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는 국회의원-당무위원 합동총회 결의를 받아들여 재신임투표 철회를 발표했다. 그는 “마음은 더욱 비우고 책임은 더욱 다해서 당을 더 혁신하고 더 단합하도록 하겠다. 야권의 통합을 위해서도 더 노력해서 총선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5월 김상곤 혁신위원회를 출범시키면서 혁신관련 발언을 자주 해온 그이지만 통합 또는 단합을 부쩍 강조하고 나서는 것은 이례적이다.

"단결과 혁신으로 승리하고 새로운 비전으로 국민께 희망을 드리는 백년 정당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17일 국회에서 열린 새정치연합 창당 60주년 기념 심포지엄 때도 문 대표는 단결을 강조했다. 전날 공천혁신안이 비주류 의원들의 반발 속에 중앙위원회를 통과하며 갈등의 여지를 남겼지만 그래도 그는 ‘통합’의 키워드를 꺼내들었다. 같은 날 국민일보 인터뷰에서는 아예 야권대통합까지 언급했다. "정의당도 그렇고 천정배 의원도 그렇고 통합하는 게 좋다. 후보연대 전술은 어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통합해야 한다.”라며 총선 전 '통합 신당' 추진 의지를 공개했다. 재신임투표 철회를 발표한 21일에는 "비주류 의원들을 더 많이 포함하는 특보단, 자문의원단 등을 구성하겠다."고 당내 통합 구상방안을 밝혔다. "우리가 최고위원회의로만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에 현안이 있을 때마다 함께 하는 구조가 될 것"이라며 "당 단합은 더 큰 혁신,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2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무위원회의에서 김상곤 혁신위원장과 인사를 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표는 ‘통합과 혁신’을 말하지만 사실은 통합에 방점을 둔 통합형 정치인이다.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문 대표는 2011년 ‘혁신과 통합’의 상임대표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민주당과의 통합으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된다. 민주통합당은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로 1 대 1 구도 속에 19대 총선을 치렀다. 문 대표의 역정은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선출 이후에도 양자구도를 만들기 위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안철수 후보와 후보단일화, 심상정 및 이정희 후보와의 단일화 등이 그것이었다. 지난 2.8 전당대회에서도 박지원 후보에 대항하기 위해 정세균 전 대표와 후보단일화를 했다는 것은 여의도에서는 정설이다. 이렇듯 지난 4년 동안 문재인 대표는 혁신 행보보다는 통합 행보를 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개혁적 국민정당’ 창당을 제안한 천정배 의원은 지난 20일 신당구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문재인 대표께서 저와 접점을 찾을 수 있다고 하셨나. 미안한 이야기지만 새정치연합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통합 제안을 일축했다. 이 날 그의 기자회견문에는 ‘통합’이라는 단어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정치혁명과 개혁이라는 낱말을 수십 차례 반복하면서 신당이 “확고한 개혁적 가치와 노선을 추구하는 정당”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이를 위하여 경제·복지·노동 분야 등의 현장 활동가, 지역사회 발전에 헌신한 풀뿌리 활동가, 청년의 문제와 씨름해온 청년 지도자 등의 동참을 호소했다. 이는 새정치연합과의 의도적인 차별화 시도이다. 그런데도 이튿날 문재인 대표는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천정배도) 함께 가야 한다. 지금 야권이 정말 똘똘 뭉쳐도 어려운 판에 이렇게 분열한다면 더더욱 어렵다.”고 거듭 통합을 주장했다.

20년째 여의도에 몸담고 있으며 5선이지만 그래도 천정배 의원은 여전히 개혁가라고 불릴 만한 정치인이다. 그는 3김과 동교동계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천신정으로 불리며 새천년민주당의 정풍운동을 주도했다. 현역의원 최초로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국민경선에 불을 살랐다.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으로 참여하여 정당개혁을 이끌었다. 민주당 개혁특위 위원장을 맡아 당원제도 및 공천제도 골격을 마련하였다. 김상곤 혁신안의 많은 부분은 천정배 개혁안을 승계·발전시킨 것이다. 이처럼 지난 시기 천정배 의원이 남긴 개혁적 성과는 작지 않다.

통합만을 앞세운 정당은 승리한 적 없어

통합도 중요하고 개혁도 중요하고 둘 다 중요하다. 하지만 역대 총선에서는 과연 통합과 개혁 중에 어떤 노선이 유권자에게 잘 먹혔을까?

