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의 전달과 해석을 비판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언론에는 '전달'과 '해석'은 있지만 비판이 실종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인은 '남의 말'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차도살인'을 일삼는 비겁한 존재로나 묘사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비판은 실종된다. 제대로 된 비판을 위해 가끔은 언론이 직접 자신의 의견을 공격적으로 드러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래도 진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를 우리의 말로 표현하고자 한다.

과거, 러시아에 정말로 혁명을 했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다. 실제 그들이 이룬 혁명은 다수 민중의 지지와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표시로 뒷받침되었다. 혁명 직후,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냉정하게 판단하였다. 제정(帝政)을 무너뜨리긴 했지만 서유럽을 필두로 연속된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들의 노동자 정권은 유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제1의 목표는, 예를 들면 독일과 같은 나라로 혁명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해서 세계를 대상으로 한 혁명을 유도할 생각이었다. 생각대로 잘 됐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스탈린이 집권했을 때, 그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물론 그 어떤 독재자든 마찬가지였겠지만 정권의 정통성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의 혼란 속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획득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존경받는 혁명의 지도자인 ‘레닌’을 얼마나 정당하게 계승하고 있느냐 였다. 모든 정치가 그렇듯, 그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온갖 어지러운 권력다툼과 이로 인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스탈린은 정적을 사진에서 지우고 자신의 무오류의 신으로 포장하는 등의 온갖 날조를 감행하며 레닌의 정당한 계승자로 행세했다.

▲ 스탈린 시대의 역사왜곡. 레닌이 연설하는 연단 아래에 서있는 트로츠키와 카메네프를 없애버렸다.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획득한 정통성을 스탈린은 이제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제국주의적 영향력을 세계로 확대하는데 활용했다. 그가 애용한 역사적 왜곡과 날조의 방법론은 그들의 미국과 대등한 영향력을 갖는 세계 2위의 국가로 발돋움하게 했다. 감히 누가 정당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계승자인 스탈린의 이론(스탈린 체제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을 거부하겠는가! ‘사회주의’의 이상에 영감을 받은 많은 국가들의 정치세력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형성된 양강의 냉전구도는 몇 십 년 동안 세계를 지배했고, 이것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은 셀 수도 없을 정도이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 가장 큰 비극은 스탈린주의자들이 국토를 반분하고 자기들만의 정권을 수립한 것이었다. 더 이상 인민의 이상향이 아니게 됐지만 그들만의 ‘혁명 교과서’ 안에서 소련이나 북한의 주민들은 여전히 유토피아에 사는 행복한 주민들이었다.

이 역사적 사례에 교과서 국정화의 위험성이 모두 드러나 있다. 권력의 필요성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역사는 반드시 그것이 발 딛고 있는 토대 자체를 무너뜨리기 마련이다. 역사적 진실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끝없는 노력이 필요한데, 권력은 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정치적 이득을 위해 언제고 이를 내다버릴 준비가 돼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독도 및 위안부 문제 등과 관련된 교과서 문제 역시 권력이 역사의 진실이 아닌 이득을 추구하는 태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역사왜곡은 적어도 그들만의 이기적인 ‘국익’을 수호하고자 하는 태도로부터 출발한다. 중국의 경우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동아시아에서 확대할 수 있는 근거로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고 일본의 경우는 영토분쟁에서의 우위 확보와 보통국가화 주장의 정당화를 노린 행위다.

▲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흥미로운 것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경우는 그런 맥락이 없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현행 역사교과서들이 사실과 다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거나 편향적이라는 게 주요 근거다. 박근혜 대통령도 역사 논쟁으로 인한 국론분열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역사의식이 없으면 주권을 잃을 수도 있다는 식의 주장을 내놓을 뿐이다. 당장 현행 역사교과서가 우리들의 삶에 무슨 악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명분이 없으니 학자들도 국정교과서 집필 작업 참여를 거부한다.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국정화 포기 직전까지 갔었다는 것은 수많은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바다. 대통령의 역사교육에 대한 강력한(!) 의지는 이런 상황을 모두 뒤엎고 당정이 일사불란하게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에 목숨을 거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니 결국 ‘아버지의 복권을 노린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야 만다. 도무지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명분이 부족한 일을 대통령이 강행하는 것은 더 큰 비극을 불러일으킨다. 이제는 없는 ‘종북’도 무덤에서 일으켜 세워야 할 때가 왔다. 여기도 종북, 저기도 종북, 온 사방이 종북 천지여야 대통령의 역사교육에 대한 진지한 의지에 근거가 생길 터였다. 종북이 이렇게 우리 일상의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왔는데 그 무슨 한가한 다양성 운운이란 말인가? 이런 풍토가 일방적인 광풍으로 이어질 경우, 그들이 그렇게도 무서워하는 ‘종북’은 결국 어떻게든 부활할 것이다.

▲ 황교안 국무총리가 13일 국회에서 진행된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답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황교안 국무총리의 발언은 이 미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든다. “사상의 자유는 모든 사상의 자유를 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공산 혁명을 추구하는 사상이 있다면 그건 우리 국가가 허용할 수 없다”…. 이런 주장을 국민의 대표(물론 그들의 수준이라고 크게 다르지도 않을 것이다)들이 모여 있는 국회의사당에서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내놓았다. 순전히 통치라는 측면에서 사상의 자유는 역설적으로 말해 그 어떤 사상에 의해서건 체제가 흔들리지 않을 필요성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체제가 더 많은 인민들의 이익 증진을 위해 바뀌어 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를 이 과정을 통해 쟁취했다. 이걸 거꾸로 체제가 흔들릴 수 있으니 사상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전체주의자의 논리라고 부른다.

이런 한심한 발언이 별 문제의식 없이 용납되고 있는 현실은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의 의의가 시민적 차원에서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정지역과 여성 및 소수자에 대한 노골적 혐오를 비롯해 온갖 극우적 몰상식들 역시 같은 맥락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논란은 친일과 독재에 대한 미화를 넘어서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민주적 시민의식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다. 언론이 이에 대한 문제의식 환기와 해결방법의 모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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