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이렇다 할 내용이 없이 하루 세끼를 직접 해서 먹고 밥값을 벌기위해 옥수수 같은 것들을 키운다는 설정으로 <삼시세끼>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누군가를 밟아야하는 경쟁이나 악다구니 없이 친구들과 함께 형편없는 실력으로라도 하루 세 끼 같이 해먹을 수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렇게 하루가 가면 내일 또 다시 아침을 하고 점심을 먹는다. 일을 하고 밥 먹는 평범하지만 평화로운 일상을 화면 속 판타지로 즐겨야할 만큼 우리네 삶은 고단해진 것일까.

언뜻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쓰고 설정에 맞는 옷을 입고 나와 실력만은 뛰어나게 노래를 하는 경연 <복면가왕>은 우리를 열광케 했다. 모두 다 아는 목소리와 실력이었어도 가면을 벗고 예상했던 그를 확인하면서 즐거웠다.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과거 속에 사라져갔던 인물이 나타났을 때 감동하기도 했다. 명성이나 이름 값, 그리고 편견을 모두 배제한 공평한 기회의 부여, 오직 실력으로서만 평가하는 시스템은 공정한 게임의 룰을 갈구하는 우리의 판타지를 자극했다.

“왜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라 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 말합니까”

브라질 전 대통령 룰라를 인용하여 드라마 <어셈블리>에서 진상필 국회의원이 한 말이다. 이 의원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원칙과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하며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국회의원직을 버리고 <패자를 위한 두 번째 지원정책> 법안을 통과시킨다. 한 사람의 능력과 선의에 철저하게 기대는 전형적인 히어로물임에도 불구하고, 표현방식이 손발을 오글거리게 하는 장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나를 울컥하게 만들곤 했다. 자신의 공천권이나 안위보다 국민을 최우선에 두는 정치인이 거기 있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아이가 있었다. 어떤 상처도 금세 아물어 버리는 아이도 있었다. 이 아이들은 가진 능력으로 인해 권력에 쫓기고, 같은 편이 되지 않거나 전쟁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음의 위협에 놓인다. 특별한 힘을 물려준 아이들의 부모는 노화와 함께 약해진 능력에도 불구하고 만신창이가 되도록 싸우고 싸워서 아이들을 지킨다. 결국 지켜낸다. 얼마 전 마지막화가 나온 강풀의 <무빙>이다.

<무빙>은 어떻게 보면 가장 슬픈 판타지를 담고 있다. 아이들을 지키는 부모, 어른이 있는 세상. 불과 얼마 전 우리는 많은 아이들을 눈앞에서 잃었다. 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 아이들의 영혼을 달래줄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빙>의 마지막은. 그렇게 지켜진 아이가 세상을 구하는 것이었다. 아이를 지킨 순간 그들은 세상을 지킨 것이다. 우리도. 세상을 지켜야 한다.

정미정 현 공공미디어연구소 부소장 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연예오락특별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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