2004년 열린우리당의 과반수 의석 획득은 새천년민주당과의 분당 속에서 이뤄낸 값진 결실이었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민주노동당과 인위적인 선거연대를 하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은 정당 득표율에서 한나라당에 비해 겨우 2.5%를 앞서면서 비례대표 의석은 고작 2석만을 앞섰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의 전략적인 투표로 지역구에서 무려 29석이나 앞서는 바람에 압승을 할 수 있었다. 통합 없이 거둔 대표적인 승리의 사례이다. 정치개혁(차떼기 정당 심판)과 지방분권(행정수도이전 공약) 등 개혁 의제를 전면에 내세운 전략이 주효한 것이다.

2008년 통합민주당의 참패를 구한 건 개혁공천이었다. 총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과 구 민주당이 통합하며 손학규․박상천 공동대표 체제가 들어서자 영남지역의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이 탈당하거나 대거 불출마를 선언한다. 유시민 전 복지부장관, 박재호 전 청와대 비서관 등이 무소속 출마를 선택했다. 선거전 136석이던 기호 1번 통합민주당은 영남지역 68개 선거구 중 무려 26곳에서 출마할 후보를 찾지 못해 투표용지를 공란으로 처리했다. 말이 좋아 통합민주당이지 내용적으로는 영남 개혁세력이 대부분 이탈한 것이다. 4개월 전 대선에서 530만표 대패와 이명박 정부 집권 초 치러지는 총선에서 전문가들은 다들 50석도 힘들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공천 특검으로 불린 박재승 공천위원장을 앞세운 통합민주당은 철저한 개혁공천으로 위기를 넘겼고, 그 결과는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보다 2석 많은 81석이었다.

2012년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의 야권연합은 예상과 달리 140석에 머무르고 새누리당의 과반수 의석을 허용했다. 이유는 공천 실패와 주요정책 변경에 있었다. 민주통합당이 전국적으로 100곳 가까운 선거구에서 남발한 단수공천이 최악이었으며, 집권 당시 추진한 FTA와 제주해군기지건설을 반대하면서 이것 역시 화근으로 작용했다. 이에 비해 새누리당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친박 핵심 쇄신공천과 막말 파동을 일으킨 석호익 후보를 신속하게 교체하면서 승리를 챙겼다. 정당 득표율은 야권연합이 47%, 새누리당이 42.8%였지만 지역구에서만 새누리당이 14석을 앞섰다. 지역구 의석의 절반(112석)과 개혁적인 유권자들이 몰려있는 수도권에서 야권연합의 5% 이내 낙선자가 무려 14명이었다.

▲ 무소속 천정배 의원이 23일 오전 광주 시의회 기자회견장에서 신당 창당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통합보다 개혁이 위력을 발휘한 것은 비단 야권 뿐 아니다.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인위적인 정계개편이 단행됐다. 전무후무한 216석의 거대여당이 탄생한 것이다. 민자당은 무소속 의원까지 흡수하며 한때 218석까지 다다랐으나 1992년 총선에서 과반수에도 미치지 못한 149석에 그치고 말았다. 통합 후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가 일상적인 권력 다툼으로 국민께 바람 잘 날 없는 모습을 비쳐주었기 때문이다.

2000년 총선은 야당이 된 한나라당의 싱거운 승리로 끝이 났다. 이회창 총재는 3년 전 대선에서 그의 킹메이커로 나섰던 김윤환 의원, 한나라당 통합의 한 축으로 참여한 이기택 부총재 등을 개혁이라는 이름아래 줄줄이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대신 그 자리는 김성조, 엄호성 등 40대 신진 인사를 배치했다. 이 총재는 2년 후 대선 재수를 준비해야 했다. 김윤환 의원 등은 한나라당을 탈당,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나섰으나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이 났다. 지역구 1석, 전국구 1석에 그치며 완패, 한나라당을 위협하지 못했다. 한나라당은 133석으로 원내 1당으로 올라섰고, 115석에 그친 새천년민주당을 여유 있게 따돌렸다.

16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에서 문재인 대표는 "우리는 지금 혁신이냐 기득권이냐, 단결이냐 분열이냐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있다."라고 호소했다.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혁신과 단결은 병렬적이지 않다. 무조건 통합의 구호를 외치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천정배의원이 제안한 '개혁당'이 진짜 하나쯤 있어서 야권 내 개혁경쟁을 유발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혁신 정도만으로 해결되지가 않는다. 혁신은 묵은 조직이나 제도·풍습·방식 등을 바꾸는 일이지만, 개혁은 전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통합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 역시 개혁이 전제될 때만이 승리가 담보된다. 역대 선거데이터가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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