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현재적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무엇을 꼽으라면 아마도 '비동시성의 동시성(the contemporaneity of the uncontemporary)'이 아닐까 싶다. 한국 사회는 민속지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특성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다. '비동시성의 동시성', 얼핏 어려운 얘기일 수 있다. 개념을 좀 구체화하기 위해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나눠서 상상을 구체화해보자.

예컨대 사적 영역에선 이런 것일 테다. 별다방에서 카라멜마끼야또 한 잔을 테이크아웃하여 20층 높이의 복합 콤플렉스로 출근한다. 점심은 부장님의 의견을 따라 굽이굽이 피맛길을 돌아 연탄구이를 먹는다. 그리고 저녁에는 지역 모임에 참여한다. 어떤가, 있음직한 일상처럼 읽히시나. 하루에는 전혀 다른 몇 개의 시간대가 엉켜있지만 개인들은 아무런 지체함 없이 천연덕스럽게 그 사이를 횡단해 다닌다.(아니 다녀야 한다.) 기특하다고 해야 할까 아님 억척스럽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문제는 이 개념이 공적 영역으로 옮겨지면 복잡해진다. 세계 최고의 과학적 합리성과 경제적 효율성을 자랑하는 삼성전자는 전근대적인 세습을 통해 경영권을 유지해 간다. 어떤가, 무슨 얘길 하려는지 느낌이 오시는가.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사적인 차원에서 취향의 잡종화, 욕망의 중층화 따위와 연관을 맺지만 공적인 차원으로 넘어오는 순간 모순적 제도 혹은 상식의 억압이 된다.

그렇다면 최근 있었던 'YTN 블랙 투쟁'에 대한 시청자 사과 명령은 어떨까? 여기서도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작동했던 것은 아닐까? 방송통신심의위원회란 모순적 제도가 만들어낸 상식의 억압이 아닌가 말이다.

▲ 지난달 10월 8일 YTN <뉴스Q> 앵커들이 '블랙투쟁'을 하고 있다.
답을 찾기 위해 우선 방통심의위원회의 그날 심의록부터 검토해보자.(방통위원회 심의록) 이런 저런 얘기들이 있지만, 사과 명령의 필요하다고 판단한 결정적 이유는 두 가지이다. 박정호 위원 등을 중심으로 주장한 '공정성'과 '품위 유지' 위반이 그것이다. 읽기만 해도 우선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찬찬히 읽어보면, 민주사회 보편 상식과는 아찔할 정도로 확연한 다른 시간대를 확인할 수 있다.

앞서처럼, 나눠서 살피는 것이 좀 더 그 아찔함을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번 결정을 검은 옷의 '의도' 부분과 관련된 '공정성'과 검은 옷의 '상징성'에 관한 '품위 유지'로 나눠서 살펴보자.

검은 옷이든 흰 옷이든 '의도'만 있으면 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심의를 담당하는 공적 기구이다. 이번 심의의 문제를 말하기에 앞서, 심의와 검열은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언론학자 전규찬은 이렇게 말했다. 심의는 검열과 절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고. 오히려 서로 정반대되는 개념이라고. 그것은 대화적인 것과 일방적인 것, 숙의(熟議)적인 것과 억압적인 것, 이성적인 것과 폭력적인 것의 대비라고. 심의가 자아와 타자간 대화라면, 검열은 상대편을 배려하지 않는 자아의 독백이라고. 결국, 심의는 자신을 최대한 타인의 입장에 놓아보는 상상력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실은 다르다. 심의의 현장에서 박명진 위원장은 말했다. "왜 검은 옷을 입었는지 알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시는데 사실 다 아는 얘기 아니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발언이다. 이번 심의는 서로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은 심의이다. 오히려 그걸 막은 심의이다. 얼추 다 알지 않느냐는 허약한 그리고 정치적인 토대에서 출발하고 결론난 심의이다. 심의가 될 수 없는 심의이다.

심의를 언어적으로 한 번 뜯어보자. 한자로 審議에 해당한다. ‘살피다’ ‘자세히 밝히다’ ‘깨닫다’ ‘조사하다’의 뜻을 지닌 ‘審’자와 ‘의논하다’, ‘책잡다’, ‘가리다’라는 뜻의 ‘議’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위의 심의가 그런 과정을 수행했다고 보시는가? 심의는 무릇 "덮여진 사물을 자세하게 드러내 조사하고, 그럼으로써 그 뜻하는 바를 올바르게 밝혀내기 위한 의논의 과정"이어야 한다. 이러한 언어적 정의에 따르면, 이번 심의는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낸 상태에서 자행된 만행일 뿐이다.

결정적으로 이런 심의에선 검은 옷이냐 아니냐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문제가 형식도 내용도 아닌 심중, 바로 의도라면 말이다. 의도가 불온하다는 대충의 기준이라면 뭣도 문제시 할 수 있다. 좌로 넘긴 헤어스타일이 좌편향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물으면 된다. '왜 왼쪽으로 넘겼는지 대충 아는 얘기 아니냐'고.

대충의 기준은 상식의 기준이 아니다. 권력의 기준이다. 일방적이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기준이다. 이 기준은 검은 옷이던 흰 옷을 가리지 않는다. 검은 옷이 문제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두드러지고 단호한 검은색

<블랙패션의 문화사>를 쓴 존 하비는 검은색의 이중적 의미를 지적한 바 있다. 문상이나 애도, 도덕적이거나 청교도적인, 점잖거나 겸손함 따위의 상징성과 자신 있고 중요한 힘이라는 상징성을 동시에 지닌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행위로서의 검은 옷 역시 이중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 엄격한 형식을 지키면서 동시에 형식에서 비켜서는.

방송은 다양한 사람과 장비가 유기적으로 움직여 ‘종합적인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복잡함의 총체이다. 이 복잡함에 반하는 단순한 심의는 그 자체로 위협적이다. 때때로 그 단순한 심의가 방송의 복잡함 전체를 마비시키는 엄청난 재앙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방송이 전하는 그림의 복잡함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은 오만하고 위험한 판단들이다. 박천일 심의 위원의 발언 중에 '쾌청한 날씨를 예고하면서 어떻게 검은 옷을 입을 수가 있나'를 묻는 대목이 있다. 사물의 여러 특징 중 하나에만 반응하는 사고를 흔히 자폐의 대표적 징후라고 판단한다. 검은 옷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뉴스룸 일반에서 별로 튀지 않는 완고한 형식이다 흰 옷, 노란 옷이라면 문제를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 검은 옷은 YTN 내부 구성원들이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고려한 선택이다. 미학적 상징성을 살리되 고도의 복잡성을 깐 행위였다. 심의위는 이러한 맥락을 아예 이해하지 못한다. 검은 옷이 무조건 불편하다고 말할 뿐이다. 논리가 없다. 이유가 없다. 검은 옷은 안 된다고 할 뿐이다. 복잡계를 역류하는 단세포처럼.

YTN의 '드레스 코드 블랙' 방송이 왜 사과 대상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방송스러운, 방송적인, 방송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YTN 노조원 '징계 무효' 소송을 제기하던 날 앵커들이 입었던 블랙 슈트는 근래 내가 본 가장 매혹적인 저널리즘의 한 장면이었다. 우리 시대의 검은 옷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은 입고 싶지 아니한가? 인터넷에선 12월 19일 2MB 당선 1주년을 기념하여 전 국민이 검은 옷을 입자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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