아 “재생가능에너지 보급에서의 갈등과 해결 방안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본고를 포함한 세 차례의 기고는 이 연구의 보고서를 토대로 작성한 내용으로, 연구 결과물의 일부를 미디어스 독자들과 나누고자 작성되었다.

에너지와 민주주의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반핵이나 탈핵 진영을 핵에너지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여긴다. 환경주의자들은 석탄과 석유 등 화석에너지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듯하다. ‘탈핵 에너지 전환’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이런 판단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역사적으로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된다.

2013년에 티모시 미첼(Timothy Mitchell)이 쓴《탄소 민주주의》를 번역하면서 느낀 게 있다면, 에너지 전환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인프라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구성된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는 학자나 운동가들도 많이 알고 있는 내용이다.

좀 더 들어가 보자.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과 평화운동은 당대의 주 에너지원의 선택과 그 변화 과정에서 지배계급과 의미심장한 길항작용을 했다. 지역적이든, 국가적이든, 국제적이든, 석탄이 도입되고 석유가 도입되면서 형성된 에너지 기술과 사회 시스템은 각종 기계적, 정치적, 경제적 장치들과 그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를 지탱하는 하나의 ‘사회-기술 세계’를 만들어냈다. 석탄 시대가 그랬고, 석유 시대가 그랬다.

그럼, 각 시대마다 민주주의는 어떤 형태를 띠었을까? 어려운 질문이지만, 미첼이 주장하는 요지는 석탄의 사회-기술 세계가 노동계급과 민주주의 발전에 친화적이었고, 반면 석유의 사회-기술 세계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거의) 석탄 생산-유통-소비는 작업 과정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율성과 전투성이 발휘되기 쉬었는데, 왜냐하면 정치경제 시스템이 석탄을 지하에서 지상으로 옮기는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데 취약했고, 노동집단이 그 취약지점을 통제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반대로 석유는 석탄에 비해 노동집단이 통제력을 행사할 취약지점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오히려 지배집단이 작업 과정에서부터 운송 시스템과 정치 군사적 메커니즘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기회구조를 제공했다. 물론 대중 소비사회로 바뀌면서 사회 전체가 특정 에너지원에 중독된 문제도 작용했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에너지원인 석탄을 옹호하는 것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많다. ‘탄소 민주주의’의 정수는 이런 분석 결과보다는 접근 태도와 방식에 있다. 특정 에너지원이 민주주의 수준과 형태를 결정하는 소위 ‘에너지 결정론’도 오류고, 정치가 에너지를 포함한 물적 토대에 우선한다는 ‘정치 관념론’도 오류라고 못 박는다.

미첼의 화법에 따르면, 에너지 전환의 경로와 그 과정에는 수많은 연결과 동맹이 형성되고, 이 연결과 동맹은 물질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혹은 폭력과 재현 사이의 어떤 분리도 허용하지 않는다.

▲ 경남 밀양시 부북면 일대 송전탑 전경 (사진=연합뉴스)

연결과 동맹은 권력의 형태를 바꿀 수 있게 할 수 있지만, 에너지의 사용과 민주적 요구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연결과 동맹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취약성과 기회들을, 그리고 통제에 특히 효과적인 좁은 통과지점을 따라가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정치적 가능성들은 에너지의 흐름과 집중을 조직하는 방식들에 의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데, 이 가능성들은 에너지의 분배와 통제의 관계에서 조합되는 사람, 자연, 금융, 전문가와 폭력의 배열에 의해 촉발되기도 하고 제한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정치가 에너지 종류만으로 바뀔 거라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에너지 전환으로 더 민주적일지, 덜 민주적일지 가정하거나 예측하는 것은 잘못이거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석탄과 석유와 핵은 이미 검증이 끝난 것이라면, 재생가능에너지는 이제 검증 단계에 있다는 게 핵심이다.

이 검증에서 중요한 것은 재생가능에너지가 도입되는 사회기술 시스템의 취약성과 가능성을 밝히는 것이다. 태양광과 풍력을 만드는 노동자 다수가 비정규직이라면, 그 노동자에게 그리고 그런 노동 레짐의 세상에서 재생가능에너지는 어떤 의미일까? 백두대간에 대규모 풍력단지를 올리고, 주변지역 주민들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는 바이오열병합발전은 세우는 것은 재생에너지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검증은 “정의로운 전환”의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경제적, 사회적, 아니면 환경적인 목적으로 재생가능에너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해서, 공장 가동이나 발전소 운전에 차질이 발생한다면? 환경적, 사회적 아니면 경제적 목적으로 우리 지역이나 마을에 재생가능에너지 설비를 반대한다면? 대체로 부정적인 것(환경과 건강 영향이나 에너지 부족)의 최소화와 긍정적인 것(재생에너지 자원 활용이나 경제적 편익)의 극대화를 조화롭게 추구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현실은 어떤가? 현재 주로 발생하고 있는 지역사회의 갈등은 재생가능에너지 입지 문제가 쟁점이다. 정부든 기업이든, 재생가능에너지를 늘리려는 사업 주체, 그리고 재생에너지 확대에 찬성하는 단체 일부는, 의식적으로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이를 님비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님비라면 님비가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복잡한 질문이지만, 우리가 함께 생각해봐야 할 과제임에 분명하다. 다음 두 기고문에서 지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몇 가지 사례와 갈등 양상을 들어 구체적인 내용을 전할 예정이다.

마지막 대목에서 나올 법한 반응은 이런 게 아닐지. 원전도 반대하고 화석연료도 반대하면서 재생가능에너지마저 반대한다면(또는 확대에 지장을 주는 장애물을 놓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건가?
이 또한 논의할 주제라는 전제를 달고 답하자면 이렇다. 재생가능에너지가 무조건 선이 아니라면, 즉 어떻게 들어서는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가동하는지에 따라 착한 에너지가 될 수도, 나쁜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면?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에너지 민주주의의 몫일 것이다.

어차피 재생가능에너지 역시 자연환경이나 건조환경에 일정한 변형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면, 일정한 규칙을 합의하는 과정이 진지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 규칙을 정하는 규칙이 공정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